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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제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0.7.25
※ 본 포스팅은 ‘메멘토’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름 극장가 최고의 화제작 ‘인셉션’을 관람하기에 앞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출세작 ‘메멘토’를 다시 감상했습니다. 10년 전에 제작되었지만, 혁명적인 서사구조와 긴장감 넘치는 편집으로 무장한 걸작으로, 이후 등장한 무수한 스릴러 영화 중에서도 ‘메멘토’를 뛰어넘은 작품을 꼽기는 쉽지 않습니다.
‘메멘토’는 기억에 관한 영화입니다. 주인공 레너드(가이 피어스 분)는 아내를 잃고 새로운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는 증상에 시달립니다. 아내의 살해범을 찾아 복수하는 것이 레너드의 유일한 삶의 목표로, 아내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집요하게 파헤치지만, 종반으로 갈수록 레너드가 과연 진실한 인물인지에 대한 의문은 증폭되기만 합니다. 복수의 대상인 아내의 살해범이 실은 레너드 자신이라는 극히 역설적인 결론에 도달하면서, 이전까지의 레너드를 전제했던 요소들은 모두 무의미한 거짓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레너드가 자신에게 불리한 기억을 소거하고 유리한 기억만을 남겼음이 밝혀집니다. 나탈리(캐리 앤 모스 분)를 구타하고도 이내 기억하지 못하지만 오른손에 남은 불쾌감과 씻지 못한 분노로 찜찜해 하듯이, 아내를 살해한 기억은 고의 여부를 떠나 깊숙한 죄책감으로 기억을 넘어 잠재의식 한 구석에 깊숙이 자리 잡아 레너드를 괴롭힙니다. 그러므로 그토록 그리워하면서도 정작 아내의 사진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얼마 남지 않은 아내의 유품 또한 불태워 버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내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해했기에 레너드의 죄책감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메멘토’는 매우 윤리적인 스릴러입니다.
레너드가 스스로 기억을 조작하는 것은, 삶의 목표가 근본적으로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윤색된 기억 속에서 편의적인 방식으로 삶의 목표가 설정된 것입니다. 레너드는 113분으로 압축된 러닝 타임 속에서 극적으로 각색된 현대인의 자화상입니다.
필름 느와르의 공식처럼 레너드의 주변 인물들은 그의 약점을 이용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테디(조 판톨리아노 분)는 마약상과의 거래에 레너드를 앞세워 막대한 이득을 챙기는 부패한 경찰이며, 테디에게 연인을 잃은 나탈리는 성적 매력을 앞세워 레너드를 이용해 복수하는 팜프 파탈입니다. 비중이 크지 않은 모텔 점원조차 레너드의 증상을 악용합니다. 레너드는 장애인이지만 그를 돕기는커녕 이용하려고만 하기에 고독한 살인기계로 전락합니다.
‘메멘토’의 세 등장인물의 분명한 캐릭터는 배우들의 개성을 극대화한 것입니다. 지적이면서도 편집광의 이미지가 강한 가이 피어스는 기록에 집착하는 주인공 레너드에 적역입니다. 새미를 회상하는 장면의 보험 조사원 시절의 모습은 출세를 지향하는 ‘LA 컨피덴셜’의 속물스러운 에드를 연상시킵니다. 장난기와 더불어 신용할 수 없는 조 판톨리아노와 섹시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캐리 앤 모스의 이미지는 배역 속에 그대로 투영되었습니다.
‘메멘토’는 아날로그 스릴러입니다. 인터넷과 이동 전화가 등장한 시대에 제작되었지만 관련 소품들은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있습니다. 디지털 카메라가 아니라 단 한 장만이 출력 가능한 (그러므로 오리지널리티가 강조되는)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노트북 컴퓨터가 아닌 두툼한 종이 서류 뭉치가 레너드의 부실한 기억을 돕는 장치들입니다. CG나 특수 효과가 아닌 시나리오와 편집에 힘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영화 본연의 시원에 근접한다는 점에서 빛납니다. 멀티미디어 없이는 인간의 생존이 불가능한 듯한 현 시점이나 혹은 차후에 ‘메멘토’가 리메이크된다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시나리오에 손질을 가하며 소품들이 활용될지 궁금합니다.
1디스크 사양의 dvd를 구입하고 포스팅한 5년 전 리뷰에서, ‘메멘토’를 극장에서 관람하고 감동받아 구입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이사 과정에서 분실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고이 장롱 속에 모셔둔 카메라를 최근 찾았습니다. 인간의 기억이란 이토록 불완전합니다. 아깝게도 장전해둔 10장의 필름은 유효 기간이 훨씬 지나며 못쓰게 되었습니다. 폴라로이드가 도산하면서 만만치 않은 가격의 필름은, 고가로 치솟으며 구하기도 어려워졌습니다. 가을에 600 필름이 재생산되면 어떻게든 구해서 두찌 사진이라도 찍어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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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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