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springstar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2.4.24
너무도 기가 꽉 막히는지 진용은 잠시 우두망찰한 채 먼산만 바라보다가 깜빡 잊을 뻔했다는 듯 서둘러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 시방 당장 말씸 사루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나는 시방 분간이 안 서누만. 어르신께서 시방 얼매나 상심이 크실지 뻔허니 다 알고 있는 판국에 시방 그 숭칙헌 소식 짊어지고 사랑채 올라가자니 차마 입설이 안 떨어질 것 같고, 또 그런다고 시방 입주뎅이 딱 함봉허고 어르신 눈치만 실실 살피자니 그것도 시방 아랫사람 된 도리가 아닐 것 같고……”
그야말로 가자니 태산이요 돌아서자니 숭산이라는 식의 실토정이었다. 사촌형이 사랑채로 직행하지 않고 안채 구석방부터 먼저 들른 이유를 부용은 그제야 이해할 것 같았다.
“다들 싸게 알어야 될 급박헌 소식인디, 그걸 형님 혼자서 끌어안고 고민허면서 차일피일 보고를 지체헐 이유가 뭣이 있습니까? 다른 경로 타고 흉보가 아버님 귀에 먼저 들어가기 전에 형님이 선수를 쳐서 후딱 알려드리는 편이 외려 더 득이 되지 않을까요?”
“그건 또 왜?”
“고름이 살 되는 법 없지 않습니까. 쇠뿔은 단 김에 빼고 호박떡은 더운 김에 먹으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어차어피에 금명간 곪아터지고 말 사달이 분명허고, 또 부모 된 입장에서 아버님도 일찍 아시는 게 마땅헌 소식인디, 괘얀시 그걸 뒷전으로 빼돌리고 쉬쉬허느라고 형님 혼자 사서 고생허실 필요가 뭣이 있습니까? 어차어피에 피헐 도리 없는 매라면 한시라도 일찍 맞는 편이 휘낀 덜 아픈 법이지요.”
부용의 긴 설명을 진용은 그저 잠자코 듣기만 했다. 마치 생면부지 남의 집안이 겪는 불행 대하듯 매우 심상한 어조로 들으나 마나 한, 들어봐도 답답하긴 매일반인 훈수 따위나 건네고 있는 사촌동생 태도에 진용은 그만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기색이었다.
“부용이 동상 말이 시방 일점일획도 틀린 구석이 없는 것 같으네. 내 귀에는 시방 자네 말이 낱낱이 다 옳은 방구 뀌어대는 소리로만 들리네. 그렇기는 헌디……”
“형님, 막중헌 짐을 죄다 형님한티 떠둥그치고 노상 터럭만침도 도움을 못 드려서 참말로 죄송만만입니다.”
부용은 재빨리 말머리를 돌림으로써 사촌형이 사랑채를 향한 흉보 배달을 주저하고 망설거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절약할 수 있게끔 동생으로서 모처럼 한 번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다.
“죄송은 시방 무신 죄송……”
정말 그랬다. 부용이 항상 무지근한 부채감을 안은 기분으로 사촌형을 대해 버릇하는 건 여축없는 사실이었다. 소유권자 아버지 허락도 없이 부용이 자신의 임의대로 사촌형을 시켜 논 잡히고 급전 변통해서 읍내 관가에다 흥청망청 뇌물 뿌린 결과로 말미암아 온 집안에 거센 풍파 몰아닥쳤던 지난번 소동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뒷일 일체를 책임 지겠다 장담하는 사촌동생 말만 믿고 진용이 대리인 자격으로 나서서 벌인 공사인데, 결과적으로 죄는 개천 도깨비가 짓고 벼락은 당산 고목나무가 맞은 꼴이 되고 말았다. 한갓 주인 한번 본때 있게 잘 섬기려는 일념으로 어렵고 힘든 심부름을 감당했던 죄밖에 없는 진용이 모든 허물 흠씬 덤터기 쓴 채 걸핏하면 사랑채로 불려 다니며 상곡 어른한테 곤욕 치르느라 연일 입술 부르트고 발바닥에 물집 잡히는 등 수고가 도무지 말로 다 표현 못 할 지경이었다.
“알겄네, 알겄어. 자네 훈수대로 시방 사랑채로 당장 근너가야 쓰겄네. 어르신 찾어뵙고는 시방 사실이 여사여사허고 사건 속내가 약차약차허다고 시방 이 최진용이가 이실직고허는 편이 암만 혀도 시방 여러 사람 신간 편허게 맨들 것 같으네.”
마침내 진용이 무척 결기에 찬 동작으로 문지방에 걸쳐 있던 반쪽 엉덩이를 뚝 떼어 위로 들어올렸다.
“정말 죄송헙니다, 형님.”
흉보 배달이라는 고약한 임무 한 짐 그득 짊어지고 비장한 각오 아래 사랑채 향해 떠나는 진용의 뒷모습이 아무래도 딱하고 안심찮게 느껴졌다. 부용이 방구석에 틀어박힌 채 입으로만 배웅하던 바로 그때, 어쩐지 부실하게 느껴지는 사촌형 아랫도리가 우연히 시야에 들어왔다.
“잠깐만요,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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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