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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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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금은 손바닥으로 부용의 입술을 덮쳐눌렀다. 정말 더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차라리 자초지종에 접하기 이전의 애매모호한 상태 그대로 영원히 땅속에 묻어 버리고 싶은 이야기였다. 전대미문의 패륜만행에 어떤 형태로든 두 동생이 깊숙이 관련된 것이 부동의 사실로 굳어질 경우, 순금은 곧바로 들이닥칠 무시무시한 결과를 예측하면서 미리감치 부르르 몸서리쳤다. 입을 막았던 순금의 손바닥이 옆으로 치워지기 무섭게 부용은 잠시 끊겼던 말허리를 다시 잇기 시작했다.


 


  야소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전주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지요. 범티 고갯마루에 앉어서 잠깐 숨을 돌리고 있는 참인디…….”


 


  제발 그만두라니깨!”


 


  느닷없이 귀용이란 놈이 제 앞에 턱 나타나는 겁니다. 경성에서 한참 학업에 몰두허고 있어야 될 때가 아니냐, 그런디 니가 시방 여그는 웬일로 나타났냐, 무신 일로 요로콤 급작시럽게…….”


 


  순금은 마개로 틀어막듯 양쪽 귓구멍에 손가락을 깊이 꽂아 소리가 출입하는 모든 통로를 차단해 버렸다. 급경사 내리막을 제멋대로 굴러 내려가는 거대한 눈뭉치를 닮은 부용의 이야기에 화급히 제동을 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순금은 스스로 귀머거리가 되어 철골을 이룬 부용의 앙상궂은 가슴에 얼굴을 묻으면서 마침내 울음보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자아, 울 만침 실컷 다 울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인자는 나머지 말을 끝까장 다 들어보실 차례지요.”


 


  얼마나 울었을까.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순간부터 부용의 말소리가 귓전을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부용아, 너 대관절 왜 이러는 거냐? 내가 너한티 무신 죽을죄를 졌다고 날 이렇게 고문허는 거냐?”


 


  누님이야말로 우리 집안 전체를 탈탈 털어서 저랑 대화가 잘 통허는 유일무이헌 혈육 아닙니까. 누님이기 이전에 우선 진실을 함께 논헐 수 있는 동지라고 생각허다 보니깨 나 혼자만 알고 있는 비밀을 솔직허니 다 털어놓고 잪었을 뿐입니다.”


 


  부용은 그새 한결 차분해진 말투로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악질 반동 지주 야마니시 아끼라를 단죄허는 수준의 소극적 행동이 아니고 차제에 아조 끝장을 내뿌리는 차원의 적극적 행동이 바로 애당초 낙철이 계획이었지요. 그런디 귀용이가 그 계획에 끝까장 동의허지 않고, 저 역시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고 극구 말렸지요. 인자 와서 허는 말이지만, 차라리 그때 낙철이가 계획헌 대로 그냥 모르는 척 내비뒀드라면 얼매나 좋았을 뻔혔는가, 허는 생각이 요즈막에 저를 엔간히 괴롭히고 있습니다.”


 


  자칫 잘못 들으면 순금의 놀란 가슴과 지끈거리는 골머리를 살살 다독이기 위한 것처럼 부드럽고 다정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예사로이 내뱉는 부용의 한 마디 한 마디 말이 낱낱이 다 서슬 퍼런 흉기로 변해서 순금의 가슴을 조각조각 자디잘게 저미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낙철이 갸 처음 계획이 옳았다는 게 증명된 셈이지요. 물실호기, 그야말로 다시 없이 좋은 기회를 그때 우리 최가 형제들 반대로 놓치고 만 것이지요. 허지만 아즉도 영영 늦지는 않었지요. 지금이라도 누님허고 제가 힘을 합치기만 헌다면, 그때 낙철이가 못다 끝낸 일을 우리 남매가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울 수 있다, 이겁니다.”


 


  윗몸을 곧추세우면서 순금은 홉뜬 눈으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부용의 뺨 위로 긴 줄을 그으며 눈물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놀랍게도 부용은 소리 없이 울고 있는 중이었다. 눈물줄기가 홀쭉히 파인 볼 고랑을 타고 연달아 흘러내렸다.


 


  제 말 잘 들어보십쇼, 누님. 장차 우리가 끝장낼라고 허는 인간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최명배도 아닙니다. 야마니시 아끼라란 이름 가진 괴물이란 말입니다. 그 인간은 벼멸구나 메뚜기맨치로 세상 농사에 백해무익헌 존재지요. 수많은 사람들 들들 볶아먹고 고혈 빨어먹는 그 흡혈마 같은 인간을 우리 손으로 하루속히 끝장을 내야만 우리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 남매가 기필코 그 일을 끝내야만 산서 사람들 전체가 숨을 쉬고 살어갈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부용의 말에 순금은 계속해서 도리머리를 흔들어댔다.


 


  그러지 마십쇼, 누님. 어차어피 우리 남매는 거대 악마 소생 군소 악마들이잖습니까.”


 


  순금은 또 한 차례 세찬 도리머리와 함께 부용의 눈동자를 구멍이 뚫리게끔 쏘아보았다.


 


  안 된다, 부용아. 상상 속에서 도모허는 것만으로도 벌써 그것은 치명적인 죄가 되는 법이다, 부용아.”


 


  그러자 부용의 얼굴이 맥없이 옆으로 돌아갔다. 새롭게 비어져 나오는 굵은 눈물방울들이 후두두 떨어지면서 베갯잇을 적시기 시작했다.


 


  야마니시라는 괴물을 우리 손으로 차마 어쩌지 못헌다면, 그 괴물 대신 속죄허는 뜻으로 다른 누군가가 죽어 주는 것도 한 방법이겄지요. 의젓잖고 꾀죄죄헌 모양새긴 허지만, 그러는 것도 야마니시 영감 머리 우에 형벌을 내리는 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요?”


 


  동생이 하고많은 날들을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면서 음침한 구석방 구석에 틀어박혀 병든 육신 혹사해 가며 기껏 짜냈다는 궁리가 결국 저토록 음험하고 참담한 내용이었나 생각하니 순금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함지야!”


 


  순금의 입에서 느닷없이 엉뚱깽뚱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함지란 이름으로 동생을 부르는 순간, 순금 자신이 먼저 놀라고 말았다. 부지불식간에 입에서 튀어나온 부용의 아명이었다. 어머니가 함지박이 철철 넘치도록 밭에서 굵은 가지를 따 담는 태몽을 꾼 연후에 들어선 아들이라 해서 붙인 아명이었다. 애들이 자꾸만 놀려먹는다며 부용이 한사코 듣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소학교에 입학한 이후로는 불러본 기억이 전혀 없는 이름이었다. 그 새퉁스러운 이름이 오랜 세월 자신의 내부 어느 심연에 가라앉아 가만히 숨죽이고 기다리다가, 기회는 바로 요때다, 하고 그처럼 입 밖으로 불쑥 뛰쳐나오게 된 것인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순금은 부용 아닌 함지를 두 팔로 와락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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