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날來

싱긋
- 작성일
- 2023.3.27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 글쓴이
- 정희진 저
교양인
내 안에 가진 이야기 주머니가 없다고 생각했었고, 내 얘기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었던 내가 지각변동을 겪은 듯 나불나불. 몸 고생은 했다 할 수 없지만 마음고생이 마디마다 썼는데도 꿀꺽 잘 삼키며 살아온 것 같다...(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같다며 자뻑 하려니 현실적인 엄마와 여동생이 스쳐 수정한다. 타고난 기질과 성향이 그나마 지켜준 인생이다. 묵묵히 고요히.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 5(현재 기준으로 최종) ‘새로운 언어를 위해 쓴다’가 어떤 이에게는 별 울림 없고, 더욱이 3장 ‘다른 것을 다르게 보기’도 탁상공론으로 들릴 수 있겠으나 나는 관통penetration을 당한 나머지 나를 모아 보는 값진 시간이었다.
살면서 만났다 헤어진 사람들이 많았다. 나를 지키기 위해 황급히 돌아서고 보낸 사람들이. 유물론적?으로는 함께 하지 못해도 그들의 말과 글이 내게 남아있다. 3장을 읽다가 90년대 목소리내기라고 했던 다른 말, ‘자기 언어’가 중요하게 싹튼 시기를 재확인하며 뭉클해졌다. 스무살, 방황하다가 나는 크리에이티브 라이터(뭔지도 몰랐으..)가 되겠다는 막연한 꿈을 가슴에 품었고 지금도 간직(만)하고 있다. 능동태 아니고 그냥 정해진 흐름을 따라.
이상적으로 들릴 수 있는데, 자기 언어는 현실 인식을 통해 변화를 추구하게 이끈다. 이 세 가지가 무한 반복 루프 같다고 할까. 자기 언어를 갈구하는 나이지만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는 아예 시도조차 안 했다.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그곳에 없을 거고 나를 봐달라고 애/떼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 하면 말하지 못한 고통을 꺼내 자기/사회적 검열과 침묵을 깨고, 정제된 언어로 형체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인생의 큰 축이었다.
이 책의 키워드는 융합融合이다. 융합을 유심히 살펴야 하는 이유는 세상에 “독자적이고 순수한 형태의 문화는 없기 때문이다.” 거창한 아포리즘을 투척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저자가 미국은 “다양한 사회가 아니다. <백인 문화>가 용광로를 운영한다. 백인들은 용광로melting pot에 들어가지 않는다(145)”고 말할 때 표현이 진심 부러웠다. ‘그렇지, 운영진이 기계의 일부가 될 일은 없지.’ 자기 언어는 봤다고 해서, 깨우쳤다고 해서 따라오는 부속품이 아니다. 언어는 가진 것 없고 특권층에 속하지 않는 아웃사이더가 연마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라고 생각한다.
글이 될 때, 아니 구체적으로 책의 형태일 때 그것은 아는 것을 전 꼬치처럼(冊 내가 미는 표현^^) 시각적으로 명료화한다. 그리고 글이 되었을 때 그것은 제약을 빗겨 뻗어나가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전체 맥락이라는 보호막을 갖추어 설을 더하거나 반박하려면 세심히 살펴야 한다. 상호 이해의 노력이 추가되는 매개라 말보다 관계가 두텁고 기대게 된다. 건축물이기에 나중에 수리나 개조나 리모델링이 구체적이고 큰 망에서 조화로울 수 있다.
어쩌다보니 3장 리뷰가 글 예찬으로 넘어가고 있다. 두더지 게임 속 두더지처럼 빼꼼 얼굴을 내밀 때마다 맞는데도 기꺼이 머리를 내주게 된다. “문제는 <어떤 가치를 위한 융합인가>이다... 안보 신화를 종식할 수 있는 논리, 무의미한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논리, 한국 현대사에서 ‘검사 집단’을 파악할 수 있는 논리... 이런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융합이다(146).” 융합은 뜬구름잡기나 말풍선 생각에 머무는 작업이 아니다. “주류 언어가 나의 삶을 삼켜버릴 때, 현실이 교착 상태에 빠져 공동체가 고통받을 때 새로운 말을 찾는 과정이 융합이다. 융합은 창의적 사고가 왜 필요한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146).”
인문학 공부를 하며 늘 달고 산 게 ‘왜? 도대체 왜?’ 라는 물음들이었다. 와이? 가 우중 우산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게다. 좋은 질문이 좋은 대답을 부른다(賢問賢答^^). 반복해온 정답지의 답안이 아니라 이전에 미처 감안하지 못했던 기류를 품는 출발점이 아마 질문하기 일 거다. 카프카가 말한 정신의 얼음을 깨는 도끼까지는 아니어도 균열이 가해지는 외부 충격의 순간이고, 만남이 얕지 않고 흔한 사이를 넘어선다.
나는 정 작가가 융합은 학문 간 대화의 필요성을 제기한다기보다는 ‘정치적 요구’라고 할 때 불끈 힘이 났다. 학문 간 소통도 정치(여러 이해관계를 조정)다. “횡단의 정치는 사고를 교차하거나 기존 의미의 문지방을 넘어 사회 변화trans/formation를 추구한다(147).” 적어도 나는 ‘아버지의 연장’이자 지배 언어의 식민성을 띠어 폭력의 도구가 되기도 하는 기존의 언어 틀에서, “하나의 마디”article에 대해 “또렷이 생각을 밝힘”articulate an idea으로써 절합한다고 할 때 하트 뿅뿅 반해버렸다.
인문학 종사자라면 한번쯤 해봤을 “왜 우리는 ‘인문학 강국’이 아닐까?(왜 노벨 문학상을 못 탈까)”라는 회의감에 젖은 질문에 “융합할 수 있는 사고방식과 언어가 부재한 사회(149)”라고 직언한다. “융합은 차이의 발생을 추적하고 분석하는 사유, 즉 <권력과 지식>(역학관계)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자연스러운 차이는 없기 때문이다(151).” 이 부분에서 나는 지식의 위계질서에 금이 가게하고 싶어 크리에이티브 라이팅에 줄곧 관심을 가져왔음을 깨닫는다. 차이는 필요나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개념인 것이다.
융합은 ‘완전 정복’형이 아니고 “생각하는 힘이자 다른 방식으로 고민하는 태도(152)”이다. 저자는 79억 개의 개별적 몸이 손쉽게 소통하고 대화하고 공감할 거라고 절~대 보지 않는다. 상호 이해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내다보는 냉철한 현실주의자이다. 연장선에서 ‘협력’도 원래의 지식의 상하구조를 견고히 하여 ‘약자 착취’에 허울 좋게 쓰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바람직한desirable 융합은 기득권이 고수해온 (집단)인식을 포기하게 하는 “가로지르기이며 앎의 변화다. 다른 입장에 대한 탐구력(155)”이다.
융합은 손이 많이 가는 피곤한 작업이다. 정상적이고 노멀하다고 간주되는 언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갱신되게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해야 한다. 일례로 한국인으로 구성된 가족에는 수식어가 없으나, 베트남 신부는 ‘다문화’, 미국 신랑은 ‘글로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이런 차이는 “인종주의, 남성 중심주의, 국가 간 위계를 복합적으로 드러낸다(157-158).” 소통전문가 김창옥 강사는 가족끼리 다른 나라 사람으로, 다른 언어를 쓴다고 생각하면 너그러울 수 있다고 설파한다. 마찬가지로, 정 작가도 ‘가족 내부’에도 다양한 문화의 공존과 충돌이 존재하며 “모든 가족은 다문화 가족”이라고 정의한다.
다음은 가족주의의 위험성을 자녀로까지 적용해 눈길을 끈다. “가족 구성원의 분업과 위계는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고 한의 문화를 낳는다. ‘한’과 울화는 예전 어머니들이 가진 사연이 아니다. 가족, 사회, 학교 제도의 <구조적 억압> 속에서 ‘한 맺힌 청소년’들이 얼마나 많은가(158).” (미안합니다ㅜㅜ) 다시 말해 범주 설정이 무엇을 중심적으로 인식하는지를 드러낸다. 다양성 혹은 보편성이라 하고선 ‘하나’를 중심으로 나머지를 배제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한국 사회는 ‘수저’ 논란 속에 부모의 재력이 자신의 능력으로 혼동되고, 기회와 조건의 불평등이 팽배하다. 정 작가는 다양성을 말할 때 그 여러 개끼리 평등하지 않음을 고려하고, 어설픈 관용이나 배려도 우월함의 표식일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권한다.
모든 지식이 저절로 진화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노력이 없으면 보수 이데올로기로 전락한다. 그래서 나는 보수의 반대말이 공부라고 생각한다. ‘진보’도 공부하지 않으면 보수적, 방어적이 된다... 내가 생각하는 <자기 분야>는 특정 학문이라기보다는 현실이 필요로 하는 정치적 입장, 새로운 가치관이다. (162-163)
위의 인용은 자기 분야가 어떻게 자기를 구성하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취하고 버리며 만들어진 것인지를 밝히는 ‘실천’이, 융합적 공부라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조국-박원순-윤미향을 하나의 진보 사태로 일반화하거나 패키지 처리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세 사건을 바라보는 저자의 모든 발언에 동의하진 않는다. 허나 “중산층 가족의 계급 재생산, 남성 세력 간의 갈등으로 변질된 여성에 대한 폭력, 여전한 일본관. 세 사건은 한국 사회를 파악하는 <새로운 지식 생산>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170).”
(긍정적인 파괴인 데리다 식의?) 해체destruction는 사라짐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을 낳는다. “건설적 사고는 파괴를 기반으로 하는 창의적 사유under construction”이고 “사회 변화는 지식의 재해석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해석은 기존의 의미를 해체함으로써 의미를 생산, 확대, 다양화하는 과정이다(171-172).” 그 결과 진짜 문제를 은폐하거나 차별을 대충 봉합하고 하나로 무리해 통합함을 피하고, 인식자의 개별 위치(성)를 살려 닫힌 의미를 교란할 수 있다.
이리 쓰다보면 말로는 뭔들 불가능할까 싶지만 현실은 ‘자기 나이’를 수용하는 것도 수월하지 않다. 노화가 이십대부터 시작되는 인간의 조건이자 생로병사가 자연의 이치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도 건망증도 여기저기 탈나는 신체도 싫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인데, 진보 기득권 세력인 386이 세대 갈등의 원흉인 것처럼 몰이하는 것도 앞으로 자제해야겠다. 사실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답정너는 폭력이니까.. 교육, 부동산. 건강, 노화를 구분해 말하지만 이들은 구조적으로 지배받는 ‘계급’의 문제임이 드러난다. 세대 갈등을 노년과 청년의 대립으로 떠들지만 기실 ‘계급’을 둘러싼 갈등 첨예로 읽는다.
나이 듦은 사람을 보수적으로 만들기 쉬울 뿐 아니라, 도리어 노욕이 생기고 성숙하지 못할 수 있으니 늘 깨어있으라 한다. 사담이지만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속 늙고 지친 가축들과 같은 에코 챔버 충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그리고 “청년층의 ‘취업’을 ‘시간대 최저 임금 논의로 변질시킨 정치인과 자본가들(177)”을 적대시하라고 말한다. ~는 ~때문이야, ~가 제일 문제야 라는 식의 깔때기 언설(‘환원주의’)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기존 개념에 의문을 품고, 차이와 경계의 기준을 재설정해 ‘지금, 여기’의 사안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은 언제나 움직이니까!
저자는 합하는 과정에서 분分별別이 필수적이고 구분區分이 ‘융합의 핵심’이라고 피력한다. 대표적인 예로 대선 때 김건희에 대한 벽화를 과도하게 비호하며 ‘검찰 문제’를 은폐한 정황을 언급한다. 김경진 전 의원은 윤 씨 부부의 “검찰의 부끄러운 역사”를, 엉뚱하게 마크롱과 존슨 내외와 나란히 두어 덮어버렸고, 현재는 조정훈이라는 시대전환 역적이 요상한 비호를 해댄다(거니 대변인인가!). “지식이 생산되지 않을 때 가장 이득을 보는 이들은 기득권층이고, 고통받는 이들은 새로운 현실에 대처할 수 없는 약자들(180)”임을 기억하고 힘내자 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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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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