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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호가스 <유행에 따른 결혼: 결혼 계약>
1743년, 캔버스에 유채, 69.9×90.8㎝, 영국 런던의 국립 미술관 소장
호가스가 창조한 장면은 하나하나가 범죄 장면을 연상시킨다
화가가 조심스럽게 심어 놓은 단서를 찾다보면 이야기의 퍼즐이 완성된다
런던의 어느 웅장한 저택 내부를 배경으로 부유한 상인과 백작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두 가문에 도움이 될 결혼 계약을 맺고 있다. 빨간색 외투를 입은 상인은 맞은편에 앉은 스콴더(Squander)백작의 아들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켜서 돈으로 귀족 세계에 편입하려는 중이다. '낭비하다'라는 뜻을 지닌 이름이 암시하듯 재산이 조금씩 줄어드는 형편인 백작 가문의 신랑은 파란색 외투를 입고 있으며 계약 과정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반면에 변호사는 신부의 귀에 무슨 말인가를 속삭이고, 회계사는 미지급 청구서를 한 장 더 백작에게 들이밀고 있다.
이 생생한 장면은 희대의 풍자가 호가스가, 잘못된 발상으로 시작된 결혼의 불행한 과정과 비극적 결말을 하나의 연결된 이야기로 묘사해 낸 여섯 점의 연작 중 첫 번째 그림이다. 재산을 노리고 이루어진 결혼을 풍자적 시각으로 바라보며 인간의 약점과 도덕적 결함을 강경하면서도 희화적으로 묘사했다.

스콴더 백작
가발을 쓰고 누가 보기에도 오만한 표정을 지은 스콴더 백작은 상인의 딸을 귀족 가문에 받아들이는 대가로 상당한 금액을 요구하는 것이 틀림없다. 호가스는 백작이 수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가문이 가계도를 부분적으로 펼쳐 놓고는 저명한 일가를 자랑스러운듯 손가락으로 가리키게 묘사하는 희극적 기법을 가미했다. 스콴더 백작의 방종한 성품은 통풍에 걸려 붕대를 감은 발을 백작가의 문장이 아름답게 새겨진 발판 위에 올려놓은 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부자의 질병'으로 알려진 통풍은 기름진 음식과 질 좋은 와인을 지나치게 많이 섭취하면 발병한다고 여겨졌다.

신랑
왜소한 몸집의 백작 후계자는 예비 신부보다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감탄하며 바라보는 데에 더 흥미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신 유행의 프랑스풍 옷을 차려입은 백작의 아들은 유럽 대륙으로 유학을 다녀온 듯하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방탕한 생활을 했다. 목에 보이는 검은 점은 '프랑스 발진'으로 알려진 매독의 증상이다.

신부
허영심이 강한 예비 신랑에 비하면 비교적 수수한 차림새를 한 상인의 딸은 실버텅(Silvertongue:'훌륭한 언변'이라는 뜻)이라는 제법 적절한 이름의 변호사가 귓가에 속삭이는 말을 열심히 듣고 있다. 연작의 후반부 그림을 보면 이 변호사가 신부를 유혹했음을 알게 된다.

메두사
신부와 신랑 사이의 벽에 걸린 그림은 비명을 지르는 고르곤을 묘사한 것으로 카라바조의 <메두사(Medusa)>를 연상시킨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로 머리카락 대신 뱀이 돋아난 메두사는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한쌍의 남녀에게 닥칠 무서운 미래를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개
신랑 신부의 불행한 결합과 그들의 서글픈 운명을 반영하는 두 마리의 개가 서로 연결된 족쇄를 찬 채 왼쪽 하단의 구석에 앉아 있다.

미지급 청구서
회계사는 스콴더 백작에게 새 저택을 짓느라 빌려 쓴 돈의 총액을 산출한 듯한 서류를 보여 주고 있다. 미지급 청구서와 결혼 계약서를 나란히 보여 줌으로써 호가스는 이 결합이 실은 양쪽 집안의 아버지가 맺은 냉소적인 사업 계약일 뿐이라고 풍자한다.
이 그림은 연극적 무대를 그대로 빼닮았고, 무대극의 전개 장면과 같이 전체적인 장면 흐름을 통해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 준다는 점에서 호가스의 풍속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젊은 한 쌍은 계약 과정에 관심이 없는 듯 무심하게 서로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다. 이처럼 장래가 불확실해 보이는 첫 장면을 기점으로 이들 앞에는 간통과 성병, 게으름, 방종, 폭력, 죽음을 특징적으로 다루는 무시무시한 멜로드라마가 전개될 참이다.
호가스의 풍자화가 지속적으로 인기를 끄는 이유는 불쾌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주제가 시대를 초월하여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일련의 매혹적인 기존 형식 속에서 진행된 이야기가 불쾌한 결론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시국에 관한 주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의 풍자화는 어쩌면 현대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상당하는 18세기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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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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