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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이끌어 온 자, 사무라이(侍)>



안녕하세요~ Little J 2기 남재표입니다. 요즘은 ‘일본하면 떠오르는 것’을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주제를 가지고 기사를 쓰고 있는데요 마네키네코와 하이쿠에 이어,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려는 것은 바로 일본의 무사, 사무라이에 대해서랍니다. 여러분들도 일본하면 날카로운 칼과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는 사무라이가 생각나지 않으시나요~? 게임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터라 아마 남성분들은 더더욱 떠올리기 쉬운 이미지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자, 그럼 저와 함께 가실까요?


 


 


 


 


 


<읽기 전 손가락을 눌러주는 센스!!>


 



 


 


 



#1. 사무라이(侍)


 






 


 



여러분들은 さむらい라고 읽는 ‘侍’라는 한자의 뜻에 대해서 아시나요~? 사무라이라는 말은 무사를 뜻하는 것이니까 무사라는 뜻이 아니겠냐구요~? 아쉽게도 아니랍니다. 우리나라에서 '시중들다', '모시다'등의 뜻을 가지는데, 일본에서도 그 뜻은 비슷하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옛날 일본의 さぶらう(따르다, 모시다)라는 말이 세월이 지나면서 변화하여 생겼는데요, 처음에는 높은 귀족들을 모시는 관리를 통틀어서 지칭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점차 권력이 있는 무사 계급, 혹은 그러한 가문을 호위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일이 많아져서 자연스럽게 상급무사들을 사무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에도시대에 이르러서는 무사를 총칭하는 말이 되었다고 하네요.


 


 


 


#2. 역사와 함께하는 사무라이


 


비록 현대에 들어서는 '사무라이'라는 말이 무사나 상급무사라는 의미로 번역이 된다고는 하지만, 사실 일본 역사에서 사무라이라는 집단은 단순한 무사가 아니었답니다. 일본 역사의 주축이 된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무라이는 일본 역사에서 자주 등장하고, 일본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이끈 사람들이었습니다.


 


 


ⅰ) 최초의 사무라이



 





 


 







 


다이라노 마사카도



일본에서 최초로 무사가 등장하는 것은 헤이안 시대 중기였던 10세기 경, 다이라노 마사카도(平将門 : 903~940)부터입니다. 이 사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나 역사는 생략하겠습니다만, 현재 도쿄의 치요다구에 있는 간다묘진(神田明神)에서 모시는 신이라고 합니다.


 


 


 


 


 


 


 


ⅱ) 황실의 계승을 둘러싼 두 가문의 전쟁, 겐페이(源平) 전쟁


 



 





 


 







 


두 가문의 마지막 전투 단노우라 전투



일본 사무라이의 역사적 기반이 되는 모습들의 대부분이 이 전쟁 속에서 있었던 일들로서, 후대에 전해지는 사무라이에 대한 이야기나 예술 작품들 중에 겐페이 전쟁을 소재로 한 것이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후대의 사무라이들의 정신적 면과 전술적 면에서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하네요. 겐페이 전쟁에서 유명한 전쟁은, 야시마 전투(屋島の戦い)와 단노우라 전투(壇ノ浦の戦い)가 있습니다. 단노우라 전투는 이 두가문의 마지막 전투가 됩니다. 헤이지(平氏) 가문의 당시 8살이었던 안도쿠 천황은 일본 천황의 세가지 보물을 가지고 배에 탑승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이 전쟁의 결과, 결국 겐지(源氏)가문이 승리를 하게 되고 안도쿠 천황은 세가지 보물 중 칼을 가지고 바다 속으로 뛰어내려 자살했답니다. 그리고 겐지 가문의 미나모토 요리토모(源頼朝)는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세우고 쇼군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역사 속에서 약 8세기 간 일본을 이끌어나가는 막부정권이 처음으로 생기는 때가 이때입니다.


 


 


 


 


 


ⅲ) 각 지방의 유력한 세력들의 난립의 시기, 전국시대(戦国時代)


 


중국의 춘추 전국 시대처럼, 일본에서도 국가 간의 다툼은 아니었지만 각 지방의 유력한 영주들이 약 2세기정도를 전란의 시기로 보낸 시대가 전국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여러분들도 들어봤을 법한 친근한 사무라이가 나옵니다. 바로 전국시대를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입니다. 당시엔 오다 노부나가 외에도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등 유력한 영주(大名(다이묘))들이 세력을 다투던 시기였지만, 뛰어난 전술과 지략, 그리고 조총 일제 사격술 전술로 그들을 모두 제치고 전국시대에서 호령할 수 있게 되었죠. 이때는 오다 노부나가의 조총 사격술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에 화약무기가 도입된 시기였습니다.
비록 이후에 오다 노부나가가 암살당한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를 거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1542~1616)에 이르러 도쿠가와 막부가 세워지고 나서야 완전히 전국시대가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말이죠.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 사람에 대한 역사와 더불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기도 한데요 예전에 1기에서 활동했었던 류진영님이 기사를 쓰신 걸 보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http://blog.naver.com/japansisa/110103714237)


 


 


 


 


 


ⅳ) 일본 근대화의 움직임, 메이지 유신


 





교토에서 에도(도쿄)로 행차하는 메이지 천황


 


일본 근대화의 발판이 되었던 움직임, 메이지 유신에 대해서는 다들 아시리라 믿습니다. 이 메이지 유신의 결과 일본은 서양에 대한 적극적인 개방이 이루어지게 되었죠. 그렇게 발전한 일본이 결국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하면서 일제 강점기가 발생하게 된 건 유감이지만 말이지만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도 서양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냐 마느냐를 가지고 설전을 벌인 것처럼 일본 역시도 메이지 유신이 있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그 혼란의 가운데에는 메이지 유신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무라이, 사카모토 료마(坂本竜馬)가 있었답니다. 당시 미국과의 불평등조약을 마음대로 맺은 막부를 타도하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 : 천황을 높이고 오랑캐를 몰아내자)에 대해서는 뜻을 같이 했지만 오래 전부터 앙숙사이였던 사쓰마 번과 조슈 번 사이에서 사카모토 료마는 그 둘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하여 삿쵸동맹을 맺게 했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가 설명하는 것 보다 일본 드라마 중에 Jin(仁)이라는 드라마에 이에 대한 내용이 나오니 보시면 이해가 어려웠던 분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ⅴ) 마지막 사무라이, 사이고 다카모리


 


 



 




사이고 다카모리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1828~1877)는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사쓰마 번의 번주였답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그가 존왕양이를 내세우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서구문물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조금 의아해질 수 있는 대목이지요. 사실 메이지 유신 이후 그는 일본이 서구화 되는 상황에 대해서 불만을 가져, 본래 있던 자신의 번으로 돌아갔답니다. 그리고 자신의 번에 사학교라는 학교를 세우고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었지요. 훗날 정부와의 마찰에서 다카모리의 힘이 되는 것도 이 사학교 출신의 무사들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세이난 전쟁(西南戦争)라고 한답니다. 그는 분명 사쓰마 번이라는 유력한 지방의 번주이기도 했고, 뛰어난 전략을 구사하는 인물이기도 했지만 결국 정부군에게 패하게 되고 그 자신은 할복자살하게 되면서, 이후 우리가 알고 있는 사무라이라는 집단은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3. 사무라이의 도구



흔히 우리는 사무라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면 날카로운 칼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적을 노려보는 무사의 모습을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본래 사무라이는 먼저 칼이 아니라 활로 싸웠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ゆみ(弓)



상당히 긴 장궁을 사용했는데요, 일차적으로는 말에서 활을 쏘는 기마궁수였다고 하네요. 화살을 다 소모한 후에야 비로소 칼을 들고 싸웠답니다.


 


 





그 다음에 보통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사시모노(指物)~! 사시모노가 뭐냐구요? 이 사진 속에서 깃발이 보이시나요? 주제와는 좀 빗나간 사진일 수도 있겠지만 사시모노는 사진 속 사람들이 등에 꽂거나 들고 다니는 깃발입니다. 전장에서는 사시모노에 자신의 가문의 문양이라든지 색깔을 넣곤 했는데요, 때로는 단순히 문양뿐만 아니라 자신을 소개하는 글을 써놓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의 투구는 독특한 모습이 많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이순신 장군이 일본 사무라이들의 이런 투구를 기이한 모양이라고 소개하면서 전리품으로 왕에게 바쳤다고도 합니다. 가문마다 투구가 각기 다르고 상당히 멋지고 화려한 투구도 많답니다.


 


 





아, 이건 추가적으로 설명 드리고 싶어서 따로 떼어두었는데요, 일본의 井伊(いい)가문의 갑옷이랍니다. 井伊가문은 이런 식으로 새빨갛게 옻칠을 한 갑옷을 통해 자신의 가문을 알렸고 가문에 속한 모든 병사들에게 입혔었는데요, 마치 그 모습이 악마와 같다고 해서 그 당시에 붉은 악마라고 불렸다고도 합니다.


 



#4. 일본인을 이끌어 온 정신, 무사도(武士道)


 


일본인들의 역사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무라이. 그들이 이끌어 온 일본의 역사는 대단히 길었고 그만큼 그 영향도 엄청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그 정신 중 큰 대목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우선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에 강제로 끌려갔던 조선의 유학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왜 그런지 의아해하실 수도 있겠네요. 그 이유는 바로 조선의 유학자들의 성리학적 사상이 일본의 무사도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본래 일본에서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무사도를 갖춘 사무라이의 모습이 시초가 아니었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리학이 넘어가기 이전의 사무라이들의 모습이 무자비하고 예의라곤 모르는 그런 집단이었다는 말은 아니지만, 전국시대와 같은 내부전란을 거치면서 하극상의 풍조가 성행했던 시기였습니다. 이 성리학을 통해 일본에서 충, 의, 인과 같은 사상이 구체적이게 될 수 있었다고나 할까요?


 


 







 


 



 


강항의 초상화


 
이런 일본에게 영향을 준 것은 조선시대의 유학자 강항(姜沆, 1567~1618)이라는 분에 의해서입니다. 당시 일본에서 성리학이라는 학문은 고위층의 승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알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시기에 일본에서는 유학자들을 죽이지 않고 국내로 압송하곤 하였는데, 강항은 그런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일본에 끌려온 그는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일념으로 살아가고 있었는데요, 그런 그에게 성리학을 배우고자 일본의 승려가 찾아온답니다. 적국에서 그의 마음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그 승려는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승복 대신 유교적 복식을 갖추고서 그를 찾아와 이 승려에게는 성리학에 대해서 가르침을 전수해줍니다. 이 승려가 바로 일본 성리학을 이끌었던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였지요. 후지와라 세이카로 인해 일본에서는 성리학이 널리 전파되었고 그 수준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죠. 이러한 성리학적 정신과 무사의 정신이 결합되어 무사도(武士道)가 탄생한 것이랍니다.


 


 




그러면 이제 무사도의 정신에 대해서 보도록 하죠.


 


 


 


1. 忠, 義(충성과 의리)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에서도 유교적 사상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조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점이 있는데요,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는 孝(효)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忠과 義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입니다. 이런 경향은 일본의 전쟁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요, 아버지와 아들, 혹은 형과 동생, 아니면 친척과도 서로 다른 군주를 섬기는 경우가 많아서 싸움에서 서로를 적으로 맞이하곤 했지요. 이들에게는 같은 핏줄이라는 의미보다는 자신이 섬기는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 47명의 사무라이가 쳐들어 간 모습 / 추신구라 드라마 )



일본에서 이 충성심의 절정으로 알려진 것이 바로 47명의 사무라이의 이야기, 추신구라(忠臣藏) 이야기지요. 추신구라의 이야기는 여러 장르로 존재한답니다.


 


 


 


2. 名譽(명예)



'그런 짓(나쁜 일)을 하면 사람들이 비웃는단다.'
일본에서는 어렸을 때 자식에게 이런 말을 통해서 자식의 행동을 통제한다고 합니다. 이런 방식은 옛날부터 존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사무라이가 자신의 자식을 심하게 타이를 때는 '부끄럽지도 않느냐!'라고 했다고도 하니까요. 위에서 사무라이는 충과 의의 부분을 강조한다고 했지만 일본에 존재하는 이런 명예의식은 무사로서의 명예와 더불어 가문의 명예와 같은 가족적 부분을 포괄한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한다면 자신의 가문이 욕먹는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런 정신은 그 개인에게 있어서도 몸가짐을 조심할 수밖에 없는 상당한 압력이 될 것입니다. 또, 사무라이로서 소년들은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며 큰 명예를 떨치는 것을 제일의 꿈으로 삼았는데, 심지어는 그런 명예를 떨치기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도 말라고 말하는 어머니도 있었다고 하네요.


 


 


 


3. 誠(진실됨)



일본의 사무라이는 상업행위를 철저하게 금했다고 합니다. 상행위는 유교적 사상이 자리 잡은 나라에서 사농공상이라는 분별로 인해 천대받기 일쑤였는데 그건 아마도 상업의 특성상 남을 속이기는 행위가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봅니다. 아무튼 일본의 무사들은 명예나 충성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을 아끼지 않았습니다만, 돈 때문에 모역을 꾀하거나 자신을 희생한 경우는 없다고 합니다. 대신 상업적 지식이나 사고와 같은 것에 대해서도 역시 문외한이었지요. 그래서 사무라이 사이에서는 구두약속도 지키지 않을 시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철칙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무라이들이 한 말은 상당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진실된 마음을 드러내는 행위라고 여기는 것이 다음에 나올 死(죽음) 부분의 할복(切腹, 腹切り)의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4. 死(죽음)



일본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위에서 다룬 충성과 의리, 명예 그리고 진실됨을 모두 아우르는 최후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충성을 표현할 때도, 의리를 저버린 행동을 했다고 사람들이 비난할 때도, 자신 혹은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을 때도, 자신의 무고함을 드러낼 때도 일본의 무사들은 이 할복이라는 자살방식을 택했습니다(추신구라 이야기에서도 자신의 주군에게 누명을 씌우고 죽게 만든 장본인을 죽이고 나서 47명 전원 할복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할복을 나타낸 게임 장면 / 할복 준비를 하는 사람)



일본에서는 죽음이 자신의 오명이나 죄를 씻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유교의 사상에서는 현대 과학상으로 뇌가 하는 활동(사고, 지식의 축적 등과 같은,)을 배에서 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할복은 배를 가르는 자살인데, 배를 가름으로써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당신에게 보여주겠다'라는 하나의 궁극적인 표현인 셈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 할복은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행위일 것임은 굳이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후대에는 할복 자살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카이샤쿠(介錯 : 할복한 사람의 머리를 베어주는 행위, 혹은 그 행위를 하는 사람)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카이샤쿠는 사무라이에게 있어서 불명예스러운 행위라고 하는데요, 그 이유는 성공을 해도 별다른 공도 없고, 자칫 실수라도 한다면 그건 죽어가는 이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였지요. 그래서 정말 친한 지인이나 혈육이 아닌 이상은 잘 하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이 할복자살의 고통을 대체(?)하기 위한 한 가지 편법도 있었답니다. 할복을 하지 않고 자세를 취한 채 가만히 부채를 배에 대면 이를 할복한 것으로 인정하고 카이샤쿠 행위를 하는 것인데요 이건 사실상 참수나 다름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무사의 자살행위는 자신만이 하는 할복 말고도 순시(殉死 : 따라 죽는 행위)가 있었답니다. 대표적으로는 자신이 따르는 가문의 수장이 전사하는 경우나 패전을 예감하고 할복하는 경우 그를 따르는 부하들이 따라서 할복하는 경우였지요. 이런 모습도 죽음으로써 자신의 충성을 보이고자 했겠지요. 잡혀서 고통스럽게 고문 받을 바엔 차라리 명예롭게 죽겠다는 생각도 물론 포함되어 있었겠구요.



상당히 긴 이야기라 지루하셨을 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 기사를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면서 느낀 건, 정말 사무라이들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이었답니다. 일본의 식민지 점령 사상의 바탕도 무사도에서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카미가제 부대도 사실상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대원들에게 강제로 주입시킴으로써 그 행위를 가능하게 했지요. 이런 모습을 통해 봤을 때 무사도가 단순히 하나의 옛 사상이나 사고방식이 아닌 근, 현대에 미치는 영향 역시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사무라이에 대해서 많은 걸 알 수 있게 제가 잘 설명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상 Little J 2기 남재표였습니다~!


 



※ 참고도서 - 사무라이(니토베 이나조 지음, 양경미 권만규 옮김)


                         사무라이(스티븐 턴불 지음, 남정우 옮김)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호사카 유지 지음)


 


※ 사진 출처 - Yahoo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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