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사진
sisachina
  1. ━ 중국 현지 A to Z

이미지



 




 


드라마같은 세자매의 이야기 '송(宋)씨 세 자매'


송씨 가문을 통해 중국의 현대사를 보다!


 


 








 


 안녕하세요? 시사중국어사 Little C 기자단 5기 한선영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중화민국의 퍼스트레이디를 둘이나 배출한 '입 떡 벌어지는' 집안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바로 송(宋)씨 집안인데요. 이 송가에는 예쁘고 똑똑한 세 자매가 있었습니다. 중국인들은 그녀들을 이렇게 정의하곤 합니다.


 


"과거 중국에 세 자매가 있었다. 한 사람은 돈을 사랑했고, 한 사람은 나라를 사랑했고, 한 사람은 권력을 사랑했다."


 


 


<읽기 전 손가락을 눌러주는 센스!!>


  



  

  




세 자매 (출처: 바이두)


 


 돈을 사랑했던 첫째 딸 송애령은 당시 중국 최대 갑부인 공상희와 결혼해 돈을 움켜쥐었습니다. 나라를 사랑했던 둘째 딸 송경령은 쑨원과 결혼해 그의 이상을 지켰고, 중국 민중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권력을 사랑했던 셋째 딸 송미령은 장제스와 결혼함으로써 권력과 정치를 제 손 안에 쥐고 흔들었습니다. 바로 이 송씨 세 자매가 중국의 현대사를 만들어간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우선 세 자매의 아버지에 관해 잠깐 살펴보고, 더 자세한 얘기를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1. 송씨 세자매의 아버지, 송가수


 






 송가수 (출처: 바이두)


 


 세 자매의 아버지인 송가수는 어린 시절에 미국에 가서 대학교육까지 받고,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돌아온 인물입니다. 송가수는 결혼한 후 선교일을 그만두고 인쇄업에 뛰어들었고, 주로 성경을 출판하며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송가수는 쑨원을 만나게 되고,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정치적 후원자가 됩니다. 쑨원이 펴내는 정치 선전물을 자기 인쇄소에서 몰래 찍어주기도 하고, 자금을 대주기도 했지요. 이 둘은 청 왕조를 타도하고 근대적인 새로운 국가를 만들자는 데 의기투합했습니다. 또한 둘 다 미국에서 지낸 경험이 있는데다가 기독교인이어서 쉽게 친해졌다고 하네요.


(동아일보 매거진: 신동아 2009년 7월 8일자)



 송가수는 '큰 세상을 보게 하는 것'을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10대 초반이었던 딸들을 모두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훗날 많은 중국인들은 이런 송가수의 교육법을 연구하기도 했는데요. 그만큼 많은 것을 보며 견문을 넓히고 지식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겠죠?


 


 


 







 


2. 송애령, 돈을 사랑했던 첫째


 





송애령 (출처: 바이두)


 


 1) 뭐니뭐니 해도 MOney!
 큰딸 애령은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송애령은 미국에서 돌아온 뒤 손문의 비서로 일하다가, 공자의 직계후손이며 자신처럼 미국 유학파인 대부호 공상희와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정치나 경제방면으로 뛰어난 수단가였다고 전해지는데요. 공상희와 결혼한 뒤에도 다른 사람들보다 한 발 앞서는 감각으로 은행업을 시작, 중국의 경제력을 장악했다고 합니다. 공상희는 훗날 산업부 장관을 역임하는 등 장제스 정권의 재정을 담당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공상희 (출처: 바이두)


 


 송애령-공상희는 송미령과 장개석의 결혼을 강력히 찬성하며, 적극적으로 둘의 결혼을 추진했습니다. 송애령은 친정인 송씨가문과 남편 공상희의 공씨가문의 엄청난 재력에, 손문의 권위와 명예가 합쳐진 상황에서, 장개석의 군사세력까지 합쳐진 강한 연합체를 만들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송애령은 두 동생처럼 정계에서 직접 활동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 동생이 정치 노선의 차이로 대립할 때 송미령의 남편인 장제스의 집권을 지지했습니다. 송애령에겐 둘 다 같은 동생인데 그녀는 왜 송미령의 편을 든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송경령이 자신과 정치적으로 갈라서고, 기자회견 등 공식석상에서 자신들을 비난하는 발언을 자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은 평소에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했다고 해요. 송애령이 송경령을 죽이기 위해 킬러를 고용했었다는 얘기도 있답니다. 친자매끼리 조금 섬뜩한 얘기지요?



 공상희-송애령 부부는 자신들의 지위와 인맥을 이용해서 정부의 공금을 횡령했다든지 주가를 조작했다든지 하는 추문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배가 확실시 되자, 같은 편인 장개석에게 의논하지도 않고 미국으로 이주해버려 장개석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었지요. 또 미국이 중국에 제공했던 원조금 중 상당액을 송애령-공상희 일가가 가로챘다는 혐의도 받았답니다. 하지만 막강한 로비로 혐의를 벗고 미국 뉴욕에 정착했습니다.



(출처:
http://blog.daum.net/jha7791/14983291)


 


 


 







 


3. 송경령, 나라를 사랑했던 둘째


 





송경령 (출처: 바이두)


 


 1) 이 결혼 반댈세! :손문의 아내가 되기까지
 둘째 딸 송경령은 낭만적이고, 순박하고, 열정적이며 신념이 강한 여자였습니다. 언니 송애령이 결혼으로 손문의 비서직을 그만 두게 되자, 마침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던 송경령이 대신 비서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당시 손문은 혁명을 실패하고 일본으로 도망 와 재기를 도모하고 있었습니다. 절망적 상황에 빠진 손문에게 경령은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손문의 혁명을 누구보다 지지하고 신봉했다고 하는데요. 그런 혁명에 대한 열정과 신념으로 인해 그들 사이엔 조금씩 사랑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송경령과 손문 (출처: 바이두)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송경령에게 손문은 '아버지의 친구'였습니다. 즉, 송경령과 손문은 부녀 관계에 가까운 나이 차이가 났는데, 그 차이가 정확히 26살이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손문과 정치적 사상을 함께하며 그를 도와준 송가수였지만, 이 소식을 듣자마자 그의 노여움은 폭발하게 됩니다. 엄청난 나이 차는 둘째 치고라도, 손문은 엄연히 본처가 있는 유부남이었습니다. 손문은 일찍이 집에서 정해준 동향 아가씨와 결혼해, 그 부인이 하와이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자식을 키우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송가수는 손문이 예전에 일본에 머물 때, 일본 여자와 동거한 사실도 알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동아일보 매거진: 신동아 2009년 7월 8일자 )



 송가수는 송경령이 손문과 결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즉시 경령을 불러들였고, 방에 가두어 바깥출입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경령은 하녀의 도움을 받아 창문으로 도망쳤고, 손문과 함께 요코하마로 떠납니다. 1915년 10월에 경령은 아버지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 동경에서 손문과 정식으로 결혼합니다.
 뒤늦게 송가수가 결혼식장에 나타나 "이 결혼식은 무효야!"라고 외쳤다는 얘기도 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것으로 부녀 사이는 끝이 났고, 송가수와 손문이 나눈 오랜 우정과 동지애도 종지부를 찍었다고 합니다.


 


 


 








 


 2) 위대한 지도자를 만든 위대한 아내
 송경령은 대륙과 대만 양쪽에서 국부(國父)로 존경받는 손문의 아내로, 겨우 10년 밖에 안 되는 결혼기간 동안 손문의 아내이자 비서로 손문을 보필했습니다. 손문이 암으로 죽은 후, 송경령은 81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56년 동안을 혼자 살면서 손문의 정신을 지키고 계승했습니다. 그녀는 손문의 아내이자, 그의 혁명 동지였습니다.
 그녀의 성품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일화가 있지만, 그 중 대표적으로 두 가지만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중국이 처음으로 비행기를 생산한 때였습니다. 많은 중국인들이 이 비행기의 성능과 안전성을 믿지 못하고 불안해했는데요. 이런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송경령이 직접 시승해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손문이 너무 위험하다고 그녀를 말렸습니다.  송경령은 그런 남편에게 "저도 중국산이에요. 당신, 중국산에 자신 없어요?"라고 말했고, 손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하네요.


(출처: http://blog.daum.net/jha7791/14983291)


 


 





 


 송경령과 손문 (출처: 바이두)


 


 또 한 번은, 광주에서 손문을 죽이려는 반란군을 만났을 때입니다. 반란군의 총탄을 피해 두 내외는 야밤에 잠옷 바람으로 도망가는 중이었는데요. 당시 송경령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중국은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라고 하며, 본인의 안전보다 손문의 안전을 먼저 챙겨 탈출케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당시 임신한 몸이었던 경령은 죽음까지 각오하였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아기는 유산되었고, 그 후로 그녀는 영원히 아이를 갖지 못했다고 합니다.


(출처: 홍콩 수유저널)


 


 



 








 


 3) 퍼스트레이디
 중국인의 손문에 대한 존경이 깊어지고, 그녀는 '國母'로서 빛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 후, 송경령은 국공내전에서 성공한 모택동의 신중국건설에 참여했고, 신중국이 국제적으로 크게 인정받지 못할 때 유창한 영어를 바탕으로 많은 국제적 지인들에게 신중국을 알렸다고 합니다. 1981년에는 국가 명예주석의 칭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송경령은 "차라리 동생 미령이 죽는 것을 볼지언정, 장개석과 결혼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다."라고 말할 정도로 장개석의 인간성과 야심을 싫어했는데요. 그래서 미령이 장개석과 결혼한 후에도 계속 장개석과 대립하며, 중국 공산당 및 소련과의 연합을 추진하는 등 국민당 좌파 지도자 중 하나로 활약했습니다. 또 대륙이 공산화 된 후, 다른 송씨 가문 사람들과는 달리 대륙에 계속 남아 국가 부주석을 역임하였고, 여성 및 아동문제와 외국과의 친선에 힘썼습니다.


(출처: http://blog.daum.net/jha7791/14983291)


 


 



 







 


4. 송미령, 권력을 사랑했던 셋째


 





송미령 (출처:바이두)


 


 셋째인 송미령은 미국과의 외교에서 큰 활약을 펼쳤으며, 가장 최근(2003년)까지 생존했던 송씨 집안의 사람입니다. 송미령은 활달하고, 사교적이며 야무진 성격을 가졌다고 해요. 이런 성격 때문인지 '그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중국을 통치했을 것이다.' 라는 말도 있으며, 남편 장제스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배후세력으로 꼽힙니다.


 





송미령과 장제스 (출처: 바이두)


 


 1) 내 남편은 내가 지킨다.
 작은 언니 송경령이 남편의 비서 및 통역을 맡았던 것처럼, 송미령도 남편 장개석의 비서 및 통역으로 활약했습니다. 특히 서안사변 때 장학량에게 감금된 남편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서안으로 간 것이 유명한대요. 장학량과 주은래를 만나 담판을 짓고, 남편 장제스를 구출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진 일화랍니다.
 후에 장제스가 대미 외교를 성사시키고자 했을 때도, 아내 송미령의 활약은 대단했습니다. 그녀는 미국 의회에서 중국인으로는 최초로 연설을 했는데, 이 명연설로 인해 중국은 미국의 원조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송미령은 카이로 회담 때 남편을 수행하기도 했어요.


 


 


 








 


  2) 3세기를 거쳐 살다.
 송미령은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해 대만으로 물러난 후에도 대미외교에서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세상을 뜨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전처 자식 장경국이 집권한 뒤로, 미국으로 이주해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1995년은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년이 되는 해였는데요. 송미령은 98세의 나이에 미국 국회에서 종전 50주년 기념 연설을 한 장본인이랍니다. 어째서 그녀가 종전 기념 연설을 맡게 되었을까요? 저는, 그녀가 100년 가까이 살면서, 그동안의 모든 일련의 사건들을 직접 경험한 '살아있는 역사'였기 때문 아닐까?라고 생각해봤습니다.
 그녀는 기념 연설을 하고도 8년이란 세월을 더 살다가, 미국 뉴욕에서 10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둡니다. 송씨 세 자매 모두 오랫동안 살았지만, 그 중 가장 장수한 사람이 바로 미령이었습니다. 송미령은 1987년에 태어나 2003년에 세상을 떴으니, 무려 3세기에 걸쳐 살았던 인물이랍니다.


 


 



 







 


 5. 송경령 vs. 송미령



 1) 엇갈림의 시작
 송경령과 송미령 두 자매가 어긋나게 된 것은 송미령이 장제스와 결혼하면서부터입니다. 장제스는 일본과 러시아의 군사학교를 나온 군인이었습니다. 장제스는 192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손문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처음으로 송미령을 봅니다. 그 뒤 송미령을 향한 소위 '작업'을 시작하고, 손문에게 미령이 자기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합니다. 손문은 이런 장제스를 무척이나 신임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손문에게는 군사력이 절실했는데, 장제스 또한 손문에게 충성을 맹세한 몇 안 되는 군인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장제스 (출처: 바이두)


 


 하지만 경령은 장제스가 동생 미령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펄쩍 뛰었습니다. 당시 장제스는 본처와 이혼한 뒤 기생 출신의 새 아내를 맞은 상태였고, 고향에도 기생 출신의 첩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또한 송경령은 장개석이 손문의 유지를 어기고, 국민당을 자신의 권력을 위한 도구로 삼으려 한다는 것도 반대 이유로 내세웠습니다. 이것은 여자의 직감일까요? 실제로 장개석은 손문이 죽은 뒤 반공 쿠테타를 일으킵니다. 이 과정에서 손문이 성사시킨 국공합작을 무산시키고, 공산주의자들을 무자비하게 토벌하였는데요. 송경령은 이렇게 손문의 뜻을 거스르는 장제스를 역겨워하기 시작합니다. 동생인 미령에게도 실망감을 느끼게 되지요.
 그러나 동생 송미령 또한 언니에게 배신감을 느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송경령이 나이 많은 손문과 결혼할 때, 가족 중 유일하게 찬성하고 축하해줬던 것이 바로 송미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결혼을 축복해주지 않고, 극구 반대하기만 하는 언니에게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겠지요.


 


 


 






 


 2) 자매에서 적군으로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1차 국공합작은 쑨원이 죽은 뒤 장제스가 4·12 군사 쿠데타를 주도해 공산당원들을 국민당에서 축출하면서 끝이 납니다. 하지만 송경령은 손문의 국공합작 정신을 수호하고 실천하려 했습니다. 송경령과 장제스, 송미령이 대립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인데요.
 장제스는 외세에 맞서기 전에 먼저 국내를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공산주의자를 토벌해 내부를 안정시켜야 외부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뒤에도 장제스는 여전히 항일보다 공산주의자 박멸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학생과 지식인들이 연일 시위를 벌이며. 그를 압박했지만 장제스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이런 장제스의 고집은 손문의 뜻을 거스르고, 국민당의 정신에도 위배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송경령은 국민당을 탈당하고, 장제스가 눈엣가시인 그녀를 살해하려 하면서 둘의 갈등은 최고조에 이릅니다.


(동아일보 매거진: 신동아 2009년 7월 8일자 )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고 함께 자라왔던 자매는 이렇게 적군으로서 대치하게 됩니다. 같은 피를 가진 친언니에게, 혹은 친동생에게 총구를 겨누는 느낌이 과연 어떠했을까요? 상상만 해도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3) 죽어서도 보지 못했던 자매
 송경령은 임종 무렵 동생 송미령을 찾습니다. 송경령의 집사가 전화국에 가 주미중국대사관에 이렇게 전보를 칩니다. ‘장제스 부인 송미령 급히 귀국 요망.’ 대륙이 공산화되고, 국민당이 대만으로 간 뒤, 중국 대륙 전화국에서 장제스의 이름을 부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죽어가는 순간까지 동생을 찾던 송경령은 끝내 송미령을 보지 못했습니다. 



 송미령은 왜 송경령이 위독하다는 전보와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해달라는 중국 정부의 요청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일까요? 언니를 잃은 동생의 입장으로서는 당장이라도 가보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대륙과 대만 사이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공산당과는 교류할 수 없다는 기존의 입장을 지킨 것입니다. 대륙과 대만으로 갈려 떨어져 산 지 40여 년..이렇게 두 자매는 끝내 만나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6. 영화 <송가황조>


 




 


송가황조 포스터 (출처: 바이두) 



 지금까지 쭉 송씨 집안과 세 자매에 관해 말씀드렸는데요. 그들의 이야기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송가황조>는 '가을날의 동화'와 '유리의 성' 등을 만들었던 여감독 장완정의 작품으로, 양자경, 장만옥, 오군매가 각각 세 자매를 맡아 열연을 했답니다. <송가황조>는 1997년 홍콩에서 개봉한 영화로, 조금 오래됐긴 했지만 중국의 근현대사를 살펴보기에는 정말 좋은 영화랍니다. 여러분들도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보시길 바래요!


 


 중국은 합작과 분열을 거듭하며 지금에 이르렀는데요. 그런 중국의 근현대사의 중심에 이 세 자매가 있었습니다. 특히나 죽어서까지 만나지 못했던 송경령과 송미령 두 자매를 보면, 여전히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는 중국과 대만이 떠올라 씁쓸해집니다. 


 





  영화 속 세 자매 (출처: 바이두)


 


 


 


 


 살아있는 역사로써, 중국의 운명을 써내려간 그녀들의 이야기! 어떠셨나요? 유익한 정보였길 바라며, 저는 다음 포스팅에서 더 좋은 내용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재밌게 읽으셨다면 아래에 손가락을 꾸욱~ 눌러주세요 ^0^


 


불펌은 안돼요~!!


 


 스크랩 시 덧글과 손가락은 필수입니다~:)


   


 


 


   





★ 중국,송(宋)씨 세 자매,송가수,송애령,공상희,송경령,손문,송미령,장제스,송가황조,장완정,양자경, 장만옥, 오군매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3.04.26

댓글 0

빈 데이터 이미지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

sisachina님의 최신글

  1. 작성일
    2014.9.19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14.9.19
  2. 작성일
    2014.9.19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14.9.19
  3. 작성일
    2014.9.19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14.9.19

사락 인기글

  1.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7.1
    좋아요
    댓글
    107
    작성일
    2025.7.1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2.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7.1
    좋아요
    댓글
    100
    작성일
    2025.7.1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3.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7.1
    좋아요
    댓글
    169
    작성일
    2025.7.1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예스이십사 ㈜
사업자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