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같은 삶, 인생같은 영화

삶
- 작성일
- 2016.6.4
마르셀의 여름
- 글쓴이
- 마르셀 뺘뇰 저/구석영 역
창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 장석주, '대추 한 알'
여름은 그런 계절이다. 땅을 다 구워버릴 듯한 뜨거운 햇볕, 다 쓸어내려가버릴 듯한 세찬 비, 이 모순을 뚫고 열매와 곡식이라는 결실을 잉태하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계절. 영화 <마르셀의 여름>은 초등학생 마르셀이 가족들과 함께 시골로 여름휴가를 떠나 보내는 한 계절 동안 벌어지는 일들과 사춘기 소년으로의 성숙을 잔잔하고 훈훈하게 그린 성장영화라고 할 수 있다. 배경은 1900년대 초로 당시 프랑스의 양육 방식, 교육 환경, 생활 양식 등을 일부나마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마침 마르셀의 아버지가 공립 초등학교 교사라 영화 초반에는 어린 아이들의 교육이라는 측면에 눈길이 많이 갔다. 당연히 컴퓨터도 각종 정보화 기기도 없이 선생님은 분필과 지시봉 하나, 학생들은 연필과 노트, 그리고 교과서 뿐. 하지만 아이들의 눈은 초롱초롱하고 선생님은 열정적이다.(1900년대임에도 학급당 인원수가 40명이 채 안되어 보이는 것이 인상적이다) 선생님의 태도와 아이들이 입고 있는 수도사 스타일의 검은색 교복을 통해 다소 권위적인 분위기가 엿보이기도 한다.
어머니는 외출할 일이 있을 때마다 마르셀을 아버지가 수업하는 교실에 맡겨놓고 가곤 했는데 그 덕분인지 이녀석은 고작 서너살 때부터 글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이런 아이가 등장하면 그 부모는 분명히 '우리 아이는 분명 천재인거야! 아무리 못해도 영재는 될거야! 내가 어떻게든 뒷바라지를 잘 해서 이 아이를 잘 나가는 아이로 키워야지!'라고 생각하겠지만, 놀랍게도 어머니는 마르셀로부터 책을 빼앗는다. 머리가 터질지도 모른다며 '애를 애답게 놔두라.'고 말하는 이 어머니의 패기. 대신 스스로 손발을 씻게 하고, 동생을 돌보게 하고, 어머니를 돕게 하는 등 생활 속에서의 배움을 우선시하는 이 어머니의 모습을 젊은 부모들이 함께 보고 이야기나누어 볼 만한 문제다.
어쨌든 이렇게 똘똘한 마르셀에게는 모르는 게 없고 매사에 당당한 아버지는 그야말로 위대한 사람이다. 하지만 무한정 대단한 줄 알았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이모부네 가족과 함께 시골에 있는 별장으로 여름 휴가를 떠나게 되면서 조금씩 무너진다. 이모부와 아버지가 사냥을 나가게 되는데, 이 아버지가 영 어리바리하다. 사냥감에 대해서도, 사냥의 방법에 대해서도 잘 모를 뿐더러 이모부에게 지기 싫어서 고물상에서 산 고물 엽총을 아버지께 물려받은 가보로 거짓말을 한다든지 하는 모습에서 아버지에 대한 실망이 점점 더 커져간다. 게다가 아버지를 돕기 위해 사냥에 따라가겠다고 떼를 쓰는 마르셀에게 이모부와 아버지는 (어른들이라면 으레 하는) 반드시 데려가겠다고 철썩같이 약속해 놓고 새벽에 둘만 몰래 출발해버린다. 하지만 이 고집센 녀석은 아버지의 승리를 위해 두 사람을 몰래 뒤따르고, 거기서 현지인 친구 릴리도 만나게 된다. 형편없이 이모부에게 끌려다니던 아버지는 결국 그 고장 최고의 사냥감인 황제 자고새 두 마리를 운좋게 잡게 되고, 멀리서 숨어 지켜보던 마르셀이 그 새를 번쩍 들어올리며 아버지의 승리를 증언함으로써 일생 최대의 추억을 완성한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아버지는 '죽은 여름을 관 안에 넣듯' 집으로 돌아갈 짐을 챙기고 여름 휴가를 끝낼 때가 왔다. 이 천국같은 곳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던 마르셀은 친구 릴리와 함께 이 시골 황무지 어느 동굴에서 은자처럼 살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편지로 남기고 몰래 탈출한다. 과감히 출발은 했지만 부모님의 꾸중과 황야에서의 불편한 생활에 덜컥 겁이 난 마르셀은 친구 릴리에게서 도망칠 핑계를 찾게 되고, 자신의 부모님이 자기에게 했던 것처럼 그럴 듯한 거짓말을 둘러대고 도망치고 만다.
시골서 도랑치고 가재잡고 곤충채집하고 산으로 들로 쏘다니는 즐거운 여름방학 이야기이지만, 그 속에 자신의 정서를 섬세히 살피고(물론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른의 눈으로 살피는 것이지만) 아버지의 완벽하지 않음을 확인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어른들의 모습을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적으나마 성숙, 아니 스스로도 어른이 되어가는 - 그것이 상황에 맞게 적절한 거짓말을 둘러대는 법, 사랑하는 것들과의 이별을 받아들이는 법 - 과정을 깨끗하고 순박하고 훈훈하게 그려낸 청정 성장영화. 보는 내내 순진하고 솔직한 가족들과 천진한 아이들의 모습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세파에 찌들었을 때, 먹구름 사이로 잠깐 내비치는 햇살처럼 자신의 유년시절을 추억하며 잠시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따뜻한 영화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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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