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전쯤 리뷰를 쓴 <자니 기타>와 같은 연도에 제작되었는데도 색감이나 스케일, 주제의식 면에서 공히, 근 십 년 뒤에나 만들어진 것만 같다. 이 감독 스타일이 현대적이어서도 있겠고, 그 <자니 기타>가 너무 구식으로 끌고 간 이유도 있을 것이다. 화질은 이 작품이 근년 들어 리마스터링을 거쳤기에 이런 멋진 태깔을 자랑하는 거겠고.
배경은 얼래스카, 캐나다의 유콘(등장 인물 중에도 이런 이름이 하나 있다) 등이지만 실제로는 그보다는 밑으로 많이 내려와 캐나다의 앨버타에서 찍혔다. 누구 눈에도 현지 로케의 매력이 물씬 다가올 만큼 독특한 풍광이 잘 담겼고, 이런 오지에 먼저 기반을 닦고 사람이 살아갈 만한 터전을 마련하는 이들이란, 개척 정신 강하고('이봐, 이런데서 살아남으려면 빵도 잘 구워야 하고, 커피도 내릴 줄 알아야 하고, 못하는게 없어야 해!'), 정직한 노동의 대가를 아는 이들이며, 무엇보다 자신처럼 정직하게 일해서 얻은 '빵'의 가치를 공유하는 이웃들의 소중함을 이해하는 이들이다. 애초에 척박한 자연 조건만 갖춘 고장이라면 이들의 이런 고된(그러나 평화롭고 우애로운) 삶을 방해할 못된 사달이 안 생길 텐데, 어쩌다 금맥이라도 발견되면 그때부터는 대처에서 온갖 못된 말종들이 유입되어 질서와 도덕을 위협하기 마련이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누구나 다 알듯 반듯하고 정의로운 캐릭터만 주로 맡아 소화한, 왕년의 대배우이다. 이 <머나먼 대지>를 다 보고 나서 바로 존 웨인 주연, 연출의 <알라모>를 연이어 감상했는데(솔직히 말하면 좀 피곤했던 데다 이게 또 얼마나 긴 영화인가. 나중에 산타아나 장군이 쳐들어오는 장면부터 잤음), 그 존 웨인하고 이분은 비슷한 또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훨씬 어린 여배우들하고만 엮이는 게 이들 대스타들의 특권 아닌 특권이겠고. 여튼 여기서는 오랜 기믹과는 달리, 뺀질뺀질하고 염세적이며 소속 없이 떠돌고 누구에게나 비협조적인, 거의 무법자에 가까운 성격을 연기한다는 점이 관객들에게 의외로 다가온다. 그 역을 잘 소화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워낙 대배우이고 한 인간으로서도 존경스러웠던 그의 퍼포먼스이기에 그러려니, 혹 내가 못 보고 지나친 무엇이 있을 수 있으니 평가에 신중해지고 싶을 뿐이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연기에 동의를 하건 말건 영화는 볼거리가 많이 마련되었는데 앞에서 말했던 대로 캐나다와 미국 북부의 이국적인 풍광이다. 교역이란 특정 지방에서 많이 나는 물산이 다른 지역에서는 현저히 부족할 수 있기에 발생하는 경제 활동이며, '중간에서 떼어먹는다'는 부정적 인식과는 달리, 이 수요와 공급, 결여와 풍요를 연결해 주는 기능 자체가 부가가치의 큰 부분을 차지하기에, 갖은 애로와 위험을 무릅쓰고 다리를 놓는 이들 중개자들의 역할은 결코 폄하할 게 아니다. 서부극에서 지겹도록 등장하는 '카우보이'들의 미션은 결코 영화 속에서처럼 손쉽게 이뤄졌던 성격이 아니다.
제임스 스튜어트가 연기한 주인공 '제프'는 친구(라기엔 나이가 좀 많아 보이는... 영어에서 '친구' 개념은 나이 기준이 아니긴 한데, 월터 브레넌은 실제로도 스튜어트와 세대 자체가 다르다) 벤과 함께 대형 연락선에 올라타는데, 곧이어 떼를 지은 사람들과 사법 공권력 집행자처럼 보이는 이가 항구에 다가와 '살인자가 타고 있으니 당장 배를 도로 대시오!'라며 주인공들의 기분 좋은 출항을 위협한다. 영화 초장에 순조로이 첫걸음을 떼려는 플롯의 여행까지를 대유적으로 방해하려 보이는 이 책동에서, 관객을 불안하게 하는 건 그 고발의 죄목이다.
'제임스 스튜어트가 맡은 배역이 범죄자일 리는 없잖은가? 아니라면, 저 많은 인파가 입을 모아 외치는 혐의는 무엇인가?'
제프(스튜어트 扮)의 거동을 이어 관찰하면 마냥 떳떳한 입장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이 곤경을 어떻게 모면할(=감독은 이야기를 대체 어떻게 이어갈) 요량일까?
수수께끼 같은 건 그뿐이 아니다. 시애틀에서 출발하여 새로 당도한 스캐그웨이(얼래스카 소재의 한 벽촌)에는, 깡패인지 치안 담당자인지 법관인지 모를 한 남자가 실권을 장악한 판인데, 이 제프가 마음에 들었는지(지하고 비슷한 영혼의 빛깔을 바로 알아봄), 사형 기소 쪽으로 몰고갔다가 곧바로 무죄판결을 내리(검사와 판사를 한몸에 겸함ㅋ)는가 하면, 애써 몰고온 소떼는 바로 몰수하는 처분을 내리기도 한다. 강도의 본색이 드러나는 장면인데, 이 대목에서 관객은 '시애틀에서 여기까지 따라온 집행관을 떼어내 준 게 어디며, 스캐그웨이 현지에서 끼친 민폐도 작다고 못하는데 한 발 물러서면 안될까' 싶기도 하지만, 현재 그에게는 가진 소떼가 전부이다. 뿐 아니라, 제프는 본디 포기를 모르는 인간이며, 다만 섣부른 만용으로 남 일에 끼기를 주저할 뿐이다(바꿔 말해, 이제 지 일이다 싶으면 사생결단을 하는 거임).
'당신은 누굴 좋아하나요?'
'...'
'없죠?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다 당신을 싫어하는 거에요.'
이 말은 사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저 위에 잠시 적은 대로, 그는 이곳 스캐그웨이야 초행길이지만, 여태 숱한 오지와 적대지역을 거쳐 오며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역경을 이겨 온 인생이다. 누구의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았으니, 그가 타인과의 연대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다. 이런 인물은 주위에서 극히 드물게 보겠으나, 이런 인물을 여성들이 매력적으로 보는 게 또한 당연하다.
제프는 극중에서 두 명의 여인을 만난다. 한 사람은 살롱 여주인(금광이 발견되는 어느 도시라도 찾아가 막강한 자본력으로 호화 술집을 마련, 경영한 후 지역 경제의 단물을 다 빼먹고 사라지는 여성) 론다이며(제프의 목숨을 한 번 구해준다), 다른 여인은 나이로는 그녀의 조카뻘쯤 되는(배우 실물로는 두 분이 비슷한 또래), 의사 선생의 따님인 왈가닥 리니 밸론이다. 그 부친은 영화 초반에는 비중이 클 듯 등장하다가 이후엔 안 보인다. 저렇게 어린 딸을 오지에 방치하고 대서양 건너로 떠난 걸 보면 어지간히 무정한 위인인가 보다. 나이 차도 많이 나는 제프를 저처럼 따르는 리니의 태도가 기이하기도 하고, 그만큼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겠거니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오지에서 언제나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건 바로 '자립 능력'이겠으니 말이다.
평화롭게 여러 세력의 타협 속에 마무리될 듯 보였던 극은, 앞서 말한 실력자 개넌이 느닷 이곳 캐나다 도슨까지 밀고들어오면서 급격히 파란을 맞는다. 금광 발견자는 명패 등(우리식으로 따지면 삼림에 대고 하는 명인방법?ㅋ)을 게시하여 소유권을 공시하는데, 이걸 개넌 패거리들이 멋대로 바꿔치며 중앙 정부(캐나다)의 승인을 가로채려 들고, 하는 짓을 보면 강도가 따로없다. 무고한 인명이 여럿 희생되나 제프는 전에 개넌에게 빚진 것도 있고, 남의 일에 끼기를 꺼리는 편이라 명백한 불의를 외면한다. 제 챙길 걸 챙겨 도슨 타운을 떠나려 드나, 힘 좀 쓰고 총 좀 쏜다 싶은 이만 보면 서열을 매기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 불량배 매든이 그를 가만 둘 리 없다.
(스포일러)
혹 론다의 운명에 대해 지나치지 않냐는 반응이 있을 수 있는데, 그녀 역시 명시적인 극의 진행 속에서만 주인공 제프에 동조적이었을 뿐, 보이지 않는 대목에서 많은 악행을 저질렀으므로 응보를 받았다고 해석해야 타당하다. 그보다는, 여성이 두 명이면 주인공이 골치 아픈 선택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떠돌이 생활보단 정착과 안정이 필요한 제프에게, 더 필요한 배우자감인 리니가 마음 놓고 그 품에 안기려면 방해물(...)은 어떤 식으로건 치워져야. 메인 빌런인 개넌이 끝까지 분명한 스탠스를 안 밝히다 막판에 확 악의 개성을 폭발시키듯 드러내는 구성도 앤서니 만 감독만의 사려 깊은 솜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