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리뷰

참좋은날
- 작성일
- 2016.12.14
창에는 황야의 이리가 산다
- 글쓴이
- 민병일 저
문학판
창과 미술이 있는 인문학 산책 [창에는 황야의 이리가 산다]
책이 무척 아름답다.
책을 보고 감탄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 단단하고 무게감 있는 푸른 빛의 책은
몇 장 들추어보자마자 곧바로 내 책장의 한가운데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진중한 빛을 뿜어낸다.
낯선 저자의 낯선 언어에 잠시 주눅들었지만 몇 장 넘기지 않아 만난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라는 곡에 눈길이 머물렀다.
곡을 찾아 들으며 책장을 넘기니 책이 발산하던 시크한 매력이 금세 누그러지며 겨울눈 덮인 나무 한 그루를 떠올리게 한다.
책의 곳곳에 소개되는 곡들을 배경음악 삼아 읽으리라 다짐하게 된다.
돌연히 창이 저절로 열린다. 나는 커다란 공포 속에서 창 앞의 호두나무 곁에 앉아 있는 하얀 늑대 여러 마리를 응시한다. 거기에 예닐곱 마리의 늑대가 있다.-자크 랑시에르의 <창을 통한 진리> 중에서, 6
매체미학에서 기술은 예술의 확장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다루어지는 것처럼, 창을 하나의 매개물로 하여, 내 안의 이리를 만나는 것을 예술로 상정했다. 자기의 심연에 사는 낯선 이리를 만나는 것만큼 신나는 예술이 어디 있으랴.-7
심미적으로 "무형의 빛"을 간직한 창, 심미적인 메타포를 간직한 창을 찾는 과정이 이 책에 실려 있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창의 미학을 함께 발견해 나가는 과정은 뜻밖에도 잔잔한 기쁨을 선사한다.
열린 창, 닫힌 창, 안팎을 연결시키고 때론 단절시키는 창.
각각의 장소에서 맞닥뜨린 창은 대부분 신선한 기운을 소통시키고 많은 것을 불러 일으킨다.
시인의 시구, 화가의 그림, 음악의 선율...
이 모든 것이 이 책 안에서 자연스레 어우러져 황홀한 조화로움을 맛보게 한다.
저자는 많은 곳을 여행하였다.
바이칼 호숫가 리스트뱐카 마을,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생가, 몽골 초원, 꽃분홍 스카프를 머리에 한 시베리아 할머니의 집, 지리산 자락의 240년 된 집 운조루, 그리움 물들면 찾아가는 집 최순우 옛집...
그 곳은 우리에게 창의 이미지로 변환되어 기억되며 동시에 시인의 시구, 화가의 그림, 음악의 선율과 함께 갈무리된다.
여행을 다녀와서도 아무 것도 남는 것 없이 소멸되고 마는 기억이란 얼마나 허무한가.
내가 다녀온 곳이 아니지만 이렇게 선명한 느낌으로 기억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읽고 또 읽을 수 있다.
기쁜 마음으로 책 속 한 줄 한 줄을 음미하고 또 곱씹으리라.
저자는 리스트반캬에 와서야 샤갈의 그림에 나오는 집과 나무 창의 아름다움을 실감했다고 한다.
그가 그림을 통해 꾼 꿈의 실체가 현실을 초월하려는 게 아니라, 현실의 이면에 존재하던 또 다른 현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이 곳에서의 창을 보는 순간 체호프의 단편<우수>도,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도, 샤갈의 화집도 모조리 소환되어 줄줄이 늘어선다. 러시아 민요 <마마>, 러시아 가곡 <붉은 사라판> 등등 러시아에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이 리스트반캬의 창을 통해 되살아난다.
무릇 여행이란 이렇게 오감을 자극하면서 마음 속 새로운 지평을 열어 신세계를 맛볼 수 있을 때
그 묘미가 발현되는 게 아닐까.
부엌에서 뒤란으로 통하는 창문.
깨진 유리창에 덧바른 창호지 조각은 삶을 수선하는 헝겊 같다. 창 너머 뒤란에서 어머니는 겨울을 뚫고 쑥쑥 올라온 머위 대를 따고 계실 것이다. -423
저자가 류 씨 댁 한옥에서 80년 전에 지어진 모습 그대로의 부엌을 보고 느낀 소회도 또한 옛추억을 고스란히 되살려낸다.
21세기에도 자신의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와 똑같이 부엌을 보존해 둔 남정네가 있었다며 저자는 놀람을 표한다. 작은 뒤주 안에 콩이나 팥 대신 <소월시집>이나 <괴에테 시선집>등이 들어 있는 집.
부엌 뒤주 위에 난 창. 창의 한지를 통과한 햇빛은 발이 가늘고 촘촘한 체로 걸러낸 고운 가루처럼 은은한 빛을 띠고 있었다며 부엌 주인은 한복을 차려입은 대갓집 마나님이나 부스스한 파마머리에 조금은 촌스러운 몸뻬를 입은 아줌마가 아니라,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에 나오는 조선 여인을 닮았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놀라운 심미안을 가진 저자가 마음 속 이리를 찾아나서는 길에 동행하게 된 것이 이렇게 기쁠 수가 없다.
마음의 눈이 함께 밝아지는 느낌이다.
음악과 차가 있는 조용한 카페에서 심신을 편안하게 놓아둔 채 읽고 또 읽어대고 싶은 책이다.
문득 눈 돌리면 만나게 되는 바로 그 곳의 창이 저자가 소개하는 곳으로의 여행을 도와줄 것만 같다.
그 창으로 손을 뻗기만 하면...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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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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