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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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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지야, 우리 함지 어쩔꺼나! 불쌍허고 불쌍혀서 우리 함지 어쩔꺼나!”


 


  양끝에서 팽팽히 잡아당기고 있던 고무줄을 어느 한쪽이 탁 놓아 버린 꼴이었다. 그 고무줄 끝에 매달려 있던, 녹슬고 먼지 덮인 이름 하나가 갑자기 튀겨져 나오면서 이십 년 상거의 세월을 단숨에 좁혀 놓았다.


 


  우리찌리 약속허자, 함지야.”


 


  어린 동생 함지의 볼에 제 볼을 마구 비비대면서 순금은 애타게 말했다.


 


  여태까장 우리찌리 주고받었던 소리가 절대로 따른 사람들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내 말 알어들었지야?”


 


  오누이의 볼과 볼이 맞닿으면서 제각각 흘리는 두 가닥의 눈물이 한데 엇섞였다. 서로 끌어안은 채 오누이는 소리를 마주치며 울었다. 식민 통치도 모르고 독립운동이나 혁명운동도, 화적패나 강도단도 모르던 어린 시절로 멀리 되돌아갔다. 그렇게 한참을 함께 울고 나니까 신통방통하게도 들썩거리던 마음이 웬만큼 진정되었다. 가을비에 함빡 젖은 채 으슬으슬 떨리는 몸으로 집에 돌아와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궁둥이 지지며 한잠 늘어지게 자고 난 뒤끝인 양 개운한 기분마저 들었다.


 


  우리 둘이서만, 너허고 나허고만 아는 비밀이다. 내 말 알어들었지야?”


 


  마침내 함지가 고개를 끄떡이는 순간이 왔다. 뭔가 크게 잘못을 저질렀을 적마다 감당키 어려운 그 책임을 항용 손위한테 떠넘김으로써 제 대신 순금으로 하여금 부모한테 야단맞게 만들곤 하던 그 옛날 모습처럼 함지는 아직도 겁에 질려 있는 낯꽃이었다.


 


  아이고, 우리 함지 참 착허기도 허지. 그럼 누님은 너만 꽉 믿는다.”


 


  순금은 오동포동 살이 올라 있는 함지에서 급작스레 온몸이 철골되고 껑더리된 부용으로 되돌아온 동생을 다시 한 번 으스러지게 껴안아 주었다. 참새처럼 할딱거리는 부용의 숨기척이 순금의 젖가슴에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으리만큼 무서운 광기에 사로잡혀 있던 부용은 어느새 다소곳하고 고분고분한 동생으로 변모해 있었다.


 


  한숨 푹 자거라. 자고 나서 또 보자.”


 


  순금은 마른 짚단처럼 가볍게 느껴지는 부용의 수척한 몸뚱어리를 요 위에 뉘었다. 이불자락을 끌어올려 턱밑까지 덮어 준 다음 자장가 부르듯 부용의 가슴을 가만가만 다독거렸다. 스스로 목숨을 버릴 작정으로 끊임없이 음모와 반역을 획책하는 동생을 위해 누이로서 감당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순금은 익히 알고 있었다. 동생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건질 수만 있다면 자신의 여생을 건, 아무리 길고 험난한 싸움일지라도 결코 마다하지 않겠노라고 거푸 속다짐했다. 부용의 눈꺼풀이 무겁게 감긴 걸 확인하고 나서 순금은 쟁반을 챙겨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구석방을 벗어났다.


 


  들릴락 말락 낮은 인기척이 들렸다. 벽 모퉁이를 돌아 잽싸게 모습을 감추는 섭섭이네 치마꼬리가 얼핏 눈에 들어왔다. 순금은 곧바로 섭섭이네 뒤를 밟았다. 하마터면 간 떨어질 뻔했다는 듯이 섭섭이네는 뒤란에서 손바닥으로 연방 가슴을 쓸어내리는 중이었다. 불시에 젊은 아씨하고 정면으로 맞닥뜨리자 섭섭이네는 술래잡기에서 술래 역할을 맡은 가시내처럼 황급히 양손바닥으로 안면을 덮는 동작을 취했다.


 


  쇤네는 참말로 아모 낌새도 못 챘구만요! 참말이어라!”


 


  약사발이 얹힌 쟁반을 손에 든 채 순금은 그 사발 빛깔만큼이나 새하얗게 실색한 낯꽃으로 섭섭이네의 자발없는 거동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얼굴을 가린 손가락들 틈새로 젊은 아씨를 빠끔히 내다보면서 섭섭이네는 잠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쇤네를 꽉 믿으시기라! 참말이지 쇤네는 오날 요때부텀 귀먹당수에다 당달봉사에다 버버리가 되기로 아조 작심허고 말어 뿌렀고만요!”


 


  언제부텀 엿듣고 있었어요?”


 


  ? 쇤네는 참말로 아모 소리도…….”


 


  되얐어요. 가서 함지 되린님 미음이나 끓이셔요.”


 


  , 누구라고라?”


 


  부용이 되린님 미음 준비허라니깨요.”


 


  암먼이라, 끓이다마다요! 한 번 아니라 열두 번이라도 끓이라 허시면 끓여야지라! 미음죽 아니라 불로초 뜯어다가 장생죽이라도 끓여서 큰되린님 상에 올려드려야지라!”


 


  섭섭이네는 젊은 주인아씨의 서슬 퍼런 눈초리를 애써 외면하면서 혼잣말로 간단없이 중얼거렸다. 순금은 검정 광목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부엌을 향해 부랴사랴 달려가는, 부대한 몸피의 섭섭이네 뒷모습을 일삼아 한참이나 지켜보고 있었다.


 


  볼지어다 때가 이를 것이니 곧 지금이라 너희가 다 흩어져 각각 제 곳으로 돌아가고 나를 혼자 두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바지께서 나와 함께 계실 터이니라.’


 


  또다시 문 목사 사모의 쪽지에 적힌 성경 구절이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그때 사모가 쪽지에 언급했던 예배당 종소리란 주물로 만들어진 진짜배기 놋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뭔가 상징적 의미를 지닌 다른 종을 가리키는 말인 듯싶었다. 어쩌면 핍박받고 시험당하는 뭇 성도들을 실어 하늘로 둥둥 띄워 올리는 거대한 비행선 같은 운송 수단을 의미하는 말인지도 모른다는, 엉뚱깽뚱한 생각이 얼핏 뇌리를 스치기도 했다. 막연히 예고된 그 종소리가 다른 어느 때보다 부쩍 더 기다려지는 순간이었다.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누가 입으로 훅 불라치면 흔적도 없이 스러질 것처럼 온몸이 자꾸만 땅바닥으로 까라지려 했다. 그러나 마음만은 그렇게 가뜬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로 마음만 먹을작시면 언제든 지친 육신을 작은 새로 둔갑시켜 바람 타고 파란 하늘 향해 포르르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이것을 너희게 이름은 나를 힘입어 평안함을 얻게 함이라 세상에 있을 제 너희가 환란을 받으나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때마침 부엌문을 나서는 덕기 녀석이 눈에 띄었다.


 


  덕기야.”


 


  난데없는 부름에 흠칫 놀라면서 덕기 녀석이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순금하고 눈이 마주치자 녀석은 한 움큼 손에 쥐고 있던 누룽지부터 얼른 등 뒤로 빼돌리려 했다.


 


  이리 오니라. 아짐씨가 우리 덕기한티 쪼깨 헐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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