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springstar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2.4.3
“만나면 드리겠다고 오래전부터 준비해 놓은 선물인데, 그동안 그럴 기회가 통 없었지요.”
쪽지였다. 마치 첫사랑이 건네는 연애편지 대하듯 순금은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선물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강단 주변을 밝히는 남포등의 조력에 힘입어 쪽지에 적힌 내용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로마 八쟝 三一졀로 三五졀 말
그런즉 이 일에 야 우리가 무 말리오 만일 하님이 우리를 위야 시면 누가 능히 우리를 뎍리오…… 누가 능히 하님의 신 셩을 숑리오 하님이 의롭다 시니 누가 능히 죄를 뎡리오…… 누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랑에셔 흐리오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긔근이나 젹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
“조오지부쓰오 와즈라우 야쓰 같은 놈들 같으니라고!”
매우 편리하게도 형편과 처지에 맞추어 때로는 내선일체의 황국신민 야마니시 아끼라로 둔갑하는가 하면, 또 때로는 된장 냄새 물씬물씬 풍기는 토종 조선사람 최명배로 내처 머물러 있기를 여반장으로 하는 위인이었다. 자기 태생 엿 바꿔 먹듯 자기 근본 갈마들이기를 자유자재로 해치우는 산서 제일의 갑부 영감 입에서 잔뜩 악에 바친 욕지거리가 토악질하듯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몸뚱어리 안팎, 사대삭신 전후좌우 구석구석을 무시로 출입하면서 뼈마디를 낱낱이 욱죄고 오장육부를 점점이 해체하려 드는 무시무시한 동통이 엄습할 적마다 최명배는 으드득 사리문 위아래 어금니 틈새로 짐승의 울부짖음 비슷한 소리를 간단없이 밀어내곤 했다. 왜경 순사들한테 총개머리로 늘씬하게 두들겨 맞고 읍내 경찰서에 잡혀간 이래 그는 조선사람 최명배 신분으로 내내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똥을 누고 잠을 자고 있었다. 뭔가 특별한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최명배는 앞으로도 당분간은 태생과 근본이 애매모호한 그 야마니시 아끼라란 작자하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냥 데면데면하게 지낼 심산이었다.
“조오지부쓰오 와즈라우 야쓰맨치로, 아니지, 조오지부쓰오 와즈라우 야쓰보담도 휘낀 더 고약허고 징상시런 종자들 같으니라고!”
그러나 워낙 딸년한테 귀동냥으로 얻어 익힌 엉터리 토막국어 실력인 데다 임의대로 매끄럽게 잘 돌아갈 줄도 모르는 혓바닥 놀려 내뱉는 국어 욕지거리는 마치 귀엽지도 않은 의붓자식 잠지 만져 주는 노릇과도 같아서 번번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아마니시 아끼라는 황국신민 근처까지 얼추 다 다가갈 뻔했던 자기 신분을 허둥지둥 도로 불러들여 깔축없는 조선종자 최명배의 입장으로 황급히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슥 달 열흘 꼬빡이 옘병을 앓다가 땀 한 방울도 못 내고 빳빳허니 꾸드러질 잡탕패 놈들 같으니라고!”
최명배는 한 파수 또 기승스레 치밀어 오르는 어마어마한 동통을 증오심 가득 찬 조선말 욕지거리에 버무리고 더운 입김으로 양념 쳐서 또다시 잇새로 뿌직뿌직 밀어냈다. 알맞추 잘 고아진 조청처럼 혓바닥에 착착 감겨드는 조상 전래의 조선말 솜씨로 한바탕 험구 놀리고 나니까 그제야 비로소 난생 처음 욕다운 욕 뱉어본 듯 속이 다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살점을 발기발기 찢어 헤집고 뼈마디를 우지끈 부러뜨리는 듯싶은 삭신의 통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갈돌처럼 묵직하고 단단하게 은결든 마음의 통증만큼은 얼추 다스려지는 느낌이었다.
“웬수가 따로 없지! 암먼, 따로 없다마다! 왜놈들이 웬수 아니라 슬하에 자식들이 바로 웬수라니깨!”
그동안 최명배가 줄곧 퍼부어 나온 욕지거리의 대상은 밤낮 가리지 않고아무 죄도 없는 늙은이의 잠을 빼앗는 한편 온갖 짐승 같은 폭행과 야만적인 고문을 자행한 왜경들이 결코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의 증오와 저주는 자신의 큰아들과 둘째아들, 그리고 거기에 장조카까지 합쳐 셋을 한목에 묶은 피붙이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놈들이 저지른 소행머리야말로 괘씸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그 원수 같은 놈들 가운데서도 기중 괘씸한 원수는 다름 아닌 노점귀신 큰아들이었다. 재물 소유주도 아닌 주제에 진짜 주인하고 사전에 일언반사 상의도 없이 그 재물 멋대로 저당 잡히고 자그마치 거금 만 원을 끌어다 재량껏 분탕질하는, 그야말로 파천황의 행악질을 저질러 버린 큰아들 부용이란 놈 소행머리와 비교하자면, 무고한 황국신민을 읍내 경찰서 지하 유치장 안에 가둔 채 장장 닷새간에 걸쳐 밤낮으로 치고 차고 박고 꺾고 비틀고 돌리고 메어꽂는 등등으로 늙은 몸뚱이에 모진 고문을 가한 왜경 고등계 형사들은 차라리 학식과 덕망을 두루 갖춘 사대부 양반쯤으로 괄목상대해야 마땅할 지경이었다. 다른 누구라면 혹간 또 모르겠다. 남남지간도 아닌, 바로 제 친부를 상대로 고등계 형사들보다 훨씬 더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지른 천하잡놈이 바로 그 노점쟁이, 자신의 큰아들 부용이었다. 더군다나 제 딴은 제 아비 한 몸 극진히 위하느라 그 따위 고얀 짓거리를 앞장서서 도모하고 지휘했다고 우겨대다니! 하눌님이 다행히도 인간들 콧구멍을 두 개 뚫어놓으셨기에 망정이지, 만일 콧구멍이 한 개밖에 안 뚫렸더라면 최명배는 당장 통기에 문제가 생겨 캑캑 숨 막혀 죽을 뻔했다.
“나 죽겄다, 이놈들아! 아이고, 나 죽는다, 이년들아! 아고고고, 거그 시방 어느 연놈이건 암도 없느냐?”
이부자리 안에서 네 활개 연방 버르적거리며 최명배는 냅다 고함을 뽑았다. 아침나절에 일차 복용했던 탕제에 섞인 앵속 기운이 거지반 다 떨어져가는 모양이었다. 그날로 유치장에서 풀려난 지가 벌써 엿새째인데도 몸 상태가 첫날보다 좋아지기는커녕 외려 갈수록 더욱더 형편없이 망가지고 바짝 짜부라지는 듯싶었다.
옴나위조차 할 수 없으리만큼 초주검 다름없는 꼬락서니 되어 짐짝처럼 달구지 위에 얹힌 상태로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상곡 어른을 가권들과 식솔들은 흡사 심지에 불만 닿으면 뻥 터질 폭발탄 다루듯 되우 조심조심 맞아들여야 했다. 지리멸렬 상태로 단단히 고장이 나 버린 천석꾼 영감 신체를 본래의 인간 형상으로 다시 꿰맞춰 놓기 위해 가권들은 장독(杖毒) 푸는 데 효험이 좋다고 알려진 온갖 약재를 연락부절로 대령하는 공사에 저마다 팔소매 걷어붙이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닷새 동안에 걸쳐 그토록이나 갖은 정성 다 기울여 병구완에 매달렸으니 이제 엿새째 되는 날에는 웬만큼 차도를 보일 법도 하건만, 한번 늙은 몸뚱이 내부에 터전을 잡아 버린 골병은 하루가 다르게 점점 더 고황에 드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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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