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름대로 해석
비렴급제
- 작성일
- 2010.5.12
은교
- 글쓴이
- 박범신 저
문학동네
‘밤에만’ 쓴 소설이니, 독자들도 ‘밤에만’ 읽기를 바라고 있다. 이 마지막 말을 끝으로 책장을 덮으니 작가의 말이 새삼 이해된다. 책장을 덮고 무엇인가 아련한 마음만이 남아 있다. 정적인 시간, 적요의 시간에 오로지 하나의 생각만이 나를 감싼다. 아프지도 않고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은 그냥 무덤덤한 아련함만이 나의 가슴 속에 남아 있다.
“ 눈이 내리고, 또 바람이 부는가. 소나무 숲 성에가 낀 창유리를 더듬고 있다.”
“ 관능적이다.” 「p13」
욕구에 충실한 하나의 문장이 끝나고 하나의 진정한 삶이 시작되었다. 끝이지만 끝이 아니었다. 진실한 삶이 하나의 문장과 함께 다른 이의 삶속에서 살아 숨 쉬었다. 문장은 그렇게 끝나있었지만 그의 삶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Q변호사를 통해서 인간 이적요의 진짜 삶이 옮겨 갔다. 시인 이적요의 죽음은 사람들에겐 아쉬움과 안타까움 이였지만 인간 이적요의 죽음은 한 사람에겐 크나큰 고통으로 몰아갔다. 이적요와 서지우는 죽었지만 한은교는 세상에 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은교 그녀는 그 둘의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 있었다. 두 사람의 중심에 있었던 그녀만큼은 그 중심의 둘레에 머물러 있었다. Q변호사의 눈으로 본 한은교는 그렇게 보이고 있었다.
외형적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이지만 내면적으론 닮아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나의 영역 안에 존재해 있다면 어떻게 그 사람과 공존하며 살아 갈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적요와 서지우 이 두 사람을 보면서 느낀 부분이다. 서로가 닮아 있기에 서로에게 많은 것을 바라게 되고 그것들이 결국 두 사람의 안타까운 자멸의 길로 인도하고 있다.
이적요는 천성이 낙타 같은 모습과 깊은 쌍꺼풀에서 서지우의 외형적인 모습에서 내면의 모습을 무의식적으로 간파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기에 이적요의 삶의 경험으로 느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는 서지우를 미워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며 그를 사랑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둘 사이에 은교가 나타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지우를 통해 은교를 만났다.
‘ 열일곱, 혹은 스무 살의 생머리, 눈빛이 누군들 맑지 않겠는가. 은교는 그냥, 밉지 않은, 좀 귀엽고 정결한 이미지의, 그 또래 ’
‘ 보통여자애 ’ 「p163」
은교와의 만남이 우연이라고 말하는 서지우, 서지우 자신은 그녀와의 만남을 우연이란 범주 속에 넣으려 하지만 이적요는 이 둘 모두 필연이라 말하고 있다. 서지우 자신도 알고 있지만 단지 부정하고 싶을 뿐이다.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느끼는 사람이 이 세상엔 많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 사람에 대한 공통된 생각 그것은 이 둘이 닮았다는 증거이며, 만약 서지우가 은교를 보지 못했다면 이적요 자신이 알아봤을 것이라는 걸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두 사람은 내면은 같지만 행동에 있어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적요는 서지우의 행동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보았고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미움을 서지우를 통해 발산하는 것이다. 죽이고 싶은 것도 자신이었고 화가 난 것도 자신이었다. 이러한 자신의 보고 싶지 않은 내면의 모습을 서지우를 통해 보았고 서지우를 통해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적요가 서지우를 미워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은교란 단지 이 둘의 발화점이었고 언제든지 건들이면 터져버리는 이 둘 사이의 불꽃같은 존재였다. 은교를 만나기전 이 두 사람의 갈등의 조짐은 단지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었던 것뿐이다. 내면적으로 존재해 있었으나 표면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수면위로 나오기엔 그 둘 사이는 무의식적 애착심 또는 사랑이라는 굴레가 너무나 커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 했었다. 하지만 은교의 출현으로 인해 사랑과 애착심보다 갈망과 욕망이 더 커졌기에 서로에 대한 갈등이 점점 외부로 표출, 심화되었던 것뿐이다.
‘ 당신을 죽여서라도, 당신의 명예를 지키고 싶은 게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
‘ 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선생님. ’ 「p330」
은교와 서지우간의 난폭한 모습을 목도하게 된 순간 서지우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 인간 이적요라는 브레이크가 작동하게 되었다. 파멸해가는 서지우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그가 작동한 것이다. 서로의 내적 갈망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던 그 둘이였기에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죽임이라는 사랑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진실을 알아줬으면 하는 서지우에 대한 마지막 사랑의 표현으로 그 노트를 남긴 이유일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갈망했기에 너무나 잘 알았기에 유언노트와 일기로 가장한 서로에게 주는 편지를 주고받았는지 모른다. 시인 이적요, 노인 이적요가 아닌 인간 이적요의 모습을 볼 수 있기에 더욱 더 아련하게 생각되어 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 똑같은 거사도, 똑같지 않아요! ” 「p321」
서로에 대한 갈등,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둘의 갈등은 서로 다른 사랑표현의 대립일 뿐이다. 결국 방법은 다르지만 하나의 사실만을 똑같이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이 둘의 갈등은 서로에 대한 보호본능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서로 다른 방법을 통한 보호본능의 실현이다.
서로에 대한 사랑, 은교란 존재를 통해 진정 사랑하는 것이 이 두 사람 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글의 초반 은교가 말했었던 ‘두 사람 사이에 낄 공간이 없었다.’ 라는 것을 그래서 미리 보여준 것이라 생각된다. 은교와 두 사람 간의 에로스적 사랑이 아닌 서지우, 이적요 이 두 사람의 필리아적 사랑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한 존재가 은교였을 것이다.
그녀가 나타나 비로써 불붙은 석유처럼 어느 하나 남지 않을 때 까지 산화(散華)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서지우가 끝내 결말내지 못한 소설을 끝맺어 주려는 사람, 이적요의 가슴 한구석에 아련히 간직하고 있는 D에 대한 불완전한 사랑을 서로에 대한 두 사람의 완전한 사랑으로 끝맺어 주려는 한사람, 그들에게 은교는 그러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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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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