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향기
  1. ○ 그니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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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글쓴이
권대웅 저
문학동네
평균
별점8.9 (9)
소라향기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여름의 눈사람들.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들.



 



가을밤 하늘에 보이지 않는 소 한 마리가



달을 끌고 간다.



- 시인의 말 中 -



 



 



 



[ 저녁이 젖은 눈망울 같다는 생각이 들 때 ]



 





눈은 앞을 바라보기도 하지만 뒤를 볼 수도 있다



침묵이 아직 오지 않은 말을 더 빛내듯



보지 않은 풍경을 살려낼 때가 있다



눈을 감았을 때



바보의 무구한 눈망울을 보았을 때



마음의 뒤란에 가꾸고 있는 것이 많을 때



뒤를 만지듯



얕은 것보다 깊은 것들을 살려내는 눈



 



황소의 젖은 눈처럼 저녁이 온다



꿈벅거리는 큰 눈 속으로 땅거미가 진다



땅속이 환해서 뿌리가 자란다



 



 





[ 땅거미가 질 무렵 ]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길을 걷다보면



풍경 속에 또 다른 풍경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언젠가 만난 것만 같은



어스름녘



젖은 하늘의 눈망울



물끄러미 등 뒤에 서서



기억나지 않는 어젯밤의 꿈과





까마득하게 잊었던 시간들



생각날 듯 달아나버리는 생의 비밀들이



그림자에 어른거리다 사라진다



잡히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



만져지지 않으며 살고 있는 것들이



불쑥불쑥 잘못 튀어나왔다가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시간



그 밝음과 어둠이 섞이는 삼투압 때문에



뼈가 쑤시는



땅거미가 질 무렵



 



[ 당신이 다시 오시는 밤 ]



                                      



누가 환생을 하는가보다



봄밤 달에서 떨어지는 꽃향기가



제삿날 피우는 향처럼 가득하다



목이 멘다



내가 알았던 생이었나보다



기우뚱 떠오르려다



사라지는 나뭇가지 위



달이 밀어내는 꽃봉오리가 뜨겁다



이 밤에 당신 무엇으로 오시는가



목이 꺾이도록 달을 바라보다가



저 달 속에 그만 풍덩 몸을 던져



당신이 오고 있는 길



그 생 쫓아 다시 오고 싶다



 





[ 설국(雪國) ]



                    



눈이 내린다



누군가 지상에 살며 저녁마다 켰던



등불이 내린다



어느 목련꽃 속을 지나왔을까



환하다



그 고요한 흰 미소 너머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설국



지붕마다 열 뼘 두께 눈이 쌓이고



며칠째 발이 묶인 주점 등불 아래



누군가 술을 마신다



맑은 술잔에 담긴 설원(雪原)속으로





기차가 달린다



멀어져가는 불빛 한 점



그리움으로 이어지는 밤의 긴 머리카락



하얗게 사랑해 하얗게



적멸이 되어 돌아오는 말과



꽃봉오리 속에 같혀 지샌



눈의 날들



너무 환해 기억이 나지 않아



밤에도 하얬다



 



 



[ 허공 속 풍경 ]



 

                                    



처마밑으로 제비들이 분주히 드나들던 집



허리둘레가 넓은 어머니처럼 든든해 보이던



장독 항아리들과 병정 같은 펌프



우뚝 서 있던 마당



툇마루에 모이던 햇빛이 담장을 넘어



지붕 위로 올라갈 때마다 할머니는 아깝다며



소쿠리에 말릴 나물들을 더 얹었다



햇빛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남은 생이 아까웠던 할머니



온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반지르르 닦아놓은 경대 위로



세월이 비껴가는 줄만 알았다





돌아보면 햇빛이 거두어가버린 집



어른거리는 골목 너머 장독대 너머



할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느 허공을 살다 간 것일까



제비들이 처마밑으로 몰고 오던



씨줄의 공간 날줄의 시간들이



잡히지 않는 풍경으로 남아 있는



저 허공 속



환영(幻影)이야



 



 



 



[ 삶을 문득이라 불렀다 ]



 



지나간 그 겨울을 우두커니라고 불렀다



견뎠던 모든 것을 멍하니라고 불렀다



희끗희끗 눈 발이 어린 망아지처럼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미움에도 연민이 있는 것일까



떠나가는 길 저쪽을 물끄러미라고 불렀다





 



사랑도 너무 추우면



아무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표백된 빨래처럼 하얗게 눈이 부시고



펄렁거리고 기우뚱거릴 뿐



비틀거리며 내려오는 봄 햇빛 한줌



 



나무에 피어나는 꽃을 문득이라 불렀다



그 곁을 지나가는 바람을 정처 없이라 불렀다



떠나가고 돌아오며 존재하는 것들을



홀연 흰 목련이 피고



화들짝 개나리들이 핀다



이 세상이 너무 오래되었나보다



당신이 기억나려다가 사라진다



 



언덕에서 중얼거리며 아지랑이가 걸어나온다



땅속에 잠든 그 누군가 읽는 사연인가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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