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읽은 책
하늘보기
- 작성일
- 2014.5.1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 글쓴이
- 허영선 저
서해문집
꿈을 꿉니다. 어두컴컴한 산을 향해 정신없이 내달리고 있습니다. 길도 없고 길도 보이지 않는 그 어둠 속을 죽음의 공포가 잔뜩 채워놓고 있습니다. 뒤를 쫓는 저들의 손에 잡히거나 그들보다 먼저 날아오는 총탄에 맞는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는 공포가 온 몸을 뒤덮고 있습니다. 온 몸이 가시덤불에, 나뭇가지에 긁혀 피투성이가 되고, 발바닥에선 고통마저 전해져 오지 않지만 그저 앞만 보고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산을 향해 달려갑니다. 거기 어딘가에 저들로부터 나를 숨겨 줄 동굴이나 은신처가 있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저들이 나를 쫓는 목소리,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오고 어디에도 나를 숨길 곳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발이 훅~ 꺼지며 몸은 균형을 잃고 아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걸 느낍니다. 그리곤, 소스라치게 놀라 눈이 번쩍 뜨이며 꿈에서 깹니다.
또 다른 꿈을 꿉니다. 한 밤에 갑자기 마을로 들이닥친 경찰과 군인들이 군홧발로 들어와 안방에서 잠들어 있던 부모님을 깨워 마당으로 내몰고, 뒷방에서 자던 전 할머니와 함께 뒷문으로 급히 빠져나와 뒷마당 대나무밭에 웅크린 채 숨을 죽입니다. 온 마을 사람들을 모두 마을 공터에 모이게 한 그들은, 영문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을 하나 하나 총으로 쏩니다. 부모님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리는 순간, 헉! 소리에 놀라 잠이 깹니다.
제가 태어나 자라던 1970년대에도 제주도 중산간 마을은 거의 오지에 가까웠습니다. 해안도로를 따라 하루에 몇 차례 버스가 오갈 때도, 중산간 마을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 두 편이 전부였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도 거의 없어서 전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마을이 많았습니다. 그저 조상 대대로 자라잡은 터에서 삶을 이어가던 사람들입니다. 일제시대건 해방이 되었건 그들의 삶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사건들 속에서 4.3이란 사건은 그들의 삶을 송두리채 앗아가는 회오리가 되었습니다. 4.3발발 이후 해안지대보다 중산간쪽 마을에 살던 이들의 피해가 컸던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이 산, 한라산과 더 가까이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일가 친척 중에 4.3으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겪은 일을 전해들은 바가 없습니다. 당시 해안마을 에 살던, 아홉 살난 눈으로 겪으셨던 어머니의 얘기는, 산사람들을 막기 위해 담을 쌓고, 보초를 서러 나가던 얘기들이었습니다. 아마도, 해안마을에 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일들을 겪었을 것이라 예상이 됩니다. 제겐 친할머니처럼 여겨지는 분이 계십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집을 짓고 이사를 하기 전까지 네 식구가 오손도손 초가집 단칸방에서 살던 시절, 주인 할머니셨고, 제 동생을 거의 키워주셨다는 분.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고 계셨는데, 아드님이 4.3으로 희생을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젊은 시절 혈기때문에 산으로 올라갔다가 희생된 것인지, 군경토벌대에 의해서 학살당한 것인지까지는 분명치 않습니다만, 결국 제주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4.3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국가의 폭력에 의한 희생이었다는 게 공식화되기 전에 누구도 4.3이란 말을 입에 올리는 게 금기시되었던 시절이라, 자세한 내막들을 전해들을 수 없었습니다.
제주4.3평화박물관에도 있고, 책에도 실려 있는 그 당시 제주도에 살던 사람들의 모습들, 죽지는 않았으되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는 분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핑~돕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총에 맞아 턱이 날아간 이후로 평생 얼굴을 천으로 두르고 사셨다는 '무명천 할머니'의 모습에서 전 제 할머니와 외할머니, 당신의 할머니,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마도 제 주변에서 흔히 보아오던 분들의 모습이 그대로 겹쳐지기 때문인 듯합니다. 제가 직접 겪지 않았지만, 4.3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평화의 섬이니 세계유산이니, 제주를 부르는 수 많은 미사여구들 이면에 국가에 의해서 희생되어야 했던 수 많은 이들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봄꽃의 향기를 맡으며 걸어가는 올렛길 곳곳에 불과 몇 십 년 전 국가에 의해 자행된 학살된 역사가 흐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주도를 동서남북으로 갈라놓은 채 섬 곳곳을 거미줄처럼 연결해 놓은 도로를 달리면서, 그 아래 묻힌 희생자들의 비명소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게 제주도에 첫 발을 들이는 이들이 가져야 할 '의무'이고, 4.3과 제주도 사람들을 이해하는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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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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