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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11.22
클라라와 태양
- 글쓴이
- 가즈오 이시구로 저
민음사
<남아 있는 나날>과 <나를 보내지 마>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나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입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에이에프(AF) 클라라입니다. 친구가 되도록 설계된 로봇이지요. 학교 대신 인공지능으로 가정학습을 하는 시대라 친구가 필요한 아이들은 에이에프를 입양합니다. 물론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만 누리는 혜택이지요. 클라라는 아직 입양 전이예요. 다른 로봇들과 함께 매장에 진열되어 선택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펫샵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나 고양이들처럼 말이죠. 다른 에이에프에 비해 학습력과 통찰력이 뛰어난 그녀는 창밖의 풍경이나 매장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어느 날 그녀는 희귀병을 앓는 소녀 조시의 집으로 입양됩니다. 조시는 ‘향상’이라는 유전자 편집 부작용으로 투병중입니다. 그녀의 언니 샐이 ‘향상’의 부작용으로 사망했지만 경쟁력있는 아이를 원하는 어머니의 욕심으로 조시도 시술을 받게 된 거죠.
조시의 집에서 살게 된 클라라는 좋은 친구가 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어디가 아픈지, 기분이 어떤지, 피곤하진 않은지. 그림자처럼 조시를 돌봐줍니다.
한편 조시의 어머니는 클라라에게 특별한 제안을 합니다. 큰딸의 죽음이 너무 괴로웠던 어머니는 조시마저 잃는 슬픔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초상화를 핑계로 겉모습이 조시와 똑같은 복제품을 만들어 그 안에 딸의 성격과 습관, 말투까지 그대로 흉내내는 클라라의 소프트웨어를 넣으려합니다. 조시의 대체품을 만들려는 거죠. 클라라는 거부할 수가 없어요. 인간의 명령에 거부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로봇이니까요. 그녀는 어머니를 이해하면서도 조시가 회복될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조시의 병은 점점 깊어갑니다. 클라라는 그래도 친구를 포기하지 않아요. 정성껏 간호하고, 기도하고. 조시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몸에 무리가 가는 행동도 서슴없이 감당합니다. 그래도 조시의 병은 차도를 보이지 않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태양에게 기대를 겁니다. 태양에게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는 클라라. 그녀는 조시를 어느 외딴 집으로 데려가 강한 햇볕을 쬐게 합니다.
그날 이후 조시가 서서히 회복됩니다.
친구의 회복을 누구보다 바라던 클라라였지만 친구가 건강하고 행복해질수록 그녀의 자리는 사라져갑니다. 조시는 더 이상 클라라를 찾지 않고 어머니 또한 쓸모를 다한 그녀와 눈도 마주치려하지 않지요.
시간이 흘러 모두의 소원대로 건강해진 조시가 좋은 대학에 합격해서 집을 떠나고, 클라라는 어느 쓰레기장에 버려집니다. 그래도 그녀는 슬퍼하지 않아요. 그게 자신의 본분이니까요. 그녀는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매니저에게 조시와 함께 해서 기뻤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클라라와 태양>은 인공지능이 발달하고 유전자조작으로 우월한 인간을 만드는 미래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은 설정일 뿐,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차례가 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다들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걸 중요하게 생각한 또 다른 이유는, 그 자리에 서는 것이 우리 매장을 대표하는 ‘특별한 영예’를 누리는 일이라고 매니저가 말했기 때문이지도 했다. 게다가, 물론 매니저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쇼윈도에 있을 때 선택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도 알았다.
(p.18)
그런데 계속 창밖을 관찰하다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다. 에이에프들이 부끄러워하는게 아니라 걱정하는 거라고. 우리가 새 모델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이제 자기 에이에프를 처분하고 우리 같은 신형으로 교체할 때가 됐다고 생각할까봐 걱정하는 거였다.
(p.31)
“고객이 에이에프를 선택하는 거지, 절대 그 반대가 아니야.”
(p.56)
첨단 기능을 탑재하고 손님의 선택을 받으려 자리다툼을 하는 로봇, 선택은 고객의 몫이지 에이에프의 권리가 아니라는 규칙, 이미 주인을 만났지만 새 모델로 교체될까봐 두려워하는 구형 에이에프들. 미래의 세상에서 에이에프들이 겪는 고충이 현재의 우리 모습과 오버랩 됩니다.
기업이 원하는 스펙을 쌓느라고 수년씩 공부하는 취준생. 힘들게 취업해도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직장인. 현실의 진짜 사람들이 받는 대접도 에이에프와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생각에 씁쓸해집니다.
“이론적인 가능성이지. 애틀러스 브루킹스에서는 엄청나게 대단한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2퍼센트도 안 돼. 그게 전부라고. 입학생 전체에서 향상 안 된 학생은 2퍼센트 미만이야.”
(p.195)
“내가 대학에 가서 향상된 애들하고 경쟁한다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었어. 지금은 나도 나름의 계획이 있고 그게 최선이야.”
(p.421)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태아 때부터 계급에 따라 구분되어 양육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멋진 신세계’. 유전자 조작 유무로 계급이 달라지는 <클라라와 태양>속 세상. 기술 발전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지만 그 혜택이 고루 돌아가지 못한다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진다는 경고로 여겨집니다.
<남아 있는 나날>의 집사, <나를 보내지 마>의 클론, <클라라와 태양>의 에이에프.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극히 총명하고 선량하지만 주체성이 없지요. 때문에 스스로는 당당하고 만족스럽다고 말해도 자기위안이나 정신승리로 보입니다. 그래도 전작에서는 약간의 각성이 보이기도 하지만 클라라는 과하게 이타적입니다. 소마라는 약으로 감정까지 통제 당하는 ‘멋진 신세계’의 사람들처럼 클라라도 행복한 생각만 하도록 설계된 걸까요? 차라리 슬퍼하거나 분노했다면 덜 마음 아팠을 텐데 말이죠.
인간보다 더 인간다웠던 친구, 클라라의 마지막 이야기를 소개하며 리뷰를 마무리합니다.
중간쯤 갔을 때 매니저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나는 매니저가 마지막으로 나를 쳐다보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매니저는 저 먼 곳, 지평선 근처 건설용 크레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가던 길을 갔다.
(p.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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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