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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sajapan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2.4.12
일본 여성운동의 대명사 히라쓰카 라이초 (平塚らいてう) 와 세이토 <靑鞜, 청탑>
안녕하세요. 제이기자 정유라 입니다. 벌써 두 번째 기사를 쓰게 되었네요! 이번 기사에서는 일본 페미니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 '히라쓰카 라이초'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다른 주제에 비해 조금 지루하게 보이실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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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쓰카 라이초 (平塚らいてう)
히라쓰카 라이초는 1886년, 정부 회계 검사원장 까지 역임했던 고위 관료출신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가부장적이고 독재적인 아버지의 성격으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 대해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명문 집안의 딸이었던 만큼 그 당시에 여자로서 쉽게 누리지 못하는 고등교육을 받고 자랐는데요. 오차노미즈고녀로 불리는 동경여자고등사범여학교를 다녔습니다. 이 학교는 상류층 자식들을 대상으로 그 당시 국가의 여성관이었던 현모양처를 육성하는 교육과정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선천적으로 총명했던 그녀는 이 교육방침에 숨막힘을 느끼고 세상을 회의적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청년시절부터 그녀는 자유를 꿈꾸고 자립하기를 원했죠. 졸업 후 아버지의 반대를 꺾고 어머니의 도움으로 일본여자대학에 입학합니다. 당시 여자로서는 최고의 엘리트 과정을 밟아나가며 철학서를 탐독하고, 여성의 자유, 자치의 삶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을 지닌 채 대학을 졸업한 히라쓰카 라이초는 게이슈 문학회 라는 곳에 참가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모리타 쇼헤이를 만나게 되죠. 모리타 쇼헤이는 동경제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으며 여러분이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일본의 대 문호 나츠메 소세키의 제자입니다. 모리타 쇼헤이는 당시 고향에 아내와 자식을 두고 있는 유부남이었습니다. 히라쓰카가 쓴 사랑에 대한 소설을 높게 평가해주었고 이를 계기로 둘은 사랑에 빠집니다. 1908년 3월 21일 ‘나는 결코 사랑을 위해 죽는 것이 아니다. 내 자신을 관철하기 위해서다’ 라고 쓴 유서를 남기고 히라쓰카와 모리타는 동반 자살을 하기 위해 눈 엎인 사오바라로 떠납니다. 그러나 모리타는 처음부터 죽을 생각이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자살 미수사건에 그치게 되죠. 그 당시 자살은 무지한 서민이 저지르는 것으로, 특권층의 엘리트들과는 관계가 없는 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가십거리가 되었으며 모리타는 이 때의 일을 소재로 소설 ‘매연’을 발표하기도 합니다. 이 당시 사회적 비난과 비방은 일방적으로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여자’ 였던 히라쓰카에게 향했죠. 매스컴의 대대적인 비판과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했던 히라쓰카의 모습을 본 그녀의 문학적 스승, 이쿠타 초코는 그녀의 천재성을 예감합니다. 이쿠타 초코의 강력한 추천과 그녀를 지지해줬던 어머니의 도움으로 히라쓰카는 여류문학의 발전을 지향하는 여성 문예 잡지 <세이토靑鞜 >를 창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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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토 靑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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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토 창간사>
“원시 여성은 태양이었다. 진정한 사람이었다. 지금 여성은 달이다.
(세이토 멤버들)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세이토의 창간사입니다. 이 창간사는 이후로 일본 페미니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태초 여성은 태양이었으나 지금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타인의 빛에 의해서야 빛이 나는 달과 같이 살고 있다는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죠. 이 창간사는 가부장 제도하의 봉건적 남녀관계를 타파하고자 했던 여성의 당당한 선언이었으며, 태초의 여성처럼 스스로 빛날 수 있는 태양으로, 타율적 존재가 아닌 주체성을 갖는 자율적인 존재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라이초의 염원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창간사를 시작으로 히라쓰카 라이초와 함께 세이토를 만든 그의 동료들은 일본 여성 해방운동을 이끄는 주역들이 됩니다. |
<신여성>
근대사 혹은 근대문학을 한번이라도 접하신 분들은 ‘신여성’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일본 언론은 세이토에 모인 여성들을 ‘신여성’ 이라고 야유, 조소했다고 하는데요. 그러나 히라쓰카 라이초는 오히려 ‘신여성’의 이미지를 야유와 조롱의 이미지에서 당당하고 자각적인 여성의 이미지로 바꾸어버립니다. 세이토 제 1조는 ‘본사는 여류문학의 발달을 도모하고’ 라고 시작하는데요, 이 때 히라쓰카 라이초는 ‘나는 신여성이다.’라는 선언을 하며 본래 1조 내용을 ‘본사는 여성의 자각을 촉구하고..’로 대폭 개정했다고 하니 히라쓰카 라이초가 얼마나 세상에 당당히 맞섰던 인물인지 짐작이 가시죠? ‘신여성’ 이라는 호칭은 세이토가 문예잡지를 뛰어넘어 여성 해방 운동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세이토는 가부장적인 사회 제도를 개혁하고 여성 스스로의 권리를 찾을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특히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파격적으로 여성의 성이나 순결에 대한 문제도 직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여성에게 강요되는 순결의식을 비판하고 여성 스스로 자유롭게 성을 주체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모성보호와 낙태 등의 주제도 과감하게 여성의 입장에서 다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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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무라 히로시와의 연애>
이 때 히라쓰카는 또 하나의 중요한 ‘연애’를 하게 되는데요. 연애 대상은 그녀보다 5살이나 어렸던 화가 지망생 오쿠무라 히로시라는 남자였습니다. 당시 이 둘의 연애는 시대상과 사뭇 달랐습니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그 당시까지 팽배했던 남성과 여성의 종속적인 관계로서의 연애가 아닌, 서로를 존중하고 대등하게 바라보는 사랑을 나눴습니다. 이런 연애야 말로 히라쓰카 라이초가 그토록 원하던 사랑이었겠죠? 그러나 이 때 세이토 멤버들과의 갈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쿠무라가 편지를 남기고 결별을 선언하죠. 이 편지가 굉장히 유명한데요 한번 보실까요?
“조용한 연못에서 물새들이 다정하게 노닐고 있는데 한 마리의 제비가 날아와 평화를 어지럽혔습니다. 어린 제비는 연못의 평화를 위해 날아가겠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너무나 사랑했던 것일까요, 히라쓰카의 노력으로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됩니다. 둘은 다시 만나 동거를 하지만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혼인 신고도 하지 않습니다. 요즘에야 동거하는 커플이 많지만 이 때 당시 이런 만남은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 둘은 1남 1녀의 자식까지 낳았고 아이들은 여성이었던 히라쓰카의 호적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끝까지 법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동거만 하는 사실혼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했다고 하네요. 이 당시에 이 커플의 행보는 사회적으로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사실 요즘도 동거에 대해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간혹 안좋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도 있죠? 그렇다면 그 당시에 얼마나 파장이 컸을지 짐작이 가시겠죠?
(히라쓰카 라이초와 오쿠무라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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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보호논쟁 & 신부인협회
또한 히라쓰카 라이초는 세이토의 멤버였던 여성 문학가 요사노 아키코와 ‘모성’ 에 대해서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아이를 11명이나 기르고 있던 아키코는 모성을 국가가 보장하는 것은 국가에 기생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여성도 직업을 갖고 독립된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반면에 히라쓰카는 모성을 가지고 후세를 낳아 기르는 여성을 국가가 돕지 않는 것이 바로 남녀 불평등의 시작이라고 말하며 모성의 보호야말로 개인의 행복과 사회적 이익이 일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모성보호논쟁’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두 명의 의견 모두가 납득이 갔는데요. 히라쓰카의 모성보호론은 오늘날의 국가적 모성보호정책과 일맥상통하게 보입니다.
이후 히라쓰카 라이초는 집필활동 및 소비조합운동 등에도 힘을 쏟습니다. 또한 전면강화, 재군비 반대, 세계평화 수립을 위한 평화운동에도 나섰습니다. 일본부인단체연합회 명예회장과 국제민주부인연맹 부회장 등의 직책도 맡으며 일본여성운동의 대명사로 남게 되었습니다. |
비판점 & 의의
히라쓰카 라이초에게서 앞서 언급한 내용 ‘모성보호논쟁’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국가를 떠난 여성상을 그려내지 못했다는 아쉬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에 군국주의를 걷게 되는 일본의 체제에 동조하게 되죠. 일본 정부에 의해 실시된 육아 정책은 당시에는 진정으로 여성을 배려한 것이 아니라 총 동원 체제 하에서 여성 노동력을 원활하게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진정한 남녀 평등정책, 모성 보호정책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히라쓰카는 이 때 파시즘체제에 협조하는 오점을 남겼다고 평가 받기도 합니다. 남성의 지배는 부정하면서도 국가의 지배는 부정하지 못한 한계점이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또 국가가 결혼을 통제하여 유전자가 나쁜 사람들의 결혼을 금지해야 한다는 우생학적 관점을 보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맨 처음에 히라쓰카 라이초를 소개할 때 언급했던 것처럼 그녀는 굉장히 높은 계급 집안 출신입니다. 따라서 후에 여성 노동자들이 비참한 생활을 목격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하층 계급의 입장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을 바라보기 힘들었던 면도 있었을 것 같네요.
나혜석은 “나에게 천재적인 이상을 심은 것은 <세이토>의 발행인 라이초(雷鳥) 여사였다.”고 이야기했으며 나혜석과 김일엽은 일본유학 시절 세이토를 너무 열심히 읽어 열혈 추종자가 되고 여성 해방에 눈뜨게 되었다고 하네요. 이처럼 히라쓰카 라이초는 1920년대 조선 최초의 페미니스트들에게도 큰 본보기로 작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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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딱딱한 주제일 수 도 있었는데 어떠셨나요^^? 히라쓰카 라이초와 세이토 그리고 그 후에 벌어진 모성보호논쟁이나 신부인협회의 활동은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내용을 풀어내기에는 저의 지식도 아직은 많이 부족할뿐더러 양도 엄청 방대하기 때문에 모두 써내지 못한 점 이해해주세요.^^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관련된 책이나 여러 학술지를 읽어보시면 일본 페미니즘의 역사와 그 의의에 대해 더 잘 아실 수 있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 출처 :日本 近代 女性文學 入門 : 明治ㆍ大正期 女性作家 短篇選 / 桶口一葉 外 9人 지음 ; 李智淑, 安貞和 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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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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