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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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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의 연락
글쓴이
유지혜 저
북노마드
평균
별점8 (2)
세은

 

 

 

 

 

 

 

그 날도 초과근무를 하며 사무실에서의 시간을 버텨내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합격 후 1년만에 사람이 바뀐 공시생'이라는 글을 봤다. 합격소식 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기쁜 감정을 담아 남겼던 글과 1년이 지난 후 '2년 넘게 공부하면서 너무나 바란 직업이었고 너무나 바란 꿈이었는데 이루어져서 너무나 행복했었는데 현실은 너무 달라서 인생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다.' 라고 남긴 온도 차가 확연한 글.

일을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난 내가 그동안 내내 하고있던 생각이었기 때문에, 저 씁쓸한 글에 아무 망설임 없이 공감을 했다. 

일을 시작하고, 내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 모든 걱정, 고민이 사라질 것만 같았던 어린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혹독한 사회생활에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 '멋진' 어른이 아니라 '시시한' 어른이. 그만두고 싶다고 많이 울고, 내 선택이 잘못된 거였을까 원망하며 울고, 그렇다고 다른 선택을 할 용기가 없어서 또 울고. 그렇게 현실에 타협해가고 내 입을 다물어가는 '시시한' 어른이. 이렇게 많은 울음을 내뱉어야 하는 것이 고작 '시시한'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니.

'도서관 사서'가 되어 몇 안되는 좋은 점 중 한가지는 일이 힘들 때 사무실 밖으로 나가면 바로 책이 가득한 서가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사서'가 아닌 '이용자'가 된 것처럼 서가를 가만가만 걷다보면 '그래도 좋아하는 공간에서 일할 수 있어 다행인건가.' 싶어져 마음이 풀어진다. 《나와의 연락》이라는 이 책도 그렇게 가만가만, 서가를 걷다가 발견한 책이었다. 몇 년 전 읽었던 같은 작가의 다른 여행 에세이가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나 바로 꺼내 빌려왔다. (이 점도 '도서관 사서'가 되어 좋은 점이다.)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친구한테 연락을 하며 말했다. '아, 출근하기 싫다. 출근하는 순간부터 나는 내가 아니다! 오늘도 잘 버텨내자!'  이 말에 깊은 공감을 하며 출근하기 전부터 퇴근만을 바라며 우린 그렇게 또 하루를 견뎠다. 이렇게 하루의 대부분을 '내가 아닌 채'로 살아가다보니 무엇을 해도 의미가 없었다. 나한테 좋은 옷을 사주는 것도, 맛있는 것을 먹으러 데려가주는 것도, 좋은 책을 읽게 해주고, 좋은 영화를 보게 해주고, 좋은 장소에 데려가 예쁜 것들을 보여주는 이러한 모든 일이 의미가 없어져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날들이었다. 

'이 시간을 견디느냐 못견디느냐의 차이야.' 라는 말로 옆에서 '내 딸은 견딜 수 있지?'하는 무언의 압박을 하는 부모님이 미우면서도 내가 괜히 엄살을 피우고 있는건가 의기소침해지는 날들. 

나와 동갑인 작가의 여행 에세이를 읽으며 신기하게도 나를 좋은 장소로 데려가주고 싶어졌다. 그랬다. 몇 년 전 읽었던 이 작가의 다른 에세이를 읽을때도 받았던 느낌이었다. '나'를 바라보게 되는 것, '나'를 중심으로 두고 싶어지는 것.

언제 어떤 나라에 있든, 어떤 장소에 있든 작가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자기 자신의 마음 속 이야기를 충분히 들으며 써내려간 글을 읽다보면 그 모든 장소와 시간이 작가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 신기하면서도 닮고 싶었다. 

책을 덮고 일을 시작하기 전 내 이야기를 많이 담아두었던 블로그의 글을 하나하나 천천히 읽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사소한 일들까지 정성스럽게 기록했던 사람이었구나, 나도 나를 중심에 둘 수 있었던 사람이구나, 나도 내 마음 속 이야기를 이렇게 잘 들어주던 사람이구나.

이 글을 시작으로 내 마음 속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내가 되어 다시 한 번 내 이야기를 하나하나 기록해가고 싶다.




보통날에 일어난 대화 몇 마디를 구별해서 라벨을 붙여놓는다. 가벼운 무게로 나를 급하게 스쳐갔지만 일기장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호사스러운 사건이 되었다. 
-p, 97


실제로 우리의 괜찮은 모습은 찍히지 않는다. 당황할 때, 슬플 때, 기쁠 때, 크고 작은 사건에 부딪힐 때…… 내 모습이 투영된 무언가 앞에 서 있지 않는다. 모두 삶의 현장에서 흘러갈 뿐이다. 우리는 아무런 노력 없이 삶의 자리에 머물면 된다. 그것만으로 유별나고 궁금한 여자가 된다. 어쩌면 타인이 바라보는 눈빛, 찍히는 시선보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응시하는 것이 일상을 영화로 만드는건지도 모른다. 제대로 '내'가 되는 것. 그것만이 주인공이 되는 길이다.
-p, 103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식사를 나눈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어본다. 그들이 채운 공간에는 배경음악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분위기를 타는 것은 여행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바쁜 일과의 전선을 잘라낸 날들은 이런 사치스러운 분위기에 맘껏 노출되어 있으라고 격려한다. 유혹에 지지 않을 이유는 없다.
-p, 124


맛있는 음식을 먹고, 푹 쉬는 여유를 가져도 마음 한구석 낌새가 이상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멍석 깔린 기념일에 쓰임새가 없는 사람이다. 흥겨움에 보탬이 되지도 못하고,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특별함이 강요되는 날은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숙제가 잔뜩 쌓인 기분이 된다. 숙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선물이 아니라 다음 날, 특별함을 씻어낸 개운한 아침이다. '그냥'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많은 날 중의 하나.
-p, 165


초등학교 일기에는 하필 시험기간 주번이었던 내가 있고
중학교 일기에는 짝사랑하는 남자아이가 몰라줬던 내가 있고
고등학교 일기에는 수학 성적이 외면했던 내가 있고
성인의 일기에는 가끔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내가 있다.
적힌 고민들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되던 때가 있었다.
골치 아픈 기억만이 영원할 것 같았던 때.

그때의 고민들은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우 간절했으나 이루고 났더니 별 것 아닌 일이 있고,
만만하게 여겼으나 무엇보다 눈부셨던 일이 있다.
인연인 줄 알았으나 금세 서먹해진 사람과
미운 첫인상과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호감 가는 사람이 있다.

내가 써놓은, 다소 허무맹랑한 일들은 대부분 이루어졌다.
누군가의 비웃음을 받기도 하고 스스로 조금씩 의심했던 일들.
아주 반짝거리는 형태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고민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 나이에 맞는 고민을 통해
알맞게 나이 들어가는 것이다.

나에게 꼭 맞는 형태로 조금씩 성장하면서,
돌아봤을 때 재미있는 굴곡들로 모든 시절을 기억하면서,
더 괜찮은 내가 되어가면서,
지금도 어떻게 이루어질지 모를 새로운 고민을 만들고 있다.
-p, 179


그날의 일기에 특별한 기록은 없지만 스스로 첫날을 지킨 것에 의미를 두었다. '정확하게 여행한다'는 말은 근거 없는 억지다. 수학 문제도 아니고 어떻게 '정확한 여행'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적어도 여행을 정확하게 출발하는 법은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혼자 시작'하는 것이다. 도시의 뉘앙스를 말없이 보고 느끼는 시간이 하루쯤 보장되어야 숨통이 트인다. 말의 왕래를 등지지 않는다면 지지 않는 낮과 카페 모서리 자리, 전시된 무명 아티스트의 그림이 건네는 말에 대답할 기회는 없다. 꿈꿔온 거리에 그런 푸대접을 할 수는 없다. 혼자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나서 할 일이라고는 기쁜 고함을 지르는 것이나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지는 일뿐이어도 고독하지 않다. 흡족한 혼자만의 시간으로 확실한 시작을 두드렸으니 후회 없이 편한 잠자리에 들었다.
-p, 263


택시 기본요금이 조금만 초과해도 벌벌거리고 커피 한 잔에 행복하던 그때가 그리워진다. 야단스럽게 돈을 아끼는 만큼 작은 것에 격하게 반응하던 날들. 여유가 있었다면 아무렇지 않을 소비에 사소한 이유가 붙었던 날들. '가끔'이어서 좋았던 것들 앞에 이제 '자주'라는 말이 붙었지만 비싼 가능성만 늘어났을 뿐, 다채로운 감정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지금의 여행은 아주 가끔 이렇게 변하곤 했다. 종종 감격은 한도 초과된 카드처럼 쓸모없어졌다. 좋은 장소에서 큰 몫을 지불하기 위해 마음을 내밀지만 소모된 억지만이 긁혔다. 더 큰 자극을 필요로 했다. 좋은 것을 봐도 허무함으로 답할 때도 있었다. 어쩌면 조금 더 넉넉해진 여행에 자꾸만 값비싼 구멍이 뚫리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자극을 탐하려 드는 것은, 익숙한 것을 보고 더이상 동요하지 않는 내 자신 때문이 아닐가?

여행이란, 애초에 정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횟수를 더할수록 조금씩 나아진다고 믿지만, 첫 여행이 얼마나 초라했느냐에 상관없이 늘 최고점이다. 매 순간에 매혹당하고, 이색적인 풍경에 좌지우지되고, 흥분에 모든 시간을 할애하는 처음의 순간. 우리는 순백의 도화지 같아서 모든 경험에 저항하지 않고 색칠을 당한다. 감정의 기류에 기꺼이 휩쓸린다. 매운탕 가격과 바닷모래에 발이 쑥 들어가는 느낌, 여인숙의 이불 무늬까지 때론 정확하게 기억한다. 때문에 첫 여행은 대체로 오래 기억에 남는다. 안타깝게도 처음이 주는 환희는 다시 살 수 없다. 젊음이 주는 기분 좋은 구차함도 마찬가지다.
-p, 335~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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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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