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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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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글쓴이
김영민 저
어크로스
평균
별점9.6 (37)
검혼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수많은 선택지에서 최선의 결과를 추구하지만, 마주한 현실은 녹록치 않다. 삶은 고통스럽고, 밥벌이는 지루하다. 매일 같이 지옥으로 출근해야 하며,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내 몸 편히 누울 자리 하나 얻는 일조차도 쉽지 않다. 어쩌면 밥벌이의 지루함을 느끼고, 누워 쉴 집이 있는 것 자체가 행복인지도 모르는 세상이다. 살아가기 위한 모든 행동 자체, 모든 선택지가 고통을 요구한다. 산다는 것은 고단함을 집요하게 견디는 일(p.10)”이다. 포기하고 싶고 그만두고 싶지만, 질긴 목숨. 그것도 쉽지 않다. 삶은 계속된다. 선택을 강요한다.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한 정치는 계속된다. 인간은 타인과 함께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 혹은 타인과 더불어 살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기 때문이다. 인생이 그렇듯, 정치 역시 선택의 연속이다. 그 선택이 우리를 구속한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수많은 선택들은 정치에 제약을 받는다. 밥벌이의 수단, 몸을 뉘일 장소를 고르는 일에 있어서 정치의 힘은 어마어마하다. 아무리 무관심하고 염증을 느껴도 정치를 벗어날 수 없다. 살면서 하는 모든 선택에 정치가 관여한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p.12)”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현실이 고단한 만큼 정치 역시 얼마나 비루한가. 정치는 고단한 우리의 삶을 나아지기는커녕 우리를 괴롭게 한다. 정치인들의 선택은 현실과 괴리되어 삶을 더 고단케 한다. 차악이라 믿었던 선택은 최악처럼 보인다. 정치적 동물이 정치를 불신하게 한다. 냉소, 불신, 무관심, 생각 없음은 무책임, 부패, 방종, 표퓰리즘을 낳는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 수준에 맞는 정치를 가지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우리의 삶을 더 고단하게 하고, 우리의 선택을 제한한다.



  그렇다면 어쩌란 말인가. 김영민 교수는 말한다. “nevertheless”, “그럼에도 불구하고고단한 삶을 이어갈 희망은 어디서 나오는가. 희망이라 이름 붙이기도 민망한, 최소한 삶을 견딜 수 있는 끈은 어디에 있는가. 지옥 같은 현실에 있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현실을 충분히 인식한 채 정치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반성된 삶과 숙고된 정치를 위해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심이 정치로 향해야만 한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의 문제이며, 정치는 그에 대한 응답이다.(p.14)” 책의 제목은 여기서 비롯한다. 우리의 삶과 선택은 하나의 문제이며, 그 문제를 푸는 것은 결국 정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통이 마음의 잔을 넘재앙신이 된 사람들이 도처에 있(p.197)”, 만병통치약을 파는 이들(p.205)”이 현실을 주도한다. 과거의 축복이었던 자식은 도저히 감당 못 할 자식을 많이 두게 되리라는(p.235)”이 저주로 변했고, 책임자는 위험과 책임을 하청 주는 데 열심(p.282)”이다. 산업화의 서사를 넘어 민주화의 서사마저 붕괴한 채 길을 잃었다. 대한민국은 소수의 부자와 가난한 노인들이 불안하게 동거하는 소진된 사회가 목전에 있다.(p.315)” 이 지랄 맞은 세상을 어떻게 하면 답 없는 정치를 통해 바꿀 수 있을까. 늘 그렇듯 김영민 교수는 답을 주지 않는다.



 



생각은 침잠이 아니라 모험이며, 그것이야말로 저열함에서 도약할 수 있는 인간의 특권이다. 타인의 수단으로 동원되기를 거부하고, 자극에 단순히 반응하는 일을 넘어, 타성에 젖지 않은 채, 생각의 모험에 기꺼이 뛰어든 사람들이 만드는 터전이 바로 생각의 공화국이다. p.330



 



  “더러운 세속의 정치를 외면하고 싶겠지만, 복수의 인간이 사는 곳에서 정치는 불가피하다. 정치를 외면하는 것은 세속의 삶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쿠데타는 하루아침에 일어나도 세속의 정치는 하루아침에 개선되지 않는다. 많은 퇴보와 갈지자걸음을 거쳐 아주 조금씩 전진한다. 그 느리고 비천한 과정(p.303)”을 미나리 마냥 버텨야 한다.(p.206) 그리고 생각의 모험을 해야 한다. 지루한 삶이 계속되어야 하듯, 정치 역시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의 특권을 멈춰서는 안 된다. 그것은 직무유기다. 고통스러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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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가 폴 비릴리오는 비행기의 발명은 추락의 발명이며 선박의 발명은 난파의 발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인생의 발명은 고단함의 발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행기나 선박의 운행에서 사고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삶의 운행에서 고단함의 제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삶이 고단하다는 것은 상당부분 동어 반복이다. 산다는 것은 고단함을 집요하게 견디는 일이다. p.10



오늘보다 좋은 내일, 내일보다 좋은 모레, 매일매일 행복한 나. 제멋대로 미래를 꿈꾸는 것도 미망에 홀리는 것이다. 이것이 정도를 넘으면 죄를 짓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꿈이 결락되어 있는 인간은 무력한 사람이 된다. 인생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 기리노 나쓰오 p.11



인간은 타인과 함께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 혹은 타인과 더불어 살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다. 즉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그러나 타인과 함께하는 일이 어디 쉬운가. p.12



우리는 혼자 있을 수 없었기에 벌을 받는 것이다.” - 스가 아쓰코 p.12



나는 삶이나 정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혼한 배우자와 다시 결합하기로 결심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인생이 고단하고 허(p.13)망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살아내기로 결심한다. 어떤 사람은 정치의 세계가 협잡과 음모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거의 유혹을 떨치고 정치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들의 인생이나 정치는 그러한 자각이 없는 인생이나 정치와는 다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사는 인생이나 마냥 권력을 쥐려는 정치가 아니라 반성된 삶과 숙고된 정치다.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정치적 동물의 길>은 바로 그러한 삶과 정치에로 초청하는 작은 손짓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의 문제이며, 정치는 그에 대한 응답이다. p.14



인간이 그저 행복해지는 게 불가능할 때 정치가 시작된다.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이며, 그 문제를 다루는 데 정치가 있다. p.17



수십 년에 걸친 한국의 민주화 과정이 남긴 성취 중의 하나는 시민에 대한 물리적 탄압의 정도와 가능성이 그전 시대에 비해 현저히 줄었다는 것이다. 질서를 유지하겠다며 존재했던 폭(p.36)압이 꽤나 사라진 곳에 이제 무엇이 남았나 물어볼 때다. 폭압에 의존하지 않아도 삶에 필요한 질서를 창출하고 향유할 수 있을 때까지 민주화는 완성되지 않는다. 반드시 폭력을 동반하지 않더라도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적 상태를 일종의 자연 상태로 새삼 바라볼 필요가 있다. p.39



무릇 천하의 재앙 중에서 담백하게 욕심이 없는 상태보다 더 참담한 것은 없다.” - 연암 박지원 <명론> p.45



인간이 천사라면 정치처럼 피곤한 일은 필요 없을 것이다. 천사가 아닌 존재들이 어떻게든 견딜 만한 공존의 질서를 모색하고 유지하는 일이 바로 정치다. 무인도에 표류한 소년들에게 닥친 시련은 경제적 시련이기 이전에 정치적 시련이다. p.50



욕망과 목표가 있으면 권력은 존재하게 되어 있다. p.56



권위는 권력의 가장 말랑말랑한 형태다. 권위는 권력자가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 순간 발생한다. p.62



자신이 가진 힘 이상으로 상대가 두려워하는 것이야말로 권력자가 원하는 바이며, 그렇게 정도 이상으로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권력의 작동이다. 권력은 약자로 하여금 권력의 증강 현신을 체험하게 한다. p.64



정치는 파워를 지향하고, 파워는 소프트 파워를 지향하고, 소프트 파워는 생각 없음(p.71)을 지향한다. 진짜 소프트 파워는 먹음직스러운 소프트 아이스크림과 같다. 저걸 왜 먹어야 하는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 혹은 생각할 틈이 없다. 당신은 이미 먹고 있으니까! 다 먹고 나서 제정신이 돌아온 뒤에야 자신이 왜 먹을 수밖에 없었는지 비로소 자신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정당화는 소프트 아이스크림 제조업체의 몫이 아니라 소비자의 몫이다. 마치 궁극의 정치적 정당화가 권력자가 아니라 추종자의 몫인 것처럼. p.72



정치에 참여하지 않으면 인간은 타고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없고, 결과적으로 끝내 온전해지지 않는다. 마음에는 언제나 공터가 남아 정치가 들어오길 기다린다. 비계가 있어야 삼겹살이 완전해지듯, 정치가 있어야 삶이 완전해진다. p.100



만약 그대가 진정 살기 원한다면/하루하루 새로이 힘을 내어/미친 듯 날뛰는 삶, 거칠게 콧김을 내뿜는 삶/굴복당하지 않으려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 기 샤를 크로 p.101



저항 세력이 권력자가 되어 개혁의 예리함을 잃어갈 때는 곧 정치적 냉소가 자라나기 쉬운 시기이기도 하다. p.103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서도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좋은 길을 얻는 것은 위대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 권적 <지리산수정사기> p.106



근대 정치 이론의 초석을 놓은 토머스 홉스는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그처럼 한갓 사적 인간이 정치적 존재로 변신하는 과정에 주목했다. ... 그들은 죽지 못해서 변신하는 것이다. 변신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으므로. “지속되는 두려움과 난폭한 죽음의 위협으로 인해 인생이 고독하고, 열악하고, 고약하고, 잔인하고, 짧아질까 봐변신하는 것이다.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괴롭기(p.120) 때문에 정치적 존재로 변신하는 것이다. 그 변신 덕분에 인간은 비로소 삶을 견딜 수 있게 된다. 투표는 인간이 정치적 인간으로 변신했던 그 위대한 상상을 되살리는 축제다. p.121



사람들이 재현을 통해 원하는 것이 진실보다는 자기 욕망의 실현이라면 이미지를 볼 때 상상해야 할 것은 재현 대상이 된 원본이 아니라 그 재현물에 묻은 욕망이다. 원본은 여기 없다. p.129



어느 것에도 몰입하지 않기 때문에 거리를 둘 수 있고, 모든 일에 거리를 두기에 전체를 볼 수 있다. / 몰입하지 않는 이가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 그는 상황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소외된다. 모두 기뻐 날뛸 때 뒤로 물러나 그 장면을 찍어야 하는 촬영기사처럼, 그는 상황으로부터 소외되어(p.135)있다. 그는 어떤 상황에도 몰입하지 않기 때문에 몰입이 주는 쾌감을 누릴 수 없다. 그는 모든 야단법석에 함께하되 그 일부가 되지 않고 늘 거리를 두면서 상황 전체를 생각한다. 게임에 참여하되 게임의 룰과 시작과 끝을 생각한다. 그는 행동하는 자라기보다는 생각하는 자다. (p.136) ... 몰입의 쾌감 대신 아득한 피로와 슬픔이 있다. 그것이 전체를 생각하는 리더가 치러야 하는 대가다. p.137



갱스터는 영화에서 협박을 가하고, 총을 쏘고, 목을 조르고, 피 묻은 손을 씻는다. 그리하여 세상은 강자들의 잔치 같아 보이지만 사실 갱스터는 약자다. 갱스터의 세계란 신대륙에 뒤늦게 건너온 약자들이 합법적인 경로를 찾지 못했을 때 도달하는 곳이다. 아직 기력이 남아 있는 누군가가 그저 약자로만 찌그러져 있지 않겠다는 야심을 가질 때, 그러나 합법적인 통(p.191)로로는 도저히 권력에 접근하기 어려울 때, 갱스터의 길을 가게 된다. / 사회의 진정한 강자는 갱스터처럼 명시적인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p.192



누구나 역치 이상의 자극을 받으면 돌진하고, 고통이 마음의 잔을 넘치면 재앙신이 된다. 신은 도처에 있다. p.197



삶에 아이러니가 존재한다는 말은 우리가 우리 행동의 결과를 다 통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고,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 발생한다.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기피하고, 쉽게 단정하는 이들을 의심하며, 만병통치약을 파는 이들을 경계하고, 쉽게 확신하는 이들을 불신한다. p.205



아이러니로 가득한 이 삶을 통제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영화 <미나리>버티라고 말한다. 미나리는 버티는 식물의 대명사다. 실로, 삶에 아이러니가 있다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다. 아이러니가 있기에 희망도 있다. 생각하지 못했던 불행이 있는 만큼 예상치 못했던 선물도 있다. 아칸소주 시골로 이사 왔을 때, 그 환경 변화가 손자의 심장 상태를 개선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나쁜 일만 있는 게 삶이라면 삶은 예측 가능하리라. 삶은 예측 가능하지 않기에, 좋은 일도 있다. 삶의 아이러니는 좌절할 이유도 되지만 버틸 이유도 된다. p.206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p.209



아이를 낳지 않는 일이란 이와 같은 집요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진 끝에 내린 주체적 선택일 가능성이 높다. 한때 그런 선택이 원천 봉쇄되던 시절이 있었다. 과거에는 자식이 없으면 안정된 노후를 기대할 수 없고, 친족집단이 없으면 사회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몰렸으며, 자신의 유한한 삶에 영생의 환상을 부여할 방법이 딱히(p.234) 없었다. 그러한 시절에 자식이 없으리라(무후 無後)는 것은 최대의 저주가 된다. ... 이제 최대의 저주는 자식이 없을 것이라는 예언이 아니라 도저히 감당 못 할 자식을 많이 두게 되리라는 예언이다. p.235



더 엄혹한 시절에도 인구는 이처럼 빠르게 줄지 않았는데, 왜 하필 이 시대에 이토록 빨리 인구가 감소하고 있는가? 이제 하나의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인간이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인구가 줄고 있다. 국가의 관점에서 인구 감소는 문제일지 몰라도 재생산을 거부하는 개개인에게 인구 감소는 문제라기 보다는 나름대로 문제에 대처한 결과다. 사람에 따라서 출산 거부는 삶의 난관에 대한 하나의 주체적인 해결책일 수 있다. 그러한 각성에 이른 인간은 1억을 빌려준다고 해서 낳지 않으려던 애를 갑자기 낳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p.237



정치학자 유홍림에 따르면, “혼란을 공동체 의식에 호소함으로써 극복하려는 시도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특히 약자는 계약서의 조항보다 강자의 가변적인 선의에 의존하게 된다. p.254



단일 원인을 찾아내어 단죄하려는 유혹은 강렬하다. 그러나 분명하고 단순한 원인을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다. 아니, 그런 것은 없다. 어떤 문제가 오래 잔존해왔다는 것은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다른 많은 것들이 존(p.280)재하기 때문에 그 원인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세월호 비극의 뿌리가 한국 사회 전체에 산포되어 있는 것처럼, 많은 문제의 원인은 대개 해당 사회 전체에 퍼져 있다. p.281



조직의 장이 되겠다는 사람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까(p.281)지 책임지겠다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조직의 장이 된 사람은 책임을 지기보다는 보신에 힘쓰는 경우가 많다. ... 그래서 위험과 책임을 하청 주는 데 열심이다. 스스로 판단할 문제를 부하에게 미루고, 책임 소재를 흐리기 위해 위원회를 증설한다. p.282



한국 현대사에서 운동권은 하비 덴트였다. p.287



정치 공동체의 유지와 지속에 필수적인 공적인 가치와 서사가 부재하는 한, 그에 기초한 의소소통 능력과 갈등 해소 능력이 고양되지 않는 한, 자연 상태로부터의 탈피는 요원하다. p.291



정치 공동체는 곧 기억의 공동체라는데,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어떤 서사 속에서 살아갈 것인가. p.294



나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연민이 아니라,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 바치는 아부가 아니라, 나에게도 있고 타인에게도 있는 외로움이 있어 우리는 작은 원을 그렸다. ... 소극적으로 사귀었고 말없이 헤어졌지만, 나는 이것이 우정이 아니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한정원 <시와 산책> p.298



세계를 변혁할 역량이 없을 때는 치장을 통해 환상이라도 가져보는 것이 인간이다. p.302



더러운 세속의 정치를 외면하고 싶겠지만, 복수의 인간이 사는 곳에서 정치는 불가피하다. 정치를 외면하는 것은 세속의 삶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쿠데타는 하루아침에 일어나도 세속의 정치는 하루아침에 개선되지 않는다. 많은 퇴보와 갈지자걸음을 거쳐 아주 조금씩 전진한다. 그 느리고 비천한 과정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그 답답한 과정을 견디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예식을 통해 꿈을 꾸는 일이다. 각자의 이해관계가 격렬히 충돌하는 지점에 심미적 형식을 부여하여 자칫 비천해질 수 있는 정치 과정을 고양하는 것이다. p.303



그 경제 대국이 도달한 지점은 일종의 번 아웃(burn out) 상태다. 사람들은 지쳤고, 싫은 것은 도대체 더 할 수 없다. 현 지점에 오기까지 정말 말 그대로 미치거나 죽을 뻔했기 때문이다. 이제 종신고용을 거부하는 직장의 소모품으로 살다가 부실한 사회 안전망 속으로 버려지고 싶지 않다. 개처럼 일하며 인생을 살다가 사라진 전 세대처럼 되고 싶은 생각이 이제 없다. 다수를 참고 견디게 했던 비약적인 경제성장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산업화의 성장 동력은 고갈되어가고, 민주화의 정치적 상징 자원은 퇴색하고 있으며, 모든 권위는 빠르게 몰락 중이고, 그 몰락을 틈타 사이비 역사 서술이 창궐한다. 소수의 부자와 가난한 노인들이 불안하게 동거하는 소진된 사회가 목전에 있다. p.315



시인 신해욱의 표현을 빌리면, 이 사회에 태어나 살아간다는 것은 곧 수동태 문장으로 된 자서전을 쓰는 일이다. 수동태 문장으로 하루에 한 줄씩 삶을 당하는일이다. “타성에 젖는 맹렬한 쾌락에 사로잡히지 않고 능동태 문장으로 된 자서전을 쓸 때 새로운 공동체는 시작될 것이다. 그 새로운 공동체의 사회계약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이 21세기의 새로운 10년을 맞는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다. 이 질문에는 벗(p.321)어나고 싶은 현재가 주는 참담함이 있다. 우리가 건축한 현대는 부실 건물이었다. 허겁지겁 베껴온 제도들은 헛돌고 있다. 시민이 대거 출현하는 데 마침내 실패했다. 자신들이 추구할 공동선을 정교하게 정의하는 데 기어이 실패했다. 우리의 성취는 꼭 성취가 아니었다. 미국의 SF 소설가 할런 엘리슨은 자신의 작품에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는 제목을 붙인 바 있다. 우리는 대답할 입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p.323



중년이 되고서야 깨닫는다. 중년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 인생은 늘 위기였는데 그저 중년이 찾아왔을 뿐이라는 걸. 허울 좋은 선진국이 되고서야 깨닫는다. 사회는 아직 문제로 신음하고 있는데, 선진국이 갑자기 찾아왔을 뿐이라는 걸. “절대빈곤에서 출발, 30여 년간의(p.326) 피나는 노력을 통해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된 나라가 어떻게 헬조선이 아닐 수 있겠는가. ... 한국은 지옥불에도 무너지지 않은 그을린 가옥이며, 한국인은 지옥불을 견디고 기어이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바이러스 방역에 성공하는 것은 놀랍지 않다. 한국이 방역에 상대적으로 성공한 것은 선진국이어서가 아니라 헬조선이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인적, 물적 자원을 갈아 넣을 수 있는 곳. 원하면 통신사 기지국을 통해 시민의 동선을 샅샅이 복구할 수 있는 곳. 와불처럼 달관하는 대신, 보란 듯이 살아남고야 말겠다는 결기를 가지고 너나 할 것 없이 추노꾼처럼 전력 질주하는 곳. 이곳에 안온한 선진국형 게으름과 권태가 들어설 자리(p.327)는 없다. ... 헬조선에는 독한 역동성이 넘친다. 사람들은 여전히 밥을 사냥하듯 먹고, 자신이 굴릴 돌을 앞장서 고르는 시시포스의 심정으로 직장을 고른다. 각자도생에 분투하는 동안 삶은 빨리 지나가고, 영혼은 간헐적으로나 존재한다. p.328



올리버 색스는 죽음을 앞두고 <나의 삶>이라는 글을 썼다. ...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서 이 아름다운 행성에 살 수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대단한 특권이며 모험이었다.” 실로, 생각은 침잠이 아니라 모험이며, 그것이야말로 저열함에서 도약할 수 있는 인간의 특권이다. 타인의 수단으로 동원되기를 거부하고, 자극에 단순히 반응하는 일을 넘어, 타성에 젖지 않은 채, 생각의 모험에 기꺼이 뛰어든 사람들이 만드는 터전이 바로 생각의 공화국이다.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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