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springstar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2.5.31
화장기 전연 없는 민낯인데도 뽀얀 살결 덕분인지 제법 공들여 가꾼 듯한 인상이었다. 겁먹은 듯 동그랗게 뜬 유순한 눈매에 짙은 음영이 어려 있어 그간 난생 처음 생경한 시골행을 결단하기까지 혼자서 얼마나 많은 갈등과 번민의 시간을 보냈던가를 잘 말해 주고 있었다. 금시초면에 생면부지 얼굴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순금은 첫 순간부터 어쩐지 이연실이 자신과 무관한 처지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오랫동안 피차 흉허물없는 관계를 줄곧 유지해 나온 사이인 양 왠지 모르게 친숙한 기시감이 앞서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켜 사람들은 천생인연이라고 부르는구나, 하고 순금은 떡 줄 사람한테 물어도 안 보고 멋대로 김칫국부터 양껏 들이켰다.
“최부용 씨 신상에 무슨 일이 생겼나요?”
이연실이 갑자기 초조한 기색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누님 되시는 분 편지 문면만으로는 도무지 사정을 종잡을 수가 없어서 굉장히 당혹스러웠어요. 그분은 지금 어떤 모양으로 지내고 계시나요?”
칸막이를 중간에 두고 말을 건네듯 무척 사무적으로 들리는 이연실의 어조에 순금은 비로소 정신이 퍼뜩 들었다. 감격과 흥분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이연실의 기분을 터무니없이 앞지르면서 저 혼자 일방적으로 호들갑을 떨었다는 사실을 순금은 그제야 밝히 깨달을 수 있었다.
“사연으로 말헐 것 같으면, 참말로 길고도 복잡허답니다. 요 자리서 한꺼번에 털어놓기가 불가능헐 정도지요. 우선 나랑 같이 우리 집으로 가시지요. 자세헌 얘기는 집에 가서 천천히 나누는 게 좋겄어요.”
순금의 제안에 이연실은 펄쩍 뛰는 시늉을 했다. 붙잡힌 손을 슬며시 뿌리쳐 남에게 빼앗겼던 팔소매를 되찾으면서 이연실은 연방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죄송합니다만, 그럴 수는 없어요. 그분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지금 그 사실 한 가지만 알고 싶어요. 그것만 알아본 연후에 왔던 길을 곧장 되짚어서 전주로 돌아갈 작정으로 집을 나섰던 거랍니다.”
“연실 양이 하로바삐 우리 집을 방문헐 수 있게코롬 그 발걸음을 산서 쪽으로 인도허십사, 허고 날이면 날마닥 전능허신 여호와 하나님 전에 간구를 드렸지요. 그랬더니만, 연실 양이 시방 요렇게 내 눈앞에 실지로 나타나셨어요. 나는 시방, 연실 양이 우리 집까장 나허고 동행헐 수 있게코롬 도와주십사, 허고 다시 한 번 여호와 하나님 전에 기도허고 있어요.”
“실례되는 말씀 같습니다만, 누님 되시는 분하고는 달리 저는 종교 같은 것을 안 믿고 있어요.”
“괭기찮어요. 연실 양이 종교를 믿든 안 믿든 지금은 상관없어요. 한 가지 분명헌 것은, 결국 이번에도 연실 양은 역시 내 청을 끝까장 외면허지 못허실 거라는 사실이지요.”
기도하는 자세, 기도하는 심정으로 양손을 가슴에 모은 채 순금은 진중한 어조로 고집 센 방문객을 공들여 설득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연실의 입에서 들릴락 말락 가느다란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분이 자기하고 저 사이를 누님 되시는 분한테 어떤 관계라고 소개하셨는지, 우선 그것부터 알고 싶어요.”
순금은 양산 안쪽으로 넌지시 손을 뻗어 이연실의 어깨를 가만히 짚었다. 때아닌 가을 추위를 타는 듯 가냘픈 몸피를 둘러싼 원피스의 어깻솔기 부위가 사뭇 떨리고 있었다.
“편지에다 적었던 그대로지요. 서가에서 똘스또이 부활을 찾어서 책주인한티 돌려주라는 부탁 외에 다른 말은 일절 없었어요. 나를 시켜서 우리 부용이가 연실 양한티 보내고 잪었던 신호는 그것이 전부였지요. 허지만 나는 알고 있어요. 우리 부용이가 입으로 직접 말헌 적은 없어도 나는 그 표면적인 신호 뒤에 숨겨진 다른 신호, 말허자면 진짜 신호를 얼매든지 눈치 챌 수가 있었어요. 부용이 진짜 부탁은 빌린 책을 돌려주라는 게 아니었어요. 자기 진정을 연실 양한티 대신 전달허라는 부탁이었어요. 달랑 그 신호 하나만 갖고도 나는 지난날 두 청춘남녀가 어떤 관계였는지 대충 짐작헐 수가 있었지요. 본시 그 방면에 우리 여자들은 비상헌 육감을 갖고 있고, 그 육감은 대부분 적중허는 법이니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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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