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

추억책방
- 작성일
- 2022.12.27
딜리터
- 글쓴이
- 김중혁 저
자이언트북스
어린 시절부터 연필, 지우개 등 학용품이나 부모님이 주신 용돈(동전들)들을 자주 잃어버리거나 고장내는 장난감들이 많아서 덤벙거리는 성격과 형편없는 손재주 탓만 했는데 김중혁 작가의 장편소설 <딜리터, 사라지게 해드립니다>를 읽고나서 혹시 나도 딜리터가 아닌가?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됐다.
<딜리터, 사라지게 해드립니다>의 주인공 강치우는 인기 소설가로서 물건뿐 아니라 사람까지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최상급의 딜리터로 의뢰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소설로 발표한다. 강치우는 여자친구인 소하윤의 실종 사건으로 경찰서에서 오재도 형사에게 조사를 받으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주인공인 강치우를 중심으로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강치우를 돕는 사람들(레이어를 볼 수 있는 픽토르 조이수, 강치우가 요청하는 일을 봐주는 프리랜서 딜리터 이기동, 출판사 사장이자 의뢰인을 소개해 주는 양자인 대표)
2. 강치우를 쫓는 사람들(소하윤의 실종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강치우를 의심하고 있는 오재도 형사, 강치우를 의심하며 쫓는 실종자 모임의 대표인 배수현과 회원 이기동)
3. 강치우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사업에 방해되는 아들을 사라지게 하고 싶어 강치우를 찾는 그룹 오너 함훈 회장, 아버지에게 인정을 못 받고 끊임없이 사고를 치는 함훈 회장의 아들 함동수, 범죄자의 뒷정리를 해주며 업계에서 유명해진 딜리터 더스트맨)
이 외 실종된 강치우의 여자친구 소하윤
이렇게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행동이 명확해서 등장인물로 인해 소설의 내용이 헷갈리지 않고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다. 여기에 스토리가 신선하고 판타지와 미스터리를 넘나들어서 가독성 또한 좋은 것이 이 소설의 장점이다.
실종사건의 당사자인 강치우의 여자친구 소하윤은 사망하거나 실종된 것이 아니라 최상급 딜리터인 강치우에게 부탁을 해서 다른 세상인 레이어로 사라진 것이었다. 소하윤은 왜 간절히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을까? 그 이유는 자신이 여행을 가자고 졸라서 떠난 가족여행에서 가족들이 교통사고로 사망을 하고 정작 자신은 바쁜 회사 일로 가족여행을 떠나지 못해서 화를 면했기 때문이었다.
소설은 최상급 딜리터인 강치우에게 자신의 사고뭉치 아들 함동수를 사라지게 해달라는 함훈 회장의 의뢰로 벌어지는 이야기와 강치우가 레이어로 사라지게 한 여자친구 소하윤을 찾기 위해 픽토르(레이어에서 사람을 찾을 수 있는) 조이수의 도움을 받아 레이어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뒤엉켜 가다가 마지막에 실타래처럼 풀어진다.
레이어로 사라지기를 원했던 소하윤이 경험했던 가족의 사고사가 아니더라도 인생을 살다보면 사람들은 저마다 사라지게 하고 싶은 기억이나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작가 김중혁은 물건이나 기억, 사람을 사라지게 만드는 딜리터가 결국 지우는 사람이 아니라 더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며 고되고 지친 삶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위안을 주려고 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 닥친 불운만큼 앞으로는 행복만 찾아올 거라는 행복 총량의 법칙처럼 말이다.
소설은 물건이나 기억, 사람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딜리터, 세상 밖 여분의 레이어를 볼 수 있고 사라진 것을 찾을 수 있는 픽토르, 그리고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어하는 의뢰인의 이야기를 통해 한 번 쯤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판타지 소설이다. 저자는 주인공이 소설가라서 자전적 소설이라고 오해하지 말라고 하지만 소설 속 강치우가 이야기하는 대화나 일을 하는 사무실은 작가의 평소 생각과 꿈꾸는 공간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늘 새롭고 신선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레이어를 넘나들며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은 김중혁 작가가 맞지만 말이다(작가의 말에서 "지금도 다른 레이어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며 마무리 한다.").
"흔히 하는 오해죠. 소설 속 주인공과 작가를 동일시하거나 소설 속 모든 이야기들이 작가의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제 경험만으로만 소설을 썼다면 제 방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 묘사를 하는 데만 백 페이지를 넘겼을 겁니다(중략)." - 44쪽
강치우는 자신의 집보다 사무실에 더 큰 공을 들였다. 시내 한복판에 삼층짜리 건물을 사서 일층은 카페에 세를 주고, 이층은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 삼층은 집필실로 꾸몄다. 이층은 책으로만 가득 채웠다. 도서관처럼 책을 분류해서 꽂아두었고, 책장과 책장 사이를 미로처럼 만들었다(중략). - 91쪽
물건이나 사람을 사라지게 만드는 딜리터와 함께 또다른 세상인 레이어를 찾아가는 미스터리하면서도 판타지한 모험을 하고 싶은 사람이나 그동안 미처 느끼지 못 했지만 은연 중에 딜리터 기술을 사용하고 있는 독자라면 <딜리터, 사라지게 해드립니다>를 읽어보기를 추천해 본다.
내가 그동안 잃어버린 수많은 물건들은 어느 레이어에서 떠돌고 있을까?
딜리터는 지우는 사람이 아니라 더하는 사람이다. 지움으로써 더하고, 더하면서 지우는 사람이다. 우주의 단위에서 보면 더하기와 지우기가 똑같음을 알려주는 존재다. 딜리터는 우주의 저울이다. - 딜리터 묵시룩 중에서, - 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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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