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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ray] 벼랑 위의 포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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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8.4 (21)
shougeki


※ 국내에 아직 '벼랑 위의 포뇨' 블루레이가 정발되지 않은 관계로
상기 YES24 상품 링크는 DVD 버젼으로 걸어놓습니다만,
이 글에서 사용한 스샷의 실제 소스는 일본판 BD 입니다.

※ 1장 ~ 2장으로 올라가있는 스크린샷의 경우, 구입 검토를 위한 화질 참조 용도를 겸해
1920 x 1080 사이즈로 업로드되었으며, 누르면 커집니다.
3장 이상의 연속 이미지는 리사이즈되어 업로드되었으며, 눌러도 커지지 않습니다.





'벼랑 위의 포뇨' 개봉 당시 관객의 반응은 크게 둘로 갈렸습니다.
다섯 살 또래의 시점을 잘 살린 순수하고 아기자기한 러브스토리로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즐기면 된다는 쪽과,
설명부족이 심각하고 개인성이 없어 애들이면 모를까 어른으로서는 볼 만한 게 못된다는 쪽이었죠.

이 영화의 제작의도는 기본적으로 전자에 부합합니다만,
표면적인 논리를 따지자면 후자의 관점도 사실상 그러하므로 딱히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후자 쪽에 기댄 평가와 함께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제 끝났다' '이미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을 반복할 뿐' 이라
얘기하는 경우도 많은데, 여기에 대해서는 일단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죠.
이런 얘기를 하시는 분들이 주로 바라시는 '이전의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 과 같은 작품을,
'지금의 미야지키 하야오는 감이 떨어져서''못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들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예전과 같은' 정통 웰메이드스런 영화는 만들 수 있습니다. '안 만들'고 있을 뿐이죠.
'비슷비슷한 걸 계속 반복해봐야 의미가 없다.' 면서 전통적인 드라마투르기를 거부하는 모습은
이미 십 수년 전부터 수 많은 영상 기록과 서면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작이 따로 있어서 바로 비교가 되기 때문에 '하울의 움직이는 성' 에서 특히 두드러져보였고

'벼랑 위의 포뇨' 등에서도 보여지는 근래의 두드러진 경향으로서,
'의식적으로 설명을 배제'하고 있음 또한 확인할 수 있고요.
만들어놓고 변명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줄곧 그렇게 말해오고 있습니다.
결과적인 만듦새를 봐도 알 수 있는 것이고요.
일부러 작정한 게 아니라면야 작품이 이런 식으로 나오지는 않죠,
무슨 미야자키 할배가 당장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치매끼가 돌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쨌든, 일부러 한 것이라도 결과적으로 그 결과물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혹평은 할 수 있는 것입니다만,
적어도 그 만듦새가 '의도적인 산물' 이란 점 정도는 염두에 두고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혹평을 하는 것은 같을지라도,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다르니까요.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저 개인적으로는 '벼랑 위의 포뇨'에 대해 기본적으로 전자의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정리를 하면서 결과적으로 그런 태도를 취한 것이지,
영화를 처음 보면서부터 모든 것을 전긍정하며 볼 순 없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곧잘 ??? 스런 순간들이 있었고 전반적으로 기묘한 위화감을 줄곧 느끼면서도,
애니메이션의 원초적인 부분, 움직이는 그림의 힘과
영화 전반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순수성에서 뿜어나오는 힘으로,
가지를 뻗치려 하는 논리적 의구심을 억누르며 감상을 이어나갔던 것이죠.


그리고 시간은 흘러 DVD / Blu-ray 를 통해 얼마든지 재감상이 가능해진 지금,
영화를 처음 봤을 때에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려 합니다.

 



 

 


 


첫 번째 키워드는 수몰된 세계의 모험에 나선 소스케와 포뇨가 조우한 이 '가족'입니다.

소스케의 집과 산 위의 호텔 정도를 남기고 지역 전체가 수몰된 상황에서
아기를 데리고 뱃놀이하듯 유유자적한 이 가족의 분위기는 꽤나 이질적입니다.

이들의 실질적인 비중은 지나가는 엑스트라 1, 2, 3 정도에 불과합니다만


 



 


여기서 '부인' 역은 감독의 전전작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를 연기했던 배우 '히이라기 루미'가 맡았고, 무려 무대인사에까지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이쯤 되면 의미없이 지나가는 엑스트라일 리는 없는 거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 씬의 의미에 대해 인터뷰에서
'엄청나게 유연성이 있고 시시각각 한창 변화해가는 포뇨가 이후
너무 자기중심적이지 않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담보'

같은 씬으로서 반드시 필요한 씬이었다고 답하고 있고,
'아기와는 뭔가 인간 이전의 영역으로서의 커뮤니케이션' 을 하고 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이 나와선 안됐다' 라고 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숨겨진 힌트를 한 가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사실 이 시대의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죠.
'벼랑 위의 포뇨'의 공식 팜플렛에는 이들에 대해 '타이쇼 시대의 인간'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고 합니다.
('타이쇼'는 일본의 연호로서 1912년 7월 30일부터 1926년 12월 25일까지를 지칭합니다)
결코 작품의 시간대에서 이렇게 젊은 모습으로 살아 움직일 사람들이 아닌 것이죠.

즉, 쓰나미에 덮쳐진 현재의 이 지역은




 

생명의 물의 범람으로 인해 단순하게 데본기의 생물들이 새로이 생성된 것만이 아니라,
시공간의 경계가 흐려져 과거와 현재가 혼재되어 있는 상태,
혹은 이승과 저승이 혼재되어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기 상황에 비해 지나치게 낙천적으로 보이는 이 피난민들은
어쩌면 이미 전원이 '사망'한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소스케의 집과 산 위의 호텔을 제외한 지역 전역이 궤멸한 상태에서
인명 피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이들은
'식스 센스'에서의 '브루스 윌리스' 같은 상태라고 해석하는 것이 어쩌면 더 자연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낙천적인 태도 또한, 의식적으로 지각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어느 한구석에서는
자신들이 이미 죽었단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급할 것이 없어서 그렇다고 해석해볼 수도 있겠죠.

사실 이러한 지점들에 대해서는 위에서 끌어온
'공식 팜플렛의 기술'이라는 외부정보 외에,
작품 내적으로도 명시적인 힌트를 대사로 넌지시 건네주고 있습니다.
이런 씬은 두 번 존재하는데, 우선 그 중 앞의 것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배들의 무덤(=배에게 있어 일종의 저승)을 목격한 코가네이마루의 선원은 말합니다.

 


 


배의 무덤일 거예요, 분명...
저승의 입구가 열린 거야!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불가사의한 광경이 믿기지 않아 그냥 하는 말로 흘려넘기기 쉽습니다만,
사실은 정확한 현실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감독의 힌트일 수도 있는 것이죠.

한 편 이 장면의 한국어 자막은

 


 

이런 식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저승' 이라는 중요한 키워드가 거세되어 있죠.

번역가 자신의 상식에 비추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상식적으로 고쳐쓴 셈인데,
이 작품을 보는 상당수 성인 관객의 논리회로를 여실히 보여주는 듯 하여 흥미로운 한 편,
번역가의 작품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일본어를 모르는) 관객들이 제대로 영화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해석의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씁쓸하기도 합니다.

 


 

한편 이 대목에 이르러, 필연적으로 사고가 확장되는 지점은 극중 잠깐 등장하는 포뇨의 본명입니다.
브륀힐트는 북구신화와 그를 모티브로 한 각종 예술에 등장하는 발큐레의 장녀죠.
발큐레는 본래 '전사자를 고르는 자'란 뜻으로서 용맹한 전사자를 선별하여 발할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점에서도 이 이야기가 본래부터 의도적으로 '死者들의 세계'를 다루고자 한 것임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브륀힐트라는 이름은 그녀가 오딘(후지모토)을 배신한다는 것과,
신성을 잃고 지크프리트(소스케)와 맺어진다 점에서도 일맥상통합니다.

(참고로 소스케의 이름은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 '문' 에 등장하는
'벼랑 아래에 사는 소스케'로부터 따왔습니다)






 


 

다시 처음의 가족 이야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이 부인은 "누군가 했더니 소쨩이구나. 리사씨 댁의." 라고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보다보면 그냥 마을사람이겠거니 하고 넘어가기 쉽죠.

소스케 역시 별다른 의구심을 품지 않고 포뇨를 소개한 후
"아저씨, 리사(엄마) 못봤어요?" 라고 대화를 이어가지만, 사실 소스케에게 이들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앞서 얘기했든 이들이 이 시대의 사람들이 아니라는 외부 정보가 있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작품 내에서도 그것을 짐작하게 하는 힌트는 쥐어져있지요.
여기서 소스케의 커뮤니케이션 습관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스케는 친부모를 리사, 코이치라고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비롯해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커뮤니케이션을 시작하기 전 상대의 이름을 먼저 부르고 시작합니다. 요시에씨, 토키씨, 쿠미코쨩, 등.
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아저씨라고만 부르고 있지요.
이건 이들이 소스케가 알고 있는 이 마을 사람이 아니라는 암시입니다.

 


 


일어 자막: 요시에씨
한글 자막: 할머니


한글자막의 경우, 호칭 문제에 있어서도 일부 이름을 빼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리사, 코이치의 경우 국내 정서를 고려해 일률적으로 엄마, 아빠로 변경되었는데요.

사실 국내보다는 유연한 편이지만 일본에서도 친부모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닙니다.
개봉 당시 이 점에 대해 위화감을 느끼는 일본 관객의 평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고요.
즉, 이 호칭 문제에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작가에 의해 의도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개봉시 국내 정서에 따른 여파를 고려할 때 이러한 번역상의 변경 자체는 이해하고 넘어갈 수는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원칙에 있어서 올바른 번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번역에 있어서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은 작가의 의도여야 하며,
관객의 정서적 안정이나 한국어로서의 자연스러움이 중요하다 한들
작가의 의도까지 변질시켜선 안된다고 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대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다면 저 가족은 어떻게 해서 소스케의 이름을 알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 되는데요.
이 지점에서 부각하게 되는 것이

 


 

아기와 토키 할머니, 동일인설입니다.
이 부분은 확정적이라기보다는 다소의 억측이 될 수 있겠습니다만.

토키는 맨 처음에 포뇨를 봤을 때부터 다른 누구도 하지 않았던 반응을 보입니다.
'인면어를 육지에 오르면 쓰나미가 온다.' 라는 것이죠.
토키는 어찌하여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요?
생각해보면 쓰나미가 온 것은 인면어가 육지에 올랐기 때문도 아닙니다.
'포뇨' 라는 특정 개체가 후지모토가 만든 '생명의 물'이라는 특정 아이템과 접촉하면서 벌어진
극히 이례적인 사고였을 뿐이죠.

그렇다면, 다시 한 번, 토키는 어떻게 이런 구체적인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요?
그녀는 "옛날부터 그렇게 전해진다." 라고 이야기합니다만,
다른 누구도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언급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실제로 그 사건을 겪은 그녀의 가족들이 자신들의 시대로 돌아간 후,
가족 안에서만 전해지는 이야기였을 수도 있는 것이죠.

그리고 노인이 된 자신들의 아기를 돌봐주고 있는 리사씨의 존재와 그 아들을 알고 있었다고 하면,
다소 패러독스적인 감은 있지만 얼추 앞뒤가 맞아들어가게 되고,
타이쇼 시대의 아기와 현재의 노파라는 점에서 나이대도 일치합니다.

또한 이렇게 놓고 보면 토키(トキ)라는 그녀의 이름 역시

'とき=時'로서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와 발음이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져볼수록 그럴 듯 합니다.
뭐 그렇다해도 이 부분은 확정적인 것은 아니고 처음에 전제했듯 억측일 수도 있으니 그냥 넘어간다 쳐도,

 


 

싫다, 인면어잖아

 

이 작품을 풀이할 두 번째 키워드는, 역시 '토키'입니다.
토키는 이 작품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일일이 딴지를 거는 약간 심술궂은 할머니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어머니가 모델이라고 하죠)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실제로는 토키의 반응이야말로 가장 '상식적'이고 정상적이며 현실적인 반응입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토키를 제외한 이 작품의 인물들은 대부분 상식적이지 않고
비정상적이자 비현실적인 반응을 보여줍니다.

 


 

리사와 다른 할머니들은 포뇨를 보고 그저 '예쁘다' '귀엽다' 라고 말할 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냥 지나갑니다.
이 씬은 이 작품에서 첫 번째로 접하게 되는 심각한 위화감입니다.
일반적인 어른의 사고회로라면 '이, 이봐, 지금 그게 그냥 그렇게 넘어갈 일이야...??' 라는
의구심에 사로잡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하지만 이 작품에서 토키를 제외한 어른들은 대부분 그렇게 넘어갑니다.
(유일하게 해바라기원의 쿠미코쨩만이 거부반응을 내비칩니다만,
그것은 일종의 여심-_-;;;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죠)


심지어 리사는 얼마 전까지 물고기였던 (얼굴은 있었지만) ,
포뇨가 인간이 되어서 왔다는데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뿐입니다.

 


 

물고기가 사람이 되어도, 마을이 몽땅 물에 잠겨버려도, 그저 이렇게 받아들일 뿐.

이 작품에서 대부분의 어른들은 기본적으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다섯 살의 순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엄마, 아빠를 이름으로 부르는 소스케의 호칭 문제도 이와 연관되는데,
이는 '어린 아이들을 대등한 인격체로서 대한다.' 라는 의도적 표현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한글 자막을 긍정할 수 없습니다)

 


 


리사, 우는 거 아냐


코이치의 귀항이 취소되자 실망한 리사를 다독이는 소스케의 모습에선
마치 모자관계가 역전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역시 의도적인 연출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 포뇨가 인간의 피를 마셨어
- 포뇨? 좋은 이름을 받았네요


자기들이 붙인 본명을 두고 포뇨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후지모토. 개봉 당시 '무슨 아빠가 이래?' 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씬이지만, 이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본명을 버리고 포뇨이고자 하는 딸의 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자신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원천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스스로의 '의지'입니다.
감독의 전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이런 테마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반적으로 이러한 세계관으로 묘사되고 있는 '벼랑 위의 포뇨'에서
유독 이질적인 존재인 토키의 존재는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런 녀석에게 속으면 안돼-


세계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사태수습에 분주한 후지모토를 끝까지 방해하는 것 역시 토키입니다.
토키에게 있어 후지모토는 생긴 것만 봐도 그냥 악당이었습니다.
관객들이 보기에도 후지모토는 악역스런 얼굴을 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는 딱히 악당은 아니었고, 여기서는 실제로 사태수습에 분주했을 뿐이지요.

(사실 후지모토에 대해서는 극중 리사도 한 번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신 곧바로 소스케에게 사람을 겉보기로 판단하면 안된다는 말을 함으로써 보조를 해주고 있지요.
물론 소스케는 원래 안 그런다고 즉답합니다)


...자, 이제 슬슬 토키의 정체가 감이 잡힐 것 같습니다.
그래요, 토키는 바로 우리들, 영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머리로 재단하며 정합성을 추구하고 있는 어른 관객들의 대변자입니다.

해피엔드를 향해 나아가는 영화의 진행을 방해하는 것은 토키이고,
이 영화의 온전한 감상을 방해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재단하려 하는 성인 관객들의 유연하지 못한 논리회로입니다.

이 영화, 특히 후반부는 앞서 말했듯 의도적으로 설명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시선이 다섯 살의 시선을 중심에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랑망마레와 리사는 무슨 얘기를 했는지,
리사는 뭐가 괴로울 거라는 건지, 그런 건 다섯 살 소스케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소스케는 그냥!! 포뇨랑 리사 찾아서 집에 가고 싶을 뿐이거든요!! -ㅂ-
그냥 포뇨랑 뽀뽀나 하면 만사OK, 올 해피엔드인 것이지, 다른 것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결국 이 영화의 올바른 감상법은
이런 저런 거 따지지 말고 순수하게 영화에 젖어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될 뿐인 것이죠.
그리고 실제로도 아이들은 그렇게 이 영화를 봅니다. :)

인터뷰에서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후반 터널 장면에 대한 질문에 대해 답변 중
'애들은 그냥 부조리하게 잠이 쏟아질 때가 있다. 어른들은 오히려 이해를 못할지 몰라도,
아이들은 직감으로 이해할 것이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기도 한데요.
사실 이 장면에서도 설정상의 내적인 논리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만 구차하게 일일이 설명하지 않을 뿐이고, 보는 쪽에서도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스스로 상상해서 채워넣길 기대하고 있는 것이죠.





터널 얘기 나온 김에, 이제 영화의 종반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적지를 향해 갈수록, 포뇨는 졸립니다. 영화의 시간상으로는 분명히 푹 자고 난지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만, 포뇨는 그냥 졸립니다. 부조리하게!  :)

 


 

소스케는 터널 앞에서 리사의 차를 발견합니다. 그녀의 차 번호는 333 입니다.
이것은 3's(산즈) 즉 삼도천(산즈노가와) 을 의미하고 있는 말장난이라 생각됩니다.

 


 

포뇨를 풀이할 세 번째 키워드. '터널'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의미하는 장치입니다.

 


 

소스케는 터널을 보고 "여기 통과한 적이 있어" 라고 말하고
졸린 포뇨는 "여기 싫어..." 라고 말합니다.
터널은 이승과 죽음의 경계인 동시에, 산도(産道)를 상징하고 있기도 합니다.
영화의 내적 논리에 있어서 소스케 스스로는 그냥 말 그대로
이 터널을 통과한 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겠습니다만,
이는 인간으로서 태어난 소스케이기에 산도를 통과한 적이 있다(=출생)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 편, 인간이 되고 싶은 포뇨로서는 그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낍니다.

 


 

터널의 이름은 산상대도 (山上隊道) 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금 억지성일 수 있겠지만 앞 글자와 뒷 글자만 따서 줄여보자면 산도 (山道).
산도(産道) 와 발음이 같습니다. (일본어로도 모두 같은 산도입니다)

 


 

산도를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곧 자궁으로의 회귀, 태내회귀를 상징합니다.
물고기에서 인간으로, 일종의 급격한 진화를 겪었던 포뇨는 다시금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합니다.

(작품 내적인 논리로는 이것이 그랑망마레의 트랩이었다는 것을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터뷰를 통해 확인할 수 있기도 합니다)

 


 

물로 가득차있지만 자유롭게 숨쉬고 말할 수 있는 해바라기의 집을 둘러싼 공간은 곧 자궁의 상징입니다.
양수 속에서 사람들은 안전합니다. 심지어 휠체어 신세였던 할머니들은 자유롭게 뛰어다니기까지 하죠.
이는 이들이 이미 죽었고, 이곳이 저승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 저승도 좋네요
- 무릎도 안아프고
- 괜히 무서워했네
- 여기가 저승이었어?
- 용궁인 줄 알았수?
(일동) 깔깔깔깔


전술한 배의 무덤 씬에 이어 두 번째 명시적인 대사로서, 저승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냥 보고 있으면 할머니들의 농담 정도로 얼핏 지나치기 쉽습니다만,
사실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정확한 힌트를 제시해주고 있죠. 이쯤되면 더 왈가왈부할 것도 없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분명하게 죽은 자들의 세계, 죽음과 재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소스케와 포뇨의 선택으로 세계의 균열이 봉합된 후,

최종적으로 그녀들은 건강한 육체를 유지한 채 현실세계로 복귀합니다)

 


 

한 편, 이 장면의 한국어 자막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앞서 배들의 무덤 씬에서와 마찬가지로'저승' 이라는 키워드가 거세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번역가가 자신의 상식에서 벗어나는 부분을 임의로 변질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작품 자체에서 너무 어렵게 숨겨지고 있는 경우, 그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도 물론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으나,
이런 부분은 그냥 할머니들이 농담하는 것이라 생각하고서라도 그대로 옮겼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 편이 회화의 흐름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해당 작품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번역가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자질인지를 되새길 수 있습니다.

심지어 처음의 '착하게 생겼어'와 마지막의 '그럼 우리는 용왕님 딸이게?'는 번역가의 창작입니다.
원래 저런 대사는 없습니다.
그나마도 전자는 워낙 웅성웅성거리는 사운드여서 적당히 처리했다손 쳐도,
후자는 개그욕심이었는지 뭔지 정상참작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가끔씩, 다른 영화에서도 번역가들의 창작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제발 정신 좀 차리기 바랍니다.
창작을 하고 싶으면 번역하지 마시고, 소설을 쓰시든 뭘 하시든 전업을 하시길.

또한 국내 개봉시 이런 부분을 짚은 비평가가 없다시피 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해당 영화 제작국의 언어를 모르는 상태에서 비평을 한다는 행위는
결국 너무 무모한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랑망마레가 묻는 최후의 시련.

- 포뇨의 정체가 반어인이라도 괜찮은가요?


소스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합니다.


- 응, 난 물고기인 포뇨도 반어인인 포뇨도 인간인 포뇨도 다 좋아해요


일각에선 큰 갈등 없이 너무 맥없이 끝난다고 불평을 산 원인이기도 했습니다만
소스케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
그게 무슨 비밀이었던 것도 아니고, 소스케에게 포뇨는 처음부터 물고기였습니다.
하지만 소스케에게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을 뿐인 거죠.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터뷰에서
'소스케가 포뇨가 물을 뿜었을 때 우웩 하면서 물러서는 그런 아이였다면,
애초에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한 적이 있는데, 사실 그렇죠.
이 영화에서 포뇨는 토키, 쿠미코, 후지모토에게도 입으로 물을 뿜고 있습니다만
싫어하지 않고 즐거워한 것은 소스케 뿐이었습니다.
과연!!'두려움을 모르는 사내' 지크프리트 역할의 소스케입니다. :)

 


 

시련을 통과한 소스케를 가장 먼저 안아주는 것은,
이곳에 내려온 후로는 방해하는 일 없이 얌전히 구경하고 있던 토키입니다.

 


 

어쩌면 어릴 적 부비부비의 기억이 재연되면서,
그녀에게 어릴 적의 유연한 사고를 되찾아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아기에게 부비부비를 시전할 때의 포뇨가 반어인의 형태였다는 점은,
이 부비부비가 아기에게 어떤 마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닐까 망상해볼 수도 있습니다.
(극중 인간의 형태를 갖춘 후에도 포뇨는 마법을 쓸 때마다 반어인의 형태를 드러냅니다.
여기서는 일단 1차적으로는 물 위를 달려가기 위해 반어인이 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그녀가 본래의 시대로 돌아가는 데에 영향을 줬을 수도 있고,
마지막의 긍정적 태도 변화에 영향을 줬을 수도 있겠죠.


결국 영화를 보면서 제가 느꼈던,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느꼈을 위화감의 정체는
성인으로서 자연히 갖고 있었던 선입견과 덜 유연했던 사고회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영화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화력(畵力)과 세계관이 빚어낸 포뇨라는 캐릭터의
또 하나의 '마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마법이 통하지 않았던 관객 여러분들도 언젠가 다시 접하면 마법이 통할 날이 있을 수 있겠죠.

문화 감상이라는 게 매번 볼 때마다 꼭 같은 것만은 아니고,

살다보면 스스로가 변하기도 하며, 감상이 확 바뀔 때가 분명히 있거든요.


 


 


"포뇨 소스케 좋아!"


처음으로 입을 연 포뇨는 한 바퀴 빙글 돌면서 감정을 표현합니다.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온 포뇨는 역시 공중돌기를 시전하며 자신을 어필합니다.

 


 

포뇨의 인간 되기 여정을 마무리하는 왕자의 키스는 역시 공중돌기를 통해 이뤄집니다.
미야자키의 히로인은 자고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제격인 것이죠. 해피엔드, 해피엔드.




포뇨는 결국 진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 死者들의 세계를 모험하며 완성된 태내회귀와 재탄생의 드라마. -

여기서 비로소 관객은 이 영화의 메인 캣치카피와 조우하게 됩니다.

 


 


 



태어나서 다행이야.







 
휴... 간만에 길게 썼더니만 상당히 오래 걸렸네요. 헉헉...
당초 생각보다 한참 더 걸려서 우울... 어휴, 돈도 안되는 거 이렇게 열심히 쓰면 안좋은데;;; ㅜㅜ

어쨌든. 근래 들어 한켠의 혹평을 늘 달고 다니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입니다만
저는 그가 장인의 영역을 넘어, 여전히 장인임과 동시에 작가로서 진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장으로서의 관록과 여유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결코 시도할 수 없는 작품을 만들고 있죠.
아무리 의도적이라 한들 설명과 개연성을 포기한다는 것은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옵션입니다.
실제로 지금의 그가 그러하듯, 거기엔 필연적으로 적응하지 못하는 관객들의 혹평이 따라올 수밖에 없으니까요.
다만 다른 평범한 감독이었다면 시도조차 하지 못할 도전을 그는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지요.
그는 그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기반이 있기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도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오히려 예전 그의 작품을 그리 크게는 선호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주로 혹평당하는 주요 타겟인 '하울의 움직이는 성' 에서부터 되려 좋아진 경우이기도 하고요.


이제는 그의 작품이 기다려지지 않는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만,
저는 앞으로가 더욱 기다려지고 있습니다.

이미 몇 번 은퇴 얘기를 했다가 번복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제 은퇴하는 건 포기했다고 하시더군요.
때를 놓쳤다고, 이젠 그리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고.
이미 연세가 적지 않다보니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겠습니다만, 앞으로도 좋은 작품을 기대하며.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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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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