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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제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1.1.9
약혼녀 주연(오산하 분)을 연쇄 살인범 경철(최민식 분)에게 살해당한 국정원 요원 수현(이병헌 분)의 복수극을 묘사한 ‘악마를 보았다’는 개봉 전부터 잔혹 논란으로 점철되었습니다. 만일 ‘악마를 보았다’가 B급 감독과 배우들에 의해 완성된 영화였다면 논란이 크게 불거지지 않고 조용히 외면 받았겠지만, 데뷔작 ‘조용한 가족’ 이래 흥행과 비평 모두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었던 김지운 감독과 톱스타 이병헌, 그리고 공백이 길었던 최민식의 복귀작이라는 점에서 논란은 가열되었습니다. 흥행 감독과 배우들이 손잡은 주류 영화가 예상보다 폭력 및 고어의 수위가 높았던 것이 논란의 원인을 제공한 것입니다.
논란의 중심에 선 한국 영화들은 상당수 흥행에 순기능을 했지만, ‘악마를 보았다’는 논란 끝에 200만 관객도 동원하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습니다. 게다가 ‘추격자’ 이후 ‘악마를 보았다’를 거치며 ‘아저씨’와 ‘황해’에 이르기까지 잔혹해져만 가는 한국 영화에 대한 우려마저 나오는 상황입니다.
‘악마를 보았다’가 흥행에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한국 영화의 가장 큰 소비 계층인 젊은 여성들의 부정적인 입소문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초반 살해되는 주연을 비롯해 경철에 의해 살해되는 대부분의 피해자는 폭력에 무기력한 젊은 여성입니다. 특히 주연과 버스녀(한세주 분)의 죽음에서는 그들의 상반신 알몸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며 토막 난 주연의 사체(게다가 그녀는 임신한 상태였습니다.)에서는 유독 유두만이 강조되는데 이 같은 장면에 여성 관객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슷하게 수위가 높았던 ‘추격자’의 경우 살해되는 것은 젊은 여성들뿐만이 아니며, ‘아저씨’는 비현실적인 판타지이고, ‘황해’는 남성들 간의 대결에 초점을 맞추기에 ‘악마를 보았다’는 전술한 영화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에 서있습니다. 게다가 경철은 미성년자에까지 성폭행을 일삼으려 하고, (하지만 경철의 두 차례의 성폭행 시도는 모두 실패하며 미성년자를 살해하는 장면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악마를 보았다’의 마지노선입니다.) 경철의 친구 태주(최무성 분)도 젊은 여성을 토막 살해하려 합니다. 비록 남성들 간의 칼부림으로 귀결되지만 경철과 두 명의 강도와의 택시 난투극 역시 여성 관객들로 하여금 ‘내가 저 택시에 탔더라면...’하고 당혹스런 이입을 자연스레 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슷한 공간에 경철, 태주, 2인조 택시 강도 등 살인마들이 우연히 집중되었다는 점에서 ‘악마를 보았다’의 개연성은 다소 떨어지는 것이 약점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영화보다 긴 144분의 러닝 타임을 견디는 것은 극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여성 관객의 입장에서도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잔혹해지는 한국 영화의 경향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지만, 궁극적으로 한국 영화의 폭력 묘사 수위는 갈수록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1차적으로 한국 사회의 현실이 폭압적이며 영화는 고스란히 현실을 반영하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폭압적’이란 강력 범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기본적인 민생고부터 거대 정치 현실에 이르기까지 더욱 팍팍해지고 잔혹해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폭압적인 현실에 억눌린 관객 중 일부는 보다 잔혹한 폭력 묘사를 원할 것이며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는 영화의 제작과 개봉 역시 필연적으로 수반될 것입니다. 아울러 고전 영화부터 돌이켜 보면 영화에서 허용되는 폭력 묘사의 수위는 높아져 왔습니다. 적절한 생략을 통해 관객의 상상력에 의존했던 폭력 묘사가 보다 직접적인 것으로 바뀌어 온 것입니다. 사실 오프닝의 주연 살해 장면을 제외하면 ‘악마를 보았다’의 폭력 묘사와 고어 장면의 수위는 오히려 러닝 타임이 흐를수록 낮아지며 생략됩니다. 과거 잔혹했다는 평가를 받은 대부분의 영화들이 현재의 눈높이로 보면 그다지 잔혹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것처럼 ‘악마를 보았다’ 역시 시간이 흐르면 잔혹 논란에서 자유로워지며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어 장면을 떠나 ‘악마를 보았다’가 힘이 넘치는 영화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만일 자극적인 고어 장면과 섹스 묘사에만 의존하는 작품이라면 144분의 러닝 타임은 허전할 수밖에 없을 텐데, 끝까지 힘을 잃지 않고 서사를 우직하게 끌어가는 스릴러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닐하우스와 산장 장면의 액션 연출도 인상적입니다. 이병헌과 최민식 두 배우의 열연도 훌륭합니다. 미묘한 표정 연기에 능한 이병헌과 영화 속 전형적인 미치광이 살인마가 아닌 현실적이며 생생한 새도매저키스트 캐릭터를 창조한 최민식의 대결은 ‘악마를 보았다’의 매력 중 하나입니다. 폭력 및 고어 장면을 즐기는 관객이라면 식칼과 망치는 물론, 낚싯대와 낚시 바늘, 가위, 스패너, 드라이버, 쇠파이프에서 단두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흉기와 둔기의 활약에 즐거울 것입니다.
우스운 장면도 의외로 많습니다. 하천에서 주연의 머리를 발견한 경찰이 넘어져 머리가 바닥에 굴러 떨어지는 장면(초반에 발견되는 주연의 머리는 결말에서 수현의 복수로 단두대에서 참수된 경철의 머리와 대칭을 이룹니다.)이나 태주가 손에 박힌 드라이버를 빼내려다 손잡이만 빠지는 장면, 그리고 히치하이킹을 통해 범행하려는 경철 앞에 군용 차량이 멈추는 장면 등은 김지운 감독 특유의 블랙 유머는 여전함을 입증합니다. 경철의 학원 통학 차량의 백미러에 붙은 천사의 날개나 경철이 입게 되는 십자가가 그려진 축구 팀 유니폼은 극히 역설적입니다. 천주교 신자인 주연 일가가 풍비박산 나는 것은 ‘신은 없어도 악마는 있다’는 주제 의식의 발로입니다. 태주의 대사에서 언급되듯이 악마와 싸우기 위해 악마가 되어가는 수현의 모습을 통해 선과 악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복수의 무의미함이 설파되는 것은 복수극의 전형적인 패턴입니다.
다른 영화들을 연상시키는 부분도 다수 눈에 띕니다. 오프닝의 소품 망치는 최민식의 대표작 ‘올드보이’를,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돌고 돌아 세정(김인서 분)에게 발산하는 경철의 섹스 장면은 ‘친절한 금자씨’를 떠올리게 합니다. 복수극이라는 소재가 기본적으로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을 연상케 합니다. 오프닝의 검정 정장 차림의 깔끔한 이병헌은 그가 분했던 ‘달콤한 인생’의 선우를 연상시키며, 동시에 수현과 후배 요원(이준혁 분)의 관계는 ‘달콤한 인생’의 선우와 민기(진구 분)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살인이 자행되는 공간적 배경으로 설정된 외딴 산장은 ‘조용한 가족’을 연상시킵니다. 살인을 저지르고 온몸에 피투성이가 된 채 나타나 자수하는 경철은 ‘세븐’에서 자수하는 존 도우(케빈 스페이시 분)와 비슷합니다.
코미디와 호러, 느와르, 서부극을 거쳐 고어 영화까지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 김지운 감독의 연출작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각본을 맡은 박훈정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직접 집필한 시나리오로 연출을 즐기는 김지운 감독과 류승완 감독에게 ‘악마를 보았다’와 ‘부당거래’의 시나리오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차후 행보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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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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