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3월 리뷰

앤의 정원
- 작성일
- 2019.3.31
지금 나는 화창한 중년입니다
- 글쓴이
- 사카이 준코 저
살림출판사
200페이지에 불과한 이 책을 다 읽는데 무려 2주 넘게 걸렸다.
물론 지금 내가 여유롭게 책이나 읽고 있을 형편이 안 되는 것도 있다.
작년 8월 복직해서 6개월동안 한 일보다 더 많은 일을 3월 한달에 했으니 말 다했지.
하지만 학술서나 논문도 아니고,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적어 내려간 에세이인데도 이렇게나 오래 걸려서 읽었다는건, 역시 이 책에서 별다른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별로라고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책을 읽는 독자의 상태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좀 더 여유롭고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환경에서 이 책을 접했다면 아마 매 페이지마다 맞장구를 치면서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즘 나는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는 커녕 매일 파김치가 되어 퇴근하는 실정이다.
그런 마당에 '중년을 맞이하는 여자의 자세'는 조금도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당장 내일 할 일로 머리가 꽉 차 있는 상태에서 뭔가가, 특히 이렇게 말랑말랑하고 약간은 권태로운 주제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인생은 타이밍' 이라지만 독서 역시 타이밍이 맞아야 한다.
이 책의 전체적인 주제는 '중년이 되어서 하는 첫 경험'.
우리는 보통 첫 경험은 어린이나 젊은이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나이가 들면서 처음 하게 되는 경험도 상당히 많다.
차이점이 있다면 전자는 꽃이 피는 과정이고, 후자는 꽃이 지는 과정이라 첫 경험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느낌이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하는 첫 경험은 싱그럽다.
친구와의 우정, 연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중에 겪는 모든 것이 주변의 축복을 받는다.
반면 중년들의 첫 경험은 이렇다.
흰머리와 주름이 생긴다거나, 노안이나 오십견이 온다거나, 여자의 경우엔 갱년기나 폐경을 겪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자리를 양보받는 경험도 해본다.
이런 경험들로 축복을 받아본 사람, 손 들어 보시길?
아마 축복은 커녕 '이 사람이 누굴 놀리나?' 싶어 화가 불끈 치밀어 오를 것이다.
같은 첫 경험이지만 그 사이의 갭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중년의 첫 경험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 책의 저자인 사카이 준코는 그런 생각을 살짝 비틀어 '아, 이것도 내가 인생에서 겪는 첫 경험이구나' 라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저자가 이 책을 쓰고 있을 무렵, 일본에서는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났다.
그래서인지 유독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이 많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는 것으로도 모자라 방사능 피폭에 대한 두려움까지 안고 살아가야 하는 후쿠시마 주변 사람들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책 곳곳에 묻어난다.
하긴 아무 상관없는 내가 봐도 처참하고 마음이 아팠는데 같은 일본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이 사건은 정말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저자의 전작인 《저도 중년은 처음입니다》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평을 하자면 전작이 훨씬 좋다.
책을 읽을 동안의 내 상태는 차치하더라도 전작에 비해 이 책이 주는 울림은 확실히 약했다.
'중년의 첫 경험'이라는 주제 자체는 무척 신박했으나 뭔가 책이 주는 전체적인 느낌이 이쪽으로 확실하게 방향을 잡지 않은 것 같다.
이 이야기 했다가 저 이야기 했다가 하는 식이랄까.
물론 에세이의 특징도 있겠지만 조금 산만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중년을 맞이하는 마음의 자세를 달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들어가는 입장에서 '어머, 이거 나 인생에서 처음 경험해 보는 거얏' 라며 호들갑을 떨지는 않더라도 뭔가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1년의 사계절을 지내다 보면 꽃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꽃이 지고 나서 볼 수 있는 푸르른 녹음도 멋지고, 가을에 물드는 단풍의 정취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나는 지금 인생에서 어느 순간을 지나고 있일까.
녹음은 이미 지난 것 같고, 이제 막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시점일까.
나이 먹는 것에 대해 너무 두려움과 패배감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마 이 책의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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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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