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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글쓴이
유시민 저
돌베개
평균
별점8.4 (553)
오후기록

몇 해 전 어느 tv예능 프로그램에서 유시민 작가를 비롯해 각 분야의 몇몇 전문가들이 이탈리아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로마를 방문하고 소회를 말하는 시간에 건축과 교수님이 인상적인 장소로 판테온을 언급했다. 그분이 지붕이 뚫린 건물에 비가 새지 않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하자 작가는 나는 만신전을 생각했는데...’하며 말끝을 흐렸다.



같은 사물을 바라보는 문이과의 차이가 무엇인지 한눈에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시청자인 나도 사물을 대할 때는 다양한 관점이 필요하구나 하고 생각했으니 여러 과학자들과 프로그램을 같이하며 토론하는 작가는 더욱 과학 공부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얼치기 독자인 나도 가끔 과학책을 읽는다. 물리, 화학책은 너무 어려울 것 같아 손이 잘 안가고 그나마 수식이 적게 보이는 생물학 교양서를 잡지만 그것도 앞부분 정도나 읽을 만하지 반이 넘어가면 거의 외계어로 보인다.



과학책을 쓸 정도로 타고난 이과천재들은 평범한 문과인의 비애를 모른다. 쉽다고 해봐야 내 기준의 쉬움이 아니고, 재밌다며 신나게 설명하지만 외국 코미디 프로를 보는 듯 맹숭맹숭하다. 내 돈 들여 산 책을, 내 시간 들여 읽으며 느끼는 소외감이라니.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가 나왔다는 소식에 반가우면서도 역시 유시민이구나 싶었다. 잘하는 거, 잘 아는 거만 써도 베스트셀러일 텐데 굳이 모르는 분야까지 새로 배워가며 책을 쓰다니. 지식소매상을 자처할 정도로 지적으로 탁월한 분이니 안 될 거야 없겠지만 생물학이든, 물리학이든 그 분야의 전문가가 즐비한 마당에 과학을 주제로 책을 쓴다는 게 무척 부담스러웠을 텐데 말이다. 책 속에서는 입버릇처럼 늙어가는 중이라고 강조하지만 열정은 여전히 젊은이 못지않다.



 



과학을 전혀 몰랐을 때 나는 세계를 일부밖에 보지 못했다. 타인은 물론이고 나 자신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전체를 보지는 못하며 인간을 다 이해하는 것 역시 아니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많은 것을 더 다양한 관점에서 살핀다.



(p.39)



 



이 책은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과학적 연구 성과와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인문학의 편협함을 지적하며 두 학문의 통섭을 강조한다. 저자는 그간 인문학과 분리되었다고 여겨지던 생물학, 화학, 물리학의 세계가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방법을 보여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물질의 차원에서 보자면 인간은 우주의 다른 물질과 원소의 구성성분이 동일하다는 것. 인간 또한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DNA가 네 종류의 염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인문학자는 인간의 행동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인간은 군집을 이루고 살면서 사회적 기술적 분업을 한다. 다른 생물 개체가 그렇듯 사람도 이기적 또는 자기중심적이다. 자신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본성을 지녔다. 그런데 인간은 이타 행동도 한다. 남을 위해 또는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낮추는 행위를 한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이타 행동은 생물학적 유전자를 공유한 가족 구성원 사이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강력한 형태로 나타난다.



(p.84)



 



지금까지 인문학자들은 상호 의존, 접촉의 밀도와 빈도, 공동의 경험과 공유된 기억 등의 이론으로 친족 이타주의를 설명해왔다. 저자는 여기에 이기적 유전자 이론을 도입한다. 유전자를 많이 공유하는 개체의 생존확률을 높이는 것이 동일한 유전자를 남기는데 도움이 되므로 가족 간에 이타적인 행동이 나타나고 이어 가까운 친족과 먼 친척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생물학과 인문학. 분야는 다르지만 두 이론은 모두 친족 이타주의를 설명하는 합리적인 방법이다. 서로 배척하지 않고 결합한다면 친족이타주의가 생기는 이유는 더 확실해지며 혈연에 근거를 둔 비합리적 연고주의와 부정부패가 왜 없어지지 않는지도 알 수 있다.



 



다윈주의자인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인간의 본성을 잘못 본 데 근본 원인이 있다고 본다. 사회제도는 변하기 어려운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과 충돌하면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사유재산을 폐지한 게 대표적이다. 그게 도덕적으로 나쁜 정책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도덕적 평가와 무관하게 사유재산 제도를 폐지한 사회체제는 장기 존속할 수 없다는 말이다.



(p.136)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진화생물학의 관점을 적용하여 설명한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 경쟁하는 보편적인 생물학적 본성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부정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성이 사회적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고 믿었기에 공산주의자는 오직 인민을 위해 봉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실제 공산주의자들은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짓밟으면서 권력을 독점했다. 인간 본성의 생물학적 속성을 외면한 결과였다.



 



높은 수준의 질서를 이룬 것은 그 무엇도 저절로 또는 우연히 생길 수 없다.



...



원숭이가 아무리 키보드 위를 뛰어다녀도 베스트셀러 소설이 나오지는 않는다. 큰 자루에 부품을 넣고 흔드는 방식으로는 자동차를 조립하지 못한다.



...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그런 것을 가리켜 법칙이라고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그걸 안다고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엔트로피 법칙을 안다고 해서 크게 좋을 건 없다. 하지만 모르는 것보다는 분명 낫다. 특정한 종류의 오류와 불행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내게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거부할 수 없는 것은 순순히 받아들이라고 조언했다. 그 충고를 받아들이면 열정을 헛되이 소모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



(p.250)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 법칙.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점점 더 무질서해져서 언젠가는 어떤 질서도 남지 않게 된다. 당연한 말을 하는데 열역학 제2법칙이니, 엔트로피 법칙이니 하는 어려운 용어를 쓴다. 엔트로피 법칙은 우리 인생에 어떤 쓸모가 있을까?



저자는 엔트로피 법칙을 제대로 이해하면 열정을 헛되이 소모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뜨거운 커피는 식어가고, 아무리 청소를 해도 집은 어질러지고, 죽도록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이 있다. 마음 상하는 일이지만 화낼 필요가 없다. 엔트로피 법칙을 알면 재산을 지키는 데도 도움이 된다. 적은 노력으로 떼돈을 벌 수 있다고 유혹하는 사기꾼들의 말은 모두 엔트로피의 법칙에 어긋나니까.



 



저자는 이 책이 과학교양서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문과 언어로 잘 풀이된 과학이야기만 읽어도 상식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이 많다. 게다가 뇌 속의 거울신경세포로 맹자의 측은지심을 증명하는 등, 과학과 인문학을 자연스럽게 콜라보하는 저자의 역량을 보면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수학이 어려워서 문과가 되었다고 겸손해하지만 저자라면 분명 이과 남자가 되었어도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일반인의 언어로 과학을 이야기하는 저자가 운명적 문과라서 정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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