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녀가 본 공연

마녀
- 공개여부
- 작성일
- 2007.5.31

1. 공공 시스터즈 모처럼 나들이하다
여동생과 이처럼 오래 있어본 것은 거의 8년만이다. 나의 언니같은 여동생은 태어날 때부터 언니로 태어났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그녀는 늘 나보다 성숙했던 것 같다. 말수가 적은 대신 뭐든 앞질러 배우고, 사물의 본령을 꿰뚫어보는 신비한 능력이 있었으니까.... 대신 얼렁뚱땅하게 일처리를 하는 나는 그 어느 것 하나에서 나의 여동생을 뛰어 넘을 수가 없었다.
인디언 인형처럼 흑단같은 검은 머리칼에 까무잡잡한 피부, 오똑한 코, 초롱한 눈망울의 어린 꼬마 여자애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참 많았다. 그런 그녀는 천상의 목소리까지 갖고 태어났기에, 주위의 칭찬과 함께 김** 성악가의 후원을 받으며 어린 나이부터 성악을 공부할 행운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신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분명한 사명을 내려준 사람한테는 가혹한 시련을 주기도 하나 보다. 내 여동생이 그랬었다. 12살 나이에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어, 가족 모두는 독실한 신앙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 그녀에게 내려진 혹독한 선고는 다행스럽게도 '불치'가 아닌 '난치'로 조정되었지만, 그 대신 여동생은 꾀꼬리같았던 음성을 신에게 돌려드려야만 했다. 병원을 제 집 드나들 듯 아팠던 여동생은 더는 성악가를 꿈꿀 수 없게 되었지만, 비상한 머리와 천부적인 음악성이 있었기에 과감하게 작곡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그 때 그녀는 고작 14살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죽은이들의 영혼을 본 적이 있다는 그녀이기에 그녀에게서는 신비감이 돈다. 사실 언니지만 함부러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카리스마가 그녀를 늘 지켜주기에 나는 그녀의 말 하나면 꾸벅 죽는다. 그런 그녀는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아픔을 승화할 영역을 확실하게 확보하였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시끄럽게 굴 필요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녀는 호들갑을 떠는 나에 비해 늘 젊쟎다.
8년 전인가 아픈 몸을 끌고 독일로 건너간 그녀는 그 곳에서 자신의 음악혼을 성숙시키고자 부단이도 애를 썼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유독 예술적인 형제들 둔 탓에(막내는 조각을 전공했다) 그녀에게 할당할 몫 역시 많지는 않았다. 다행히 그 곳에서 좋은 의사를 만나게 된 그녀는 신비스러운 명약인 나의 골수를 두 차례에 걸쳐 이식받게 되었고, 그로써 우리는 쌍둥이가 되었다.
10대, 20대의 그녀는 거의 말이 없었다. 어쩌며 집에서만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아픔을 지켜보는 가족들 앞에서는 조용히 문을 닫고 자신의 방에 갇혀 지내는 것이 식구들로 하여금 아픔을 망각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조숙한 배려를 했던 것인지도배려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그래서 더 속상했지만) 하지만, 그녀의 입담에 재미있어 하는 동문들의 후일담을 듣고나서야 비로서, 그녀의 재치가 집 밖에서는 반짝임을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도 그녀로부터 그런 은총을 입고도 싶었다. 그녀가 말문을 열게 된 것은 아무래도 우리가 쌍둥이가 된 이후, 그녀의 전신을 돌고 있을 내 피의 영향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되었거나, 전과는 달리 지금의 그녀는 내 앞에서도 유쾌해졌다.
우리가 간다. 동동 브라더스, 기다려라.

동동 브라더스 공연을 기다리며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어." 그녀는 정말 오랫만에 광화문에 왔다. 내가 손가락으로 교보빌딩을 가리키며, "저기봐. 내가 일했던 곳"이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이제 감이 오네"라고 말한다. 우리는 광화문 뒷 쪽에서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응당 변해버린 골목길에서 낯선 향수를 느꼈을게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우리는 7시 무렵 세종문화회관에 들어섰다.
간단한 샌드위치로 요기를 하면서 그녀가 말한다. "그런데, 세종문화회관은 내부 음향시설을 보수했다고 들었는데, 어떄?" "아직도 그렇지 뭐. 박정권때 행사장으로 만든 곳이라 음악 전용홀과는 성격이 다르지." " 예전에는 1/100초 늦게 소리가 전달되는 심각한 문제가 있던 곳이야." 전문가답게 그녀가 덧붙였다. "그랬어? 난 그런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소리의 차폐현상이 생기는 것 같기는 해. 내가 아는 지인들중 몇몇은 아예 세종문화회관에서 하는 공연에는 가지 않기도 하거든." 우리는 세종문화회관의 음향적인 문제에서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이 국내를 방문하는 진정한 이유로 이야기를 옮기며, 서둘러 3층까지 올라갔다.
공연이 시작되기 10분 전, 세종은 70년대 당시 거금 6억원을 들여 제작했다는 파이프오르간의 소리로 만든 시작알림음을 울려댔다. 제일 싼 B석에 앉아 우리는 공연장을 둘러보았다. 손가락으로 음향반사판을 가르키며 그녀가 다소 전문적인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그저 알아듯는 척 끄덕거렸다. 문득 10년 전 이 곳에서 그녀와 같은 설명을 해 준 사람과 어정쩡한 데이트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카네기 멜론 대학에서 음향공학 박사과정이던 그 사람은 물 만난 물고기마냥 신이 나서 떠들었다. 미안하게도 나는 그날 공연을 끝으로 매몰차게 그를 팽겨쳐버렸지만....
동민이형, 화이팅

유감스럽게도 서울시향의 협연으로 예정되어 있던 공연이 서울 시향의 신년음악회로 취소되고 서울 페스티발 오케스트라가 대신 하게 되었다는 공지문이 붙었다. 그렇지만, 지난번 김대진씨의 지휘와 함께 했던 당 타이 손과의 협연을 생각할 때 그다지 나쁜 협연도 아니였기에 나는 은근히 실망할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피아니스트 당 타이 손과의 완벽한 일치, 몰입에의 황홀경을 보여준 그들의 연주는 나름대로 일류급의 연주자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오케스트라의 기량을 유감없이 선보여주지 않았던가!
'아무쪼록 멋진 공연을 되기를' 진휘자가 무대에 올라온다. 물론 김대진씨는 아니다. 이경욱(맞나)씨라는 피아니스트 출신의 지휘자란다. 아무렴 어떤가? 연주만 좋으면 되지.... 그런데 피아노가 지휘자의 뒷쪽에 위치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봐서 뭔가 그들만의 오프닝 연주가 있을 듯 했다. 이윽고 모짜르트의 마술피리의 전주곡이 시작되었다. 가볍게 몸을 푸는 그들의 연주를 듣고는 있었지만 솔직히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어서 빨리 동민군이 나와주었으면.'
조금 흐느적거리는 품새로 동민군이 무대로 올라왔고, 피아노는 드디어 지휘자의 뒷쪽에 자리를 잡았다. 야마하 피아노. 동민은 쇼팽 콩쿨에서도 야마하 피아노를 연주했다(사진을 보십시오) 그에게는 묵직한 스타인웨이 보다는 야마하의 맑고 경쾌한 소리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이번 연주를 다시 듣고 나서이지만, 하여간 그는 야마하의 이미지처럼 쇼팽을 연주한다.
쇼팽 콩쿠르의 결선 마지막에서 동민군이 보여준 곡이 바로 오늘 연주하는 쇼팽의 피아노협주곡 1번이었다. 그때 동민군의 곡해석과 유려한 터치, 그리고 투명한 소리에 나는 전율을 느끼며 바르샤바에서 보내오는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 그 때 내 옆에 있던 앗추도 그의 음색과 천재적인 음악성에 기립의 박수를 보내지 않았던가? 따아놓은 당상이라고 우리는 동민과 동혁 형제 중 1등 후보가 있다고 안심하며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결과는 폴란드인 라팔의 우승.... 그리고 2등도 없이 공동 3위.... 피이. 주체 측의 농간이면서도 동양연주자들에 대한 서구인들의 경계심이 발동한 탓이다. 우수한 동양 연주자들이 속속 세계 무대를 향해 접근해가자 서양음악의 주인이라고 자부하는 그네들이 동양 연주자들의 실력에 위기의식을 느꼈을까? 하여간 누가 봐도 명백한 텃새를 부렸다.
동민씨가 1악장을 연주하기 시작했지만, 어쩐지 미스터치가 귀에 거슬린다.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님 감기기운이라도 있나?' 나는 내가 그의 큰 누나라도 된 것처럼 좌불안석이었다. 피아니스트가 혼신을 다해 연주하지 않으면 오케스트라도 무너져버린다. 아직 단련되어 있지 않은 오케스트라이거나 지휘자일 때는 여지없이 무너져내린 모습이 고스란히 관객들에게도 전달되기 마련이다. 아, 약 35분간의 긴장이여!
동민군의 연주는 지난 쇼팽 콩쿠르에서 보여주었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어쩐지 스스로 몰입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스스로의 음악에서 유리되어 자신의 음악을 관망하는 듯한 자세인 것 같았다. 함께 연주하는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당 타이 손과의 협연 때만 못했기에, 듣고 있는 나 역시 어떤 거리감이 느껴졌다.
동민군 자신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어설프게 관객을 향해 인사를 한다. 그러나 거의 모든 좌석을 다 매운 그의 팬들은 몇 차레의 커튼 콜로 그를 무대에 다시 불러냈고, 동민군은 이번에는 녹턴 작품번호 48번중 1을 들려주었다.
겨울 호수에서 투명하게 반짝이는 햇살처럼 쓸쓸한 여운이 느껴지는 그의 연주는 훌륭했다. 역시 그는 이지적이면서도 감성적이다. 그런데 왠걸....나는 집어내지 못했지만, 여동생이 말한다. "왼손 코드를 한 번 헛짚으면서 삐그덕 거렸다고, 다행스럽게도 노련하게 다음 패시지로 연결되었지만, 전문연주가의 연주에서는 나오지 말아야할 귀에 거슬리는 실수였노라고." 이래서 전문가들은 무섭다. 평론가들은 더 무섭지만.
형만한 아우 없다. 이거 맞는 말이예요?

성큼 성큼 씩씩하게 걸어나오는 동생, 동혁군.... 이번에 동혁군이 앉은 곳 앞에는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놓여있다. 쇼팽의 피아노협주곡 2번, 협주곡 1번보다 앞서 발표된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시작된다. 2번의 1악장이 주는 음산한 분위기는 감정 과도의 피아노 협주곡 1번 보다 차분하지만, 이 곡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듣다보면 오히려 1번보다 더 멜랑꼬리하다는 것에 사람들이 공감하는 듯 하다. 지난번 당 타이 손 연주 때에 동행했던 친구 역시 2번이 더 좋다고 했더 말이나 어쩌다 음악을 듣는 아버지도 2번이 1번 보다는 더 심금을 울린다고 하신 말씀으로 미루어볼 때, 개인적인 편견이나 취향에 따른 편견이라기 보다는 쇼팽의 연주를 자주 듣는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발견될 수 있는 선호도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간, 동혁군은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들어와 꾸벅 인사를 한 것 만큼이나 당당하게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린다. 음의 강력을 조정하는 손가락, 건반을 떼는 손이 그리는 곡선, 피아니시모를 누르고 음의 잔음을 가능한대로 소거하기 위해 곧추세우는 허리, 자신의 그려가는 음선을 쫓아 그것을 머릿속에서 재현하는 듯한 얼굴의 표정,,,,아! 이것이야말로 내가 본 누군가의 표정과 닮아있다. 망아의 절정의 순간에서 쾌락과 고통으로 뒤범벅되어 신음하는 존재가 보여주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표정.... 그 순간 내 머릿 속에는 어떤 이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이윽고 아름답고 서정적인 2악장이 시작되었다. 피아노의 음이 깊이 있는 작은 소리로 세종홀을 가득 채울 때, 아무도 기침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동혁군이 만들어내는 음악에 빨려들어가 버린 듯 하다. 블랙홀 속의 정적, 시간도 멈춰버린 듯한 순간...... 내 눈에서 쪼르륵 눈물이 흘러내린다.
스케일이 많은 3악장에서 그의 연주는 유연성과 함께 강건한 힘이 느껴진다. 건반을 타고 오르내리는 손가락들의 정밀하고도 능수능란한 힘의 배치, 크리센도와 디크리센도의 절묘한 연결, 거기에다가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가는 카리스마까지, 동민군이 연주할 때 여유를 잃었던 지휘자도 뒤를 돌아보면 피아니스트 동혁과 눈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 오케스트라도 동혁군의 연주와 날숨과 들숨의 때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연주가 끝나고 동혁군이 지휘자와 악수를 나눌 때, 관객들은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앵콜을 요청했다. 그러나 무대 뒤로 가서 형 동민군을 데리고 나온 동혁군은 인사로서 관객의 성원에 보답하기를 몇 차례할 뿐, 앵콜곡을 연주하지는 않았다.
많이 아쉽긴 했지만, 오히려 그런 당당한 모습이 그의 자존심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어차피 그의 독주회가 1월 15일 예술의 전당에서 있다고 하니, 그 때 다시 그 와 만날 수 있지 않은가? (아래 사진, 동혁군의 손)

공공 시스터즈의 외출은 여기서 끝날 수 없다
공공 시스터즈는 세종홀 옆에 있는 빈대떡집에 갔다. 음악을 듣는 일 역시 사실 대단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아시는지? 연주자는 협주곡 한 곡을 하고 나면 1Kg가 빠진다고 하지만, 연주자와 한 몸이 되기 위해 호흡을 고르는 관중의 입장에서도 모르긴 해도 아마 .5kg에 해당하는 에너지의 발산이 있었을 것이다. 다시 질량을 보존해야만 하기에, 우리 공공 시스터즈는 고기빈대떡과 해물빈대떡을 시켰다. 평소시에는 거의 마시지도 않는 막걸리와 함께.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같아?" 사실 작곡을 한다고는 하지만, 여동생은 국내 음악계에 대한 정보가 없다. 게다가 실제 전공자들은 음악 애호가에 비해 음악도 덜 듣고, 음악계의 소사에 대해 무관심하다. "1번이 형이고, 2번이 동생이네." 동생이 대답했다. "빙고. 그런데 왜 그런거 같아?" "대체로 맏이들이 그렇듯이 1번 동민은 어딘지 소심하고, 2번 동혁은 겁이 없쟎아." 그녀의 설명이다. "음악도 똑 같아. 성격이 고스란이 나오거든.... 연습과 기교는 어느 음악가에게 있어서 동등한 조건이야. 자기만의 색깔을 갖는 것이 중요한데, 동민은 아직 그런 면에서 자기 색을 갖고 있다고는 느껴지지 않네. 하긴 이번 연주 하나를 보고 판단하는 것은 정말 조심스럽긴 해. 왜냐하면, 컨디션이라는 것도 작용하고, 오케스트라가 어디냐도 중요하거든....게다가 어떤 곡을 연주하느냐는 연주자가 자기만의 색깔을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결정짓는 결정적 요소야." 여기까지는 나도 공감하는 알고 있는 이야기라 잠자코 동생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동생은 형과 달라. 흔히 말하는 무대 스타일이란 것이 있거든, 어떤 연주자들은 평상시 연습할 때보다 무대에 나가면 더 잘하는 사람도 있어. 내가 아닌 일본인 친구가 그렇거든. 그 친구는 물론 평소에도 굉장히 피아노를 잘 치기는 해. 특히 힘이 파괴적이라 쇼스타코비치 피아노협주곡이나 라흐마히노프 연주를 할 때보면 무섭기까지 하거든. 그런데 그 친구는 무대에만 올라가면 거의 신의 경지에 오른 듯 하거든. 바로 그런 점때문에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동혁군을 더 주목해 봐야 할 듯 싶어. 아마 더 국제무대에서 먼저 알려진 쪽은 동혁군이 아닐까?" 그건 맞는 이야기였다. 동혁은 96년 국제 청소년 쇼팽 콩쿠르 2위에 입상하면서, 비록 당시에는 형 동민에게 1위에 자리를 내주었다고는 하지만, 동혁의 손을 가르쳐 "황금의 손을 가졌다"며 선생 레프 나우모프는 극찬했다고 한다. 또한 동혁은 카리스마와 자신감도 함께 갖춘 연주자로서의 자신의 고집을 보여준 적도 있다. 퀸 엘리자벳스 콩쿠르에서의 편파 판정에 불복하고 3위 수상을 거부함으로써 전세계 클래식계에 경종을 울렸던 그였으니, 그는 세상의 부당함에 항의할 줄도 아는 겁없는 사내이기도 하다.
"동혁군이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를 들어봤으면 좋겠네." 뜬금없이 여동생은 베토벤을 들먹였다. "응?" 바보같이 얼큰하게 취한 내가 되물었다. "동혁군이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하면 딱 어울릴 것 같아. "그럼 동민이는 무슨 연주가 어울리겠니?" "동민이는 모짜르트를 연주해야할 것 같아. 아직 자기 색깔을 보여주지 않아서 제대로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모짜르트가 가장 무난하게 어울릴 듯 싶어. 그나저나 나도 피아노 치고 싶다. 선생들은 내가 피아노를 아주 잘 치는 줄 알고 있어. 내가 쇼팽 소나타들 연습을 좀 했는데, 사실 소나타도 어렵거든." "설마....에에...."내가 여동생을 믿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라면 능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자랑스러기까지 했다. " 좀 더 연습하면 피협도 가능할지도 몰라." "그런데 네가 동혁이가 더 주목을 받을 거라고 예견하는 이유가 뭐야?" 내 꺼벙한 질문에 그녀는 목소리를 깔며 답해 주었다. "음악이라고 해서 반드시 음악성만으로는 성공하는 것이 아냐. 무대를 사로잡을 수 있는 무대 매너와 '저 연주는 지금 누구의 연주이다'라고 관객이 알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한 자기 색깔을 가질 줄 아는 배짱과 자기만의 개성을 발휘할 용기도 필요한 것이거든...... 동혁군은 아까 무대에 올라왔을 때 시종일관 자신이 오케스트라도 이끌고 갔쟎아. 그런 것이 연주자들 향한 어떤 존경심을 불러오지, 그렇게만 되면 오케스트라도 그와 연주하는 것을 즐겁게 받아들이게 되거든,,,,그러면 결과적으로 당연히 초청이 쇄도해져. 아까보니까 EMI에서 적극적으로 그의 음반을 취입해주었다고 하던데." "응, 그런가 보더라. 아르헤리치 할머니가 적극적으로 밀어준다고 하더라." 나도 모르는 척 할 수 없어, 어쩌다 주워들은 정보 하나를 꺼내 대답했다. "황금 디아파송 상도 받았대." "그런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신뢰감이 있느냐 없느냐야.... 동혁군은 벌써부터 인터내셔널한 기질이 느껴져. 외국에서 자랐지?" 그녀가 쪽집개 귀신처럼 느껴졌다. "응, 어떻게 알았어? 러시아에서 자랐대. 어머니가 음악을 하나봐.... 지난번 KBS 인터뷰를 보니까, 연습할 때 엄마가 많이 들어주었다고 하더라." "세계적인 음악가는 음악가 집안에서 나와, 그건 대체로 학자집안에 학자가 나오고, 화가 집안에 화가 나오는 것과 비슷해. 재능이란 후천적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냐. H 언니 경우가 한 예야,,,, 손의 인대가 늘어질 정도로 매일 8시간씩 피아노 치지만, 결국 세계적 연주가는 못되고 대학에서 강의하쟎아. " 우리의 이야기는 다소 개인적인 이야기로 흘렀고, 나는 알딸딸하게 취한 상태에서 만원짜리 한 장을 더 내고 빈대떡집을 나오는 실수를 범했다. 그래도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공공 시스터즈,,,,우리도 뭔가 보여줄 날이 있을턴데.... ..화장실에서 손을 씼고 로션을 바르면서 여동생의 손금을 보았다. "야, 너 성공선이 분명하다. 그래 넌 성공할거야." "언니. 진짜 웃긴다. 하하." 앞으로 내 여동생이 해야할 일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지난 여름 그녀가 지상 10미터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음에도 큰 부상없이 살아있도록 해주신 하느님의 깊은 뜻은 달리 설명할 수 없다..... 그 때의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다들 기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기적같은 삶을 살아가야하는 여동생 마음 속의 상처들은 무엇이 치료해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녀에게는 음악이 바로 그 치료제가 될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가 이런 말을 했다지 않은가. "신비로운 것은 완성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과정이다."라고,,,, 신통방통한 내 여동생.... 아, 어제는 너무 행복했다. 우리 또 가자.
[쇼팽의 왈츠 34번 - 연주: 임동혁군, 2005년 쇼팽 콩쿠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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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