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밥벌이 요모조모
디오니소스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1.10.26
이제야 원고 마감을 쳤습니다. 유홍준 교수 인터뷰 글인데요.
역시 허겁지겁 정리하다보니 졸필이 되어버렸습니다. 마감을 훌쩍 넘기고,
뻔뻔하게 원고까지 졸렬하게 쓰다니... 일단은 완성했다는데 의의를 두고,
정신이 맑을 때 퇴고 작업을 두루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래 글은 지난 10월 12일 명지대 인문관에서 있었던
유홍준 교수와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컨셉트가 '옛 것과 새로움의 밸런스'인데요. 역시 역부족입니다.
통렬한 후회와 반성을 거듭하며... '진짜 마감 어기지 말고 제때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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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_ Interview>
영원한 반교리 청년 유홍준이 써내려 간 문화유산답사기
- 옛 것과 새로움의 빛나는 조율을 만나다
글_ 디오니소스(칼럼니스트)
우린 지금 걸어 다니는 박물관을 만나고 있다. 1993년 당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란 말로 대한민국의 답사붐을 일으켰던 유홍준, 그가 돌아왔다. 실로 10년 만에 TV 예능 프로그램으로, ‘인생도처유상수’란 신간을 들고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재 지킴이이자, 시대의 스토리텔러다. 혁신을 좇느라 전통을 낡은 것으로 치부하는 작금의 우리에게, 그의 귀환은 반가움을 넘어 경이로움으로 다가온다.
유홍준 신드롬의 시작,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993년 출판계에 일대 파란이 일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인문 서적 최초의 밀리언셀러로 등극한 것. 당시 중고등학생들에겐 필독서였고, 너나 할 것 없이 그의 답사기에 흠뻑 빠졌었다. 남도와 경주의 재발견, 아우라지로 대표되는 강원도의 힘, 안동과 부여를 넘나드는 삼국시대의 소중함, 평양과 금강산을 에돌며 문화유산을 민족 공동의 자산으로 승화시킨 비범함 등 당시 유홍준 교수의 발길 닿는 곳은 저마다 찬란한 전통문화가 새롭게 꽃을 피웠다.
시인 고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를 마주하며 “유홍준의 눈빛이 닿자마자 그 사물은 문화의 총체로 활짝 꽃피운다. 마침내 다른 사람과 유홍준은 하나가 되어 이 강산 방방곡곡을 축복의 미학으로 채우고 있다.”라고 평했다. 2001년 ‘북한 문화유산답사기’를 끝으로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의 답사기 시리즈는 시대를 관류하며 누적 판매부수 270만 부를 돌파했다. “이젠 제 책은 그만 팔렸으면 좋겠어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결코 쉬운 책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토록 많이 팔린 걸 보면 그만큼 대중들이 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단 증거겠죠. 역으로 읽을 만한 책이 부족했단 증거일 수도 있고요.” 대중에게 잘 읽히는 글이란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쉽게 쓴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나눌 줄 아는 지식인의 책무를 말한다. 그래서일까?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은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을 널리 알리고, 나누고, 논하는 것으로 모아진다.
유홍준의 문화예능 답사기, 대중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현재 유홍준 교수를 특징짓는 세 가지를 꼽으라면 문화재 알림이, 전 문화재청장, 무릎팍도사 출연 정도가 아닐까? 필자의 경우에도 TV 채널을 돌리다가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그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우리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이토록 절절하고 감동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이번 방송은 엄청난 입담을 과시하며 다시 한 번 유홍준 신드롬을 불러 일으킨 계기가 됐다. 예전부터 그의 입심은 소문이 자자했다. 방동규 님에 따르면 조선 땅에 3대 구라가 있다고 했다. 백기완, 황석영, 유홍준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유홍준 교수는 교육 방송이라 불릴 만큼 달변이었다. 마이크를 잡으면 몇 시간이고 농익은 입담으로 좌중을 휘어잡는다. 수다스럽지만 그를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이유는 내뿜는 호흡과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과 진정이 어려있기 때문이다. ‘무릎팍도사’를 통해 유홍준 교수의 진면목을 2시간 남짓 맛볼 수 있었던 것은 실로 행운이었다. 특히 자금성과 경복궁을 비교하여 전통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모습이나 부석사를 소개하며,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의 한 대목을 읊조리는 그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던가. 유홍준 교수의 예능답사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국민예능이라 불리는 ‘1박 2일’에서는 경주 남산을 출연자들과 함께 돌며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전한다. 어느 날 문득 대중에게 한걸음 성큼 다가선 유홍준 교수. 그의 행보는 ‘우연’이 아니었다. 어쩌면 문화유산 전도사로서의 운명을 양 어깨에 짊어진 채, 정해진 수순을 밟고 있는 건 아닐까?
생의 터닝포인트, 학자와 공무원 사이
그의 인생에 있어 두 번의 터닝포인트가 있었다. 하나는 서울대 미학과 재학 당시 김윤수 교수가 권한 조르조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과의 만남이다. 미술사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 ‘하고 싶은 학문을 하자’란 용기를 심어줬고, 미학에서 미술사로, 정확히는 한국미술사로 전공을 바꾸게 됐다. “미술사를 공부하는데 문화사나 사상사적인 공부 없이는 스토리텔링과 콘텐츠를 채울 수 없기에 석사와 박사로 각각 미술사와 동양철학을 이후에 공부하게 됐죠.” 유홍준 교수는 이러한 지적 탐구와 더불어 1985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과 대구 등지에서 청소년을 위한 한국미술사 공개강좌를 개설했으며,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를 맡았다.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미술평론가로도 활동을 했으니, 해박한 지식과 그것을 부려낸 글, 육화된 말이 어우러져 대중들이 쉽게 그에게 공감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한편 그에게 찾아온 두 번째 터닝포인트는 문화재청장으로 재직할 때였다. 건천궁 복원, 42년만의 경회루 개방, 북악산 개방, 산림청장과 함께한 문화재 복원용 금강송 재배지 협약 등 문화재청장으로서의 행보도 남달랐다. 우리나라 궁궐의 안내판 개선사업도 그의 뚝심으로 완성된 사업이기도 했다. 하지만 ‘숭례문 방화사건’은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당시 문화재청장이라는 사실은 비극적 운명이지만 숭례문 방화 사건은 제가 죽고 나서도 씻을 수 없는 아픔일 겁니다.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문화재를 더 사랑하고 보존하겠다는 마음을 다잡게 됐습니다.” 학자로, 교육자로, 공무원으로 다시 교육자의 길을 걷고 있는 유홍준 교수에게 두 번의 운명적인 사건은 우리 전통문화에 더욱 깊숙이 헌신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의 전통, 한국적인 것의 제다움
유홍준 교수가 생각하는 전통은 무엇일까? 그리고 한국적인 것은 어떤 것일까? 뻔한 대답을 예상했지만, 그의 목소리엔 강한 자부심이 묻어난다. 전통은 두 가지 상반된 특징이 있다고 말한다. 계속 이어가는 것과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변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변하지 않는 전통이란 없습니다. 전통이 당대 새로운 삶 속에서 변화하지 않는다면 인습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제사 아닐까요?” 예전부터 제사는 가족이 모여 조상을 추모하고, 우의를 다지는 자리였다. 하지만 요즘 들어 제사를 인습 혹은 귀찮은 집안 행사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도 많다. 안동의 한 종갓집의 경우에는 제사를 아예 음력 대신 양력일을 정하고, 가족들이 쉽게 모일 수 있도록 휴일로 정하기도 한단다. 옛 것을 지키되 현대적 관점에서 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변화는 전통이 살아가는 중요한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에서 한국적이란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한국적인 것이란 한국인의 삶과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여기에 대해 단순히 소박한 것, 구수한 멋과 맛 등으로 정의 내릴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한국적인 것을 정의 내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씁니다. 프랑스나 독일의 경우에는 프랑스적인 것, 독일적인 것을 따져 묻지 않습니다. 헌데 왜 한국적인 것에 집착하는 걸까요? 이는 한 나라의 문화를 글로벌한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유홍준 교수는 동양적인 보편성과 한국적인 특수성을 함께 찾을 때, 한국적인 아이덴티티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나라는 동아시아 속에서 당당한 지분을 갖고 있는 문화적 주주국가였다고 강조한다. 다만 민족적 기질이란 게 있어서 똑 같은 도자기를 만들어도 중국은 형태를, 일본은 색채를, 우리나라는 선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기질적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국적인 미를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는 게 그의 말이다.
우리가 물려줄 문화유산의 모습이란
유홍준 교수가 평소 좋아하는 장소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첫 번째 장소인 강진과 해남이다. 가장 자주 간 지역은 경주이고, 단일 유적지로는 선암사를 가장 많이 찾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후대에게 물려줄 문화유산은 무엇일까? 300년 혹은 500년 후에 물려줄 수 있을만한 현대의 문화유산은 어떤 것이 있을까? “유형의 문화유산으로 한정 짓자면 건축, 미술, 공예 정도가 되겠지요. 미술과 공예는 동시대 작가들의 역량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건축의 경우에는 심각합니다. 우리에게 100년 후에 살아 남을 만한 건축이 있을까요? 시멘트로 만든 건물의 수명은 100년을 넘지 못합니다.” 이에 대한 그의 해법은 명확하다. “문화재란 당대 최고의 기술, 예술가, 재력이 합쳐져 완성되는 것입니다. 국민 정서상 부자들이 호화롭게 건물을 짓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는 매우 잘못된 방식이지요. 또 이 시대의 예술가들이 장인정신이 없다고들 말하는데, 분명한 건 예술가의 문제가 아니라 소비자와 사회 제도의 문제가 더 큽니다. 아무리 공을 들여 잘 만들어도 제대로 값을 쳐주지 않는 게 문제지요. 문화는 공급자가 아니라 소비자가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후대에게 물려줄 문화유산도 제대로 고민해야 할 시점임을 지적하는 그다. 옛 것의 보존에 새로운 것의 창조가 함께 어우러질 때 우리의 전통은 역동성을 더할 수 있으리라.
나무남자의 변함없는 청춘을 응원하며
평소 유홍준 교수는 사람들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일상으로 품고 살아가는 행복을 나누고 싶다고 했다. 학자로서, 공무원으로서, 교육자로서, 저술가로서 유홍준 교수는 우리네 전통문화를 알리기 위해 쉼 없이 달려왔다. 현재 그는 부여 외산면 반교리에 ‘휴휴당’을 짓고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그곳에 내려가 고구마도 캐고, 밤도 따며 자연과의 합일을 만끽하고 있다. 반교리 청년, 외산 유홍준의 삶은 그렇게 자연을 향해 있다. “퇴직 후 인생을 따로 고민한 적은 없습니다. 아마도 주위에서 가만히 놔두질 않을 거에요. 다만 저술활동은 죽는 날까지 계속할 거에요. 대중들이 널리 읽을 수 있는 한국 미술사 책을 꼭 완성하는 게 제 소망이지요. 나중에는 나무를 가꾸며 살고 싶답니다.” 요즘 그의 관심사는 나무 가꾸기다. “박상진 선생이 쓴 <궁궐의 우리나무>와 같은 책을 아예 끼고 산답니다. 우리 궁궐의 나무가 130여 종 되는데, 이걸 어떻게 정원수로 가꿀 수 있느냐가 제 관심사죠. 여생은 나무와 함께 지내는 게 가장 행복할 것 같아요. 나무는 오히려 늙어야 품위가 난다고들 하잖아요.”
그의 삶 속엔 오로지 우리의 전통문화, 잊혀져 가는 문화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도, 문화재청장 재직도, 많은 젊은이와 함께 한 문화유산 답사도, 숱한 강연과 저술 활동에도, TV 예능 출연에도 늘 우리 문화재와 전통이 살아 있었다. 앞으로 그가 써내려갈 우리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어떤 모습으로, 또 언제쯤 완성될까? 영원한 반교리 청년 유홍준,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지도를 완성해가는 그의 모습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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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