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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2.5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 글쓴이
- 김종관 외 8명
유선사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내 얘긴가 싶어 집어 들었다.
모든 이에겐 표현의 자유가 있다지만 마음껏 표현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도 자유는 있으되 능력을 부여받지는 못한 다수 중 하나다. 그러다 보니 음악이든, 미술이든, 연기든 표현할 수 있는 재능과 기회를 받은 이들이 부러웠다. 그 중 제일 부러운 건 글로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들. 작가다.
쓸 기회가 많아진 만큼 근래에는 작가도 많아졌다.
전고운, 이석원, 이다혜, 이랑, 박정민, 김종관, 백세희, 한은형, 임대형.
이 책을 쓴 작가들이다.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기자, 배우, 소설가로 활동하는 분들인데, 영화랑 친하지 않고 국내소설도 잘 안 읽는 (무식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나는 박정민 배우나 백세희 작가 외에는 이름도 낯설다. 아무려면 어떠한가. 이 책으로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 다른 데서 이름을 보면 속으로 ‘구면이구나.’ 할 것이다. 여전히 무식하면서.
글쓰기가 업(業)인 사람들.
프로작가가 된 과정을 보니 등 떠밀려 된 사람은 없고 수년간의 노력 끝에 책도 내고 유명세도 얻은 분들이다. 꿈을 이룬 거다. 꿈이 뭔지도 모르고 어영부영 살다가 개학이 사흘 쯤 남은 초등학생처럼 초조해진 내게 이미 꿈을 이룬 자들의 이야기는 투정도 부럽다. 그래도 막상 밥벌이가 되면 힘든 건 오십보 백보인가보다.
아홉 명의 작가 중 ‘작가라서 행복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는 걸 보면.
...설 연휴의 아침 8시 반에 카트 손잡이 하나하나를 닦고 있는 저 사람만큼은 절대적인 사실이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멀리서 카트를 닦고 있는 그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가슴이 아팠다. 마치 오래도록 못 본 사람을 우연히 먼저 발견한 것처럼 가슴 중앙이 아려왔다. 연휴에 아무도 관심 없을 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저 사람을 나만 보고 있다는 것이 쓸쓸해졌다.
(p.44)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전고운 님의 글 중에 나오는 대목이다. 써야하지만 글감이 없어서 음악도 듣고, 간식도 먹고, 책도 읽고... 그래도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 회의를 하고, 밤을 새고.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그득해서 ‘오늘은 무엇을 뽑아 쓸까?’고민할 것 같은 작가의 글쓰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재능이야 당연히 있지만 아무리 도구를 근사하게 갖춘 요리 명장이라도 재료가 있어야 한정식이든 라면이든 끓일게 아닌가.
소재 부족으로 힘들어하는 건 다들 마찬가지지만 작가를 작가이게 만드는 건 재료를 볼 줄 아는 안목이다. 일반인에겐 그저 돌멩이가 고고학자의 눈으로는 석기 시대 돌도끼로 보이듯 보통 사람의 눈에 공기처럼 흘러가는 카트 닦는 사람이 작가에겐 생생한 글감으로 포착된다.
전고운. <소공녀>와 <페르소나>라는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고 한다. 둘 다 안본 영화지만 갑자기 호기심이 생긴다. 카트 손잡이 닦는 모습을 이토록 애잔하게 바라보는 감독이 만든 영화는 어떨지.
오늘 이것만 다 하고 나면 쓸 수 있겠지, 내일 저것만 하면 그댄 진짜 쓸 수 있겠지.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글을 쓰는 것인데, 그게 가장 중요하고 급한데, 오직 그 하나를 제외한 다른 일들만 눈에 들어온다.
(p.68~69)
이석원. 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전 리더이자, 문학인이다. 음악계와 문학계에서 모두 베스트셀러를 남긴 능력자. (나무위키 인용)
작가 이름이 낯설어 검색해보니 팔방미인 재주꾼이다.
작가 소개로는 범접할 수 없는 인물이지만 그가 쓴 글은 낯설지 않다. 글만 쓰고 싶어서 음악도 그만 두고 작가가 되었지만 밥벌이가 되는 순간 글쓰기는 가장 하기 싫은 일이 되었단다.
학창시절 시험기간이 되면 시험과 관련 없는 모든 것들이 하고 싶었다. 책상 정리도 해야할 것 같고, 소설책도 보고 싶고. 나중에는 같은 교과서라도 시험범위 아닌 곳이 더 재밌어보였다. 학교 밖의 인생은 좀 다를까 했는데 지금도 여전하다. 직장에 제출할 서류가 있거나 필수 교육이 있다면 얼마나 도망치고 싶은지. ‘맞아, 맞아.’계속 맞장구치면서 내가 쓴 글처럼 읽었다.
그토록 쓰기 싫어하는 사람이 또 있다.
배우이자 에세이 작가인 박정민.
그는 방 좀 치우라는 엄마 말에 요 핑계 조 핑계 대는 아이처럼 아예 ‘쓰고 싶지 않은 서른두 가지 이유’를 나열한다. 주섬주섬 둘러대는 변명들을 듣다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는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고 싶은’ 한 가지 이유를 댄다.
“하지 마, 공부하지 마. 공부하기만 해. 아주 공부만 했다 봐.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p.140)
그의 어머니는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고, 청개구리 아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우등생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자신의 글을 보고 싶으면 이렇게 말해달라고 독자들에게 부탁한다.
“너 쓰지 마. 쓰기만 해. 아주 쓰기만 했다 봐.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p.141)
예예, 박정민님. 글 쓰시면 안 됩니다. 제발 글 좀 쓰지 말라구요. 쓰기만 해봐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다는 백세희 작가의 푸념도 만만치 않다.
쓰고 싶지 않다. 쓰고 싶지 않다. 쓰고 싶지 않다... 하며 두 페이지 이상을 깜지로 만들었다. 시작 전 ※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가도 무방함 이라고 친절히 설명해줬지만 ‘넘어가도 무방한 부분을 왜 쓴 거야?’ 하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그래도 컨트롤 씨와 컨트롤 브이를 쓰지 않고 한 글자 한 글자 최선을 다해 쳤단다.
쓰기 싫어 죽겠다지만 읽기만 하는 나는, 그냥 다 재미있다. 더구나 ‘윌리를 찾아라’처럼 깜지 속에 진심을 숨겨놓았다니 그렇게 정성스런 글을 어찌 그냥 넘길 수 있겠는가.
아홉 명의 작가 중 ‘쓰고 싶어서 쓴다. 쓰는 게 즐겁다’는 사람은 하나도 안 보인다. 누가 더 쓰기 싫은지, 누가 더 쓰기 어려워하는지 경쟁하는 것 같다. 그래도 쓰기 싫다는 투덜거림조차 근사한 에세이가 되니 역시 프로는 프로다.
그런데 어쩌다 이런 책을 엮자고 기획을 한 걸까? 화려한 무대 뒤 대기실의 민낯을 보여줄 생각을 어떻게 한 건지. 아이디어만으로도 재미는 보장이 아닌가.
이 책은 기획이 다 했다.
잘 나가는 작가들의 글 뒤에 숟가락 얹어 열 번째 꼭지를 쓰는 마음으로 리뷰를 쓰고 있다. 유일하게 ‘쓰고 싶지 않다’고 몸부림치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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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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