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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09.12.25
시차의 눈을 달랜다
- 글쓴이
- 김경주 저
민음사
내 현기증이 조금 잘 팔리는 이유
(김경주, 『시차의 눈을 달랜다』를 읽고)
고품격의 언어로써 김경주의 시를 논하지 말자. 또한 그의 시를 가지고 평하지도 말자. 다만 한번은 쓰다듬고 한번은 쓸려(p.46)가며 딱 두 번 시집을 통해 눈만 달래(p.57)보자. 늘 양말이 다 마르기 전에 떠난 구름의 일부처럼(p.42). 그것이 떠난 빈자리에서 내 눈의 쓸쓸한 유례(p.43)를 찾아보자. 내가 맨 처음 보았던 것. 그리고 마지막에 보았던 것은 그냥 그 자리에 두자. 우리의 목적은 처음과 끝이 아닌 눈꺼풀이 아스라이 감겼다 떠지는 찰나 이므로. 견고한 사물을 쫓지 말고, 미세하게 떨리는, 그리고 마침내 한 획(畫)(p.36)의 총체성이라는 것을 느껴보자. 눈은 바람을 목격(p.67)할 것이다. 억만 겁의 시간 속에 유일무이 살아 남은 생명체. 그것은 리듬을 갖고 나머지는 표음이 되는 허구(p.67)가 되는 언어를 가르쳐 줄 것이다. 언어는 공간 속에 고착화 되어 있으며, 시간은 순간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공간 속에 순간이 흐르는 연속성에 있다. 이제 그 연속성이 아닌 순간을 가지고 시인은 '시차' 라고 말한다.
유년은 조금씩 몽상의 내부를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체를 형성한다. 어느 누구의 유년이나 몇 대의 종이 비행기를 제작했던 기억과 그중 몇 대인가는 실종했던 기억이 존재한다. 도대체 그 많던 아이들의 종이비행기는 어디로 날아간 것일까? 어디로 추락해서 어디로 잔재가 흘러간 것일까? 글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이 종이비행기릐 실족에 대해 내린 결론은 글을 완전히 잊을 때까지 바뀌곤 한다. (종이로 만든 시차 中, p97)
실종이냐, 실족이냐를 두고 다툴 필요도 없다. 이것은 기억 되는 것임과 동시에 내밀한 몽상이다. 상자 속에는 잊지 못할 물건들이, 우리들에게 잊지 못할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우리들의 보물을 줄 사람들에게도 잊지 못할 그런 물건들이 있다. 그 속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응집되어 있다. 그리하여 상자는 기억을 넘어서는 것의 기억이 된다.(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p.184) 실종과 실족은 결과물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 결과 전 단계도 아니고 결과의 단계도 아니다. 그것이 진행되어 잠시 일시정지 된 지점에서 허공에 떠 있는 종이 비행기를 더듬는 것이다. 시차를 통과 할 수 있는 인류의 과학 문명기술에서 비행기만 한 것은 없다. 그것은 동력으로 전달된 철의 기계일 뿐만 아니라 유년 시절 종이로 만든 비행기 역시 예외 일 수 없다. 시차의 언어란, 고상한 문명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을 각오하고 앉으면 가장 예리한 세월을 놓치지 않는 새들(p.19)처럼 즐겁고 캄캄한 복도(p.19)에 서서 그 질감을 씹으며, 여독(p.30)을 푸는 것이다. 손가락 발가락은 그냥 방바닥에 둬야 한다. 몸뚱이를 일으켜 세워도 안 된다. 그저 누워 있으면 된다.
나는 오랜 시간동안 시를 읽는 재미를 잃고 살았었다. 리포트를 쓰기 위해, 혹은 읽어야 하는 의무감에 쫓겨, 즐기지 못했다. 언어란 소통하는 것임에도 그 소통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장을 풀고, 발 고린내 풀풀 풍기는 양말을 벗었을 때, '아 여기가 내 집이었구나.' 할 수 있는 안락함이 없었다. 여행은 하는 내내도 즐거울 수 있지만, 여행을 회상하는 것은 집에서만 가능할 것 같다. 여독을 풀기 위해 여행하는 시인처럼, 시집은 내게 몽상을 풀기 위해 일기를 대신 써(p.62)줬다. 나는 오늘 대필된 일기를 통해 여독을 풀었다. 이것이 다 풀릴 때쯤엔 나도 일어나 여행을 떠나야겠다.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 일기를 대신 써줘야겠다. 시차란 바쁜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바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므로. 바쁜 사람들은 바보들의 이야기를 그냥 듣기만 하시라. 너희가 어지러움을 아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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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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