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springstar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1.12.27
“야마니시 영감님은 강도단 아니라 화적패라고 주장헙디다만, 야밤중에 강도단을 끌고 나타나서 천석꾼 영감한티 되알지게 혼겁을 멕이고 간 그 장본인이 누구였는지 누님은 아즉도 전연 짐작이 안 가십니까?”
“배! 낙! 철!”
마치 악의로 가득 찬 동생의 가슴을 향해 힘껏 돌팔매를 날리는 심정이었다. 순금은 하나의 이름을 세 토막으로 나누어 한 음절씩 또박또박 아금받게 발음했다.
“허어, 우리 누님께서 그 은밀헌 강도단 속내를 무신 수로 그러콤 정확허게 알어냈을까요?”
놀라 자빠지는 시늉으로 부용이 요란하게 감탄해 마지않았다.
“고등계 형사나 헌병대 오장 아니라도 그 정도 추리는 얼매든지 가능헌 사건 아니냐!”
어디까지나 그저 막연한 추측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 추측마저도 최순금 고유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 눈 번히 뜬 채로 거액의 재물 강탈당한 끝에 정신머리 해뜩 뒤집어진 아버지가 분노의 절정에서 도나캐나 추켜잡은 무모한 억측일 뿐이었다. 어떤 근거에 바탕을 두고 그랬는지 모르지만, 좌우지간 아버지는 얼마 전부터 놀랍게도 배낙철에게, 다른 누구도 아닌 이질에게 화적패 수괴 혐의를 두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심히 난감한 지경에 몰려 전전긍긍하는 사람은 두 관촌댁 자매, 다름 아닌 어머니와 이모였다. 자매는 천륜에 인륜을 곱빼기로 범한 천하의 패덕한을 각각 이질과 아들로 두었다는,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죄목을 홀랑 뒤집어쓴 채 각각 남편과 형부로부터 솔찮이 시달림을 당하면서 호소무처의 폭폭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여학교 때 일찌감치 고등계 취조를 몸소 겪어본 솜씨라서 그런지, 역시 우리 순금이 누님께서는 범상치 않은 안목을 구비허셨고만요.”
그러나 순금은 아버지의 뚱딴지같은 의심을 당초부터 명명백백한 억측으로 아예 치지도외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사회주의에 흠뻑 물들어 있기로서니 설마한들 제 이모부 멱에 비수를 들이대는 극한 폭력까지 저지를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렇다면 공범이 누구누군지도 누님은 펄써 다 뜨르르 꿰고 있겄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도질한 장본인으로 배낙철을 명토 박아 대거리한 것은 순전히 부용의 퇴행적 언동에 대한 반발심과 오기 때문이었다. 애당초 그렇게 시작된 일인데, 별다른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툭 내뱉은 그 대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논두렁에 물꼬를 트면서 점점 수상한 방향으로 논물을 흘려보낼 조짐을 보이는 게 아닌가.
“최부용이 바로 니놈이다, 이 나뿐 놈아!”
“핫핫하, 틀렸어요. 저는 아닙니다. 이 최부용이는 강도단 일원으로 낙철이 패거리에 직접 가담헌 사실이 결단코 없습니다. 누님이 섬기는 신을 두고 맹세헐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정말로 무고헙니다. 다만, 한 다리 슬쩍 건너서 저는 낙철이네 범행을 약간 방조만 혔을 뿐이지요. 핫핫핫하.”
감쪽같이 상대방을 돌라먹는 데 성공한 것을 자축하는 악동처럼 부용은 요란한 웃음소리로 마냥 즐거움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 순간부터 순금은 극심한 혼란 속으로 급작스럽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어쩐지 부용의 태도가 장난삼아 그냥 괜스레 떨어보는 허풍처럼 느껴지지 않는 까닭이었다.
“아니, 그렇다면…….”
저도 모르게 꿀꺽 삼켜지는 침 때문에 말허리가 잘렸다.
“그 말이 사실이란 말이냐?”
갑자기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사뭇 추위를 타는 낯꽃으로 순금은 동생에게 바싹 다가앉았다.
“낙철이가 실지로 강도단을 끌고 와서 우리 집 사랑채를, 즈그 이모부를 털었단 말이냐?”
혹여 어느 엿듣는 자 있어 말소리가 그 귓구멍에 들어갈세라 순금은 방문 밖 동정에 부쩍 신경 쓰면서 목청을 방바닥에 착 깔았다. 그러자 부용이 벌컥 소가지를 부렸다.
“여태까장 누님은 제 말을 농담으로 알어듣고 있었소?”
“아니, 그렇다면 부용이 니가 낙철이네 강도 행각을 방조혔다는 것도 사실이란 말이냐?”
“우리 배낙철 두목님께서 소인한티 부여허신 사명은 사전에 복구란 놈한티 수면제를 멕여서 밤새드락 얌전허게 잠을 재워 놓는 것이었지요.”
“오, 주여…….”
감당키 버거운 시련과 맞부닥뜨릴 적마다 늘 해 나온 버릇대로 순금은 얼른 두 손을 모아 가슴에 갖다 붙였다.
“겨우 그 정도 사실 갖고서 뭣을 그렇게 놀래 자빠지십니까? 만약 그날 밤에 야마니시 영감님 둘째아들 최귀용이란 작자도 복면을 허고 강도단 일원으로 가담헌 사실을 아신다면, 그러고 최부잣집 사랑채에서 야마니시 영감님이 꽁꽁 포박당헌 채로 만판 곤욕을 치르던 그 시간에 그자가 바로 지척지간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까장 아시는 날이면 누님은 필경 까무러치고 말겄습니다그려.”
아닌 게 아니라 순금은 거의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시야를 하얗게 표백시키면서 현기증이 엄습하는 바람에 정신이 별안간 어찔어찔해졌다. 이마에 손을 짚으려는 순간 윗몸이 앞쪽으로 기우뚱 쏠렸다. 순금은 방바닥과 몸뚱이 사이에 양팔로 급히 버팀목을 질러 가까스로 자세를 바룰 수 있었다.
“제발, 부용아!”
순금은 무릎걸음으로 문칮문칮 다가들어 부용과의 간격을 아예 없애 버렸다. 그니는 뼈마디들이 울툭불툭 불거져 나온 부용의 앙당그러진 손을 붙잡고 마구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말짱 다 거짓말이라고, 장난삼어서 그냥 되나 못되나 한번 뱉어본 소리였다고, 내 앞에서 시방 당장 분명허니 밝히거라!”
그러나 부용은 세차게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즉도 제 말을 못 믿으시는 모냥인디, 그렇다면 자초지종을 소상허니 밝히지요. 낙철이 지시를 받고 귀용이가 저를 찾어온 것은…….”
“되얐다, 그만두거라! 더 듣고 잪지 않다!”
- 좋아요
- 6
- 댓글
- 0
- 작성일
- 2023.04.26
댓글 0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