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 리뷰

쿠니토리
- 작성일
- 2021.7.6
악령 (하)
- 글쓴이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저
열린책들
주인공 스따브로긴을 둘러싼 인물들이 만들어낸 긴장이 해소되는 하권을 읽었다. 스따브로긴을 따르는 뽀뜨르 베르호벤스키, 키릴로프, 샤또프 등은 모두 비극적 결말에 이르며 그를 따르던 여인들 또한 정도의 차이를 보일 뿐 비극적이라는 결말을 공유한다. 게다가 스따브로긴 자신도 내면의 붕괴를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데 이는 <악령>에서 그가 차지했던 높고 숭고한 위치에서조차 진정한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지 못한 자의 고통을 반영한다.
내가 <악령>이라는 책에 담긴 사상, 철학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지만 책의 전반에 흐르는 급진적 사회주의, 허무주의, 무신론 등은 자주 접할 수 있었다. 도스또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서 느꼈던 좌절은 <악령>에서 어느정도 회복되었으며 <악령>은 소설 자체로서도 흥미로울 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19세기 러시아의 정세를 파악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악령>의 주인공 격인 등장인물들은 실제 인물을 모티브로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스따브로긴과 뾰뜨르 베르호벤스키는 스뻬시네프와 네차예프를 모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악령>의 탄생에 영감을 주었던 '네차예프 사건(급진적 사회주의를 추구하던 대학생 모임에서 동급생을 살해한 사건)'은 이 소설의 주축을 담당하고 있다. 샤또프와 끼릴로프가 보이는 범슬라브주의와 무신론은 러시아 사회를 흔드는 정신적 충격으로 볼 수 있는데 <악령>의 마무리는 범슬라브주의도 무신론도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도스또예프스키의 몇몇 작품들, <죄와 벌>,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 <죽음의 집의 기록>, <가난한 사람들>, <백야> 정도를 접했던 내 짧은 경험으로는 <악령>이 가장 재밌었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도스또예프스키가 자신의 작품에 넣어둔 형이상학적 테제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란 점이다. 그렇다면 같은 작품에서 훨씬 더 풍성한 답례를 얻어갈 수 있었을텐데....
조만간 <죄와 벌>을 다시 읽을 생각을 갖고 있지만 <악령>에서 느낀 흥미가 좋은 영향으로 작용해 오래전 읽었던 <죄와 벌>을 조금 더 원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자신이 첫 번째 인신(人神)이 되고자 했던 끼릴로프의 말에서 -
사람들은 각자 자기 나름의 안락함을 찾는 거지, 그게 전부야...
신은 필요해. 그러니 존재해야만 해.
그러나 나는 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어.
....
만약 신이 있다면 모든 것은 신의 의지이고 나는 신의 의지에서 벗어날 수 없어. 만약 신이 없다면, 모든 의지는 나의 것이니, 나는 자의지를 표명할 의무가 있는 거야. 정말로 이 지구 상에는 신을 끝장내고 자의지를 확신한 후, 그것이 완전한 지점에 도달했을 때 자의지를 선언할 만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단 말인가?
나는 자살할 의무가 있어. 왜냐하면 내 자의지의 가장 완전한 지점은 내가 나를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지.
급진적 사회주의를 꿈꿨던 럄신의 자백 중에서-
그것은 사회 기반의 조직적인 동요, 사회와 모든 원칙의 조직적인 해체를 위해서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모든 것을 혼란에 빠뜨리며, 그렇게 해서 병적이며 우울하고 냉소적이며 신을 믿지 않는 사회, 그러나 그럼에도 뭔가 지도적인 사상과 자기보존에 대한 무한한 갈망을 가지고 있는 불안정한 사회를 단숨에 손아귀에 넣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동안 활동을 이어 가며 조직원을 모집하고, 자기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파고들 수 있는 모든 취약한 부분을 실질적으로 찾아온, 5인조의 총체적인 그물망에 의지하여 폭동의 깃발을 들어 올림으로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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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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