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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 작성일
- 2021.4.18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 글쓴이
- 허영선 저
서해문집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인 박수근의 화법은 남들과 다른 데가 있다. 유화 물감을 조금씩 덜어 칠하고 말렸다가, 다시 그 위에 또 칠하고 말리는 평면화 작업을 통해 최종적으로 화강암의 표면과 같은 질감을 완성시킨다. 나에게는 제주, 그리고 4.3 사건 역시 그러한 과정을 통해 심적으로 형상화되어 결국 시꺼멓고 구멍 숭숭 뚫린 현무암과 같은 느낌이 되어가고 있다.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는 이름만 알았던 4.3 사건이, 그 아름다운 제주에 다녀오길 거듭하면서 그 흔적을 만나고, 관련된 책을 읽고, 현재 진행형인 사건들을 접하며 계속 덧칠되고 있기 때문이다. 구멍이 숭숭 나서 쉽게 부서질 것 같은 현무암들을 직접 만졌을 때 느껴지는 의외의 단단함과 날카로움에 놀라듯 말이다.
4.3은 알면 알수록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다. 간접적으로 접하는 이도 이러한데, '살암시민 살아진다'고 말하며 아픔과 눈물을 드러내지도 못한 채 수십 년을 살아와야 했던 이들의 마음을 대체 어찌 달래야 할지 방도를 찾기 힘들다. "강요받은 망각의 역사가 마침내 왜곡의 무덤을 뚫고 나와 파도처럼 솟구치(책머리에)'기에 '아직도 4.3이 무엇인지를 묻는 수많은 이들을 위한 새로운 대중서가 필요하다(지은이의 말)'는 이유로 쓰인 이 책은 '생의 찬란한 시절, 흑백사진 한 장 거둘 수 없이 떠난 젊은 남편을 평생 아릿하게 그리는 여인들, 꽃봉오리 애기 무덤을 쓰다듬는 시린 상처를 대면해야 하는 여인들, 열여섯 소년이 죄인 아닌 죄인으로 옥살이한 것도 모자라 연좌제에 걸려 자식들의 생마저 걸림돌이 됐다고 자책하는 늙은 가장', 뼈로도 돌아오지 못한 넋들, 후유장애를 짊어진 이들, 국가 공권력이 저지른 무차별 학살의 희생자들의 이야기다. 그 시절 그 섬에 살았다는 이유로 영영 봄날은 맞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상처는 드러내고 피고름을 짜내고 소독하고 약을 발라야 낫는다. 그 다음에야 흉터가 생길지 어떨지, 생기면 어떻게 할지 말할 수 있다. 당장 아프다고 덮어 놓으면 곪고 또 터지게 되어 있다. 잊는 것은, 맞고 당한 자의 몫이다. 그 마음을 있는 대로 풀어놓은 적도 없는 이들에게 지겹다, 그만하면 됐다, 잊어라, 힘내라고 말하는 것은 당사자가 아닌 이들이 할 말이 결코 아니다. 적으나마 도움이 되려면, 물어봐주고 들어주고 기억하고 기록하고 계속 끄집어 내는 일이다. 실체를 명확히 하고, 짚고 넘어갈 것은 짚고 넘어가야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그 책임감으로 올 2월 갔던 제주 여행에서 운 좋게 만난 우도의 숨겨진 보석같은 독립서점, '밤수지 맨드라미 - 산호의 한 이름이라고 한다 - '의 서가에서 이 책을 데려왔다. 그리고 매년 4월이면 읽는 4.3 관련 서적으로 이 책을 읽기로 했다. 단지, 이 섬에 살았다는 이유로 이유도 모른채 살육의 광풍을 온몸으로 맞았던 그 이야기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읽을 수 없었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끝까지 읽어내기 힘들 정도로 유독 참혹하게 느껴졌다. 특히, 다음의 이야기를 읽고는 내가 애비가 되어살고 있기 때문인지 몰라도 그 먹먹한, 참혹한 마음이 며칠이나 계속되어 무척 견디기 힘들었다.
"거의 아기 엄마들이야. 부녀자들, 애기를 안아 있는 사람, 나이 많은 할아버지 한 분 있어요. 촐왓에 전부 나오라고 해서 앉았어요. 그래놓고 신분 파악을 하였어요. 우리는 빙 둘러서 그것을 봤거든요. 한 젊은 엄마가 갈중이 적삼 입고 얼굴은 시꺼멓고. 애기를 안고 있었어. 애기 안은 사람은 그분밖에 없었어. 거기서 전부 쏘아버렸는데. 아직 젖먹인데 물애기, 그 아기를 양다리를 두 손으로 잡아가지고 생돌에 몇 차례 메쳤을 거야. 순경이 그렇게 했어요. 다섯 살 아이 하나는 총살할 때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했지요. 그래도 쏘았어요.(p193)"
그럼에도 끝까지 참고 읽어낸 것은, 이 무고한 희생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 4월 3일은 수업이 없는 날이었기 때문에 마침 문학 시간에 공부하고 있는 '납작납작 -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과 연관지어 4.3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슬그머니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 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 펄렁
하나님, 보시니 마땅합니까?"
피도 눈물도 더이상 나지 않을 정돌 바짝 말라버린, 입술도 표정도 없이 망각을 강요당한 그들의 슬픔에 공감하고 내 자식들, 내 학생들 그 다음에도 이 땅에 살아갈 이들이 결코 이 같은 험한 일을 다시는 겪지 않도록 말이다.
이 책의 말미에는 4.3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답사 지도와 함께 각각의 사연과 추천 코스까지 실려 있다. 4월을 몸으로 함께하고 싶은 이들은, 답사 자료로도 너무도 훌륭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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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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