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같은 삶, 인생같은 영화

삶
- 작성일
- 2021.1.19
조조 래빗
- 감독
- 타이카 와이티티
- 제작 / 장르
- 미국
- 개봉일
- 2020년 2월 5일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고백했다가 차였을 때, 당연히 맞는 건줄 알고 번쩍 손을 들고 답을 말했는데 오답이라며 선생님께 핀잔을 들었을 때, 아는 사람인 줄 알고 뒤통수를 치며 반가워했는데 무섭게 생긴 아저씨였을 때.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쪽팔린 일이거나 괴로운 일을 들어주는 나만의 친구를 만들어 본 일이 있는지. 안네에게도 가상의 친구인 키티가 있었듯이, 이 영화 <조조 래빗>의 주인공 조조의 친구는 무려, 히틀러 총통이다. 아! 물론 조조에게만 보이는 가상의 친구다.
아빠는 전쟁에 나가 소식이 없고 누나도 독감으로 죽었다.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언제나 바쁜 엄마와 둘이서 사는 조조는 열성적인 나치 당원이(되고 싶)다. 정확히는, 히틀러 유겐트(소년단)이 되고 싶지만, 허세와는 달리 혼자 신발끈도 묶지 못하고, 토끼의 목도 비틀지 못하는 소심한 열살짜리 꼬맹이다. 더구나 히틀러 소년단 캠프에 갔다가 수류탄으로 자폭(?)을 하는 바람에 얼굴은 프랑켄슈타인처럼 흉이 졌고 다리도 절름발이가 되어 나치 당원은 커녕 병사로 지원도 할 수 없게 됐다. 조조 베츨러라는 본명 대신 겁쟁이라는 뜻으로 조조 래빗이라고 불리게 된 것도 이 캠프에서부터다.
자기가 봐도 한심한 자신의 처지를 늘 위로해주는 건 히틀러 총통이다.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해주고, 혼자 있을 때도 늘 나타나 함께 해 주는 진정한 친구. 위의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외로운 소년에게 친구가 되어주는 히틀러는 누구보다 다정하고 따뜻한 어른처럼 보인다. 거기에 이 영화의 묘미가 있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부터 히틀러가 병사들을 사열하는 흑백 필름이 나오는데 그 배경음악이 비틀즈의 음악(I want to hold your hand)이다. 히틀러를 올바른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공작에 의해 만들어진 아이돌과 같은 존재라고 비틀어 표현하고 있다고도 느껴진다. 배경 음악 하나로 한순간에 히틀러를 우스운 아저씨로 만들어버리는 감독의 재치에 시작부터 신이 난다. 덕분에, 무비판적으로 군국주의와 나치에 대한 맹종을 어린 아이들에게 주입하는 히틀러와 그 세력들에 대한 풍자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히틀러에게 이렇게 세뇌당한 조조는 전쟁과 나치를 비판하는 엄마(스칼렛 요한슨)와도 종종 언쟁을 벌이는데, 마치 이 장면에서는 어리석은 서술자를 등장시켜 세태를 풍자하는 채만식의 소설 <치숙>, <미스터 방>이 떠오른다.
여기에 조조네 집 2층 벽 속에는 유태인인 엘사가 숨어 산다. 죽은 누나와 친구였던 17세 소녀다. 레지스탕스로 활약하고 있다는 네이선을 약혼자로 둔 그녀는 조조에게 발각이 되었을 때도 손쉽게 조조를 제압하고 히틀러 소년단의 상징인 단검을 빼앗아 가질 않나, 독일 비밀 경찰이 게슈타포가 집을 급습했을 때도 실제 조조의 누나인 척하면서 위기를 넘기는 등 아주 당찬 여성이다. 자신을 숨겨준 조조의 엄마와 밤중에 몰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순수한 사랑을 꿈꾸는 순수한 소녀로서의 면모도 보인다.
열혈 나치 당원(이 되기를 꿈꾸는)으로서 인류의 적인 유태인을 고발해야 하는 의무가 있지만, 그녀를 이길 수도 없고 또 그녀를 숨겨준 엄마도 위험하기 때문에 공존을 설득하는 조조. 대신 조건으로 내건 것은 '나에게 유태인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머리에 뿔이 달렸다거나, 상대방의 뇌를 조종한다거나, 동굴 천장에 매달려 잔다거나 하는 등의 얼토당토않은 얘기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둘은 나치와 유태인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전쟁의 비극과 나치에 대한 풍자에 그치지 않고, 열 살짜리 소년이 사랑을 느끼는 과정,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어둠을 몰아내는 과정을 함께 엮음으로써 위험하지만 자기 앞에 놓인 삶을 향해 용기있게 한발 내딛을 줄 아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성장이 있기까지 캡틴 K, 친한 친구 요르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와 용기를 잃지 않는 엄마의 따뜻한 지지가 필요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조조의 성장에 대한 은유를 대사와 행동, 설정에서 찾아내며 보는 것도 이 영화를 즐기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특히 '신발끈'에 유의할 것!)
Let everything happen to you. Beauty and terror. Just keep going. No feeling is final.
(아름다움도 두려움도 모두 일어나게 놔 두어라. 그냥 나아가라. 어떤 감정도 끝이 아니다.)
전쟁을 풍자하는 유머에 계속 키득거리다가, 유태인 소녀의 위기에 조마조마하다가, 소년의 성장을 응원하다 보면 어느새 영화에 푹 빠져 있는 자신과, 마음에 전해지는 훈훈한 온기를 확인하게 될 것이라 강력히 추천하는 영화, <조조 래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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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