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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여부
- 작성일
- 2010.6.14
폭력비판을 위하여 요약
발제: 김동규
발터 벤야민, 「폭력비판을 위하여」, ������법의 힘������(진태원 역), 문학과 지성사, 2004.
발터 벤야민, 「폭력비판을 위하여」, ������발터벤야민선집5������(최성만 역), 길, 2008.
폭력 비판의 과제는 폭력이 ‘법’과 ‘정의’와 맺고 있는 관계를 서술하는 것이다.1) 우선 폭력과 법의 관계에서는 목적과 수단이라는 관계가 드러난다. 특히 폭력은 ‘수단’이라는 측면에서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된다. 일단 폭력이 ‘수단’이라면 이 수단은 반드시 ‘정당한 목적’이라는 척도와 관련해서만 판단될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런데 벤야민은 수단으로서의 폭력이 언제나 정당한 ‘목적’이라는 것을 함축하는 듯 보이는 이런 판단에 잘못이 있다고 밝힌다. 사실 폭력은 그것이 사용되는 ‘경우’들에 대해서 그 정당성을 판별할 수 있는 반면, 벤야민은 ‘원칙’으로서의 폭력 ‘일반’이 정당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까지도 윤리적일 수 있는지 하는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2) 이렇게 되면 우리는 ‘목적’에 대한 질문을 더 이상 제기할 수 없고, 수단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된다.
이를 위해 벤야민은 ‘법실증주의(das positive Recht)’와 ‘자연법주의(das Naturrecht)’ 중 당연히 자연법주의로 수단으로서의 폭력 일반에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위 법의 목적에 해당하기도 하는 자연법은 정당한 목적을 위한 폭력 수단 사용에 대해도 전혀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폭력은 자연의 산물, 즉 원재료 같은 것이어서, 부당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지 않는 한, 그것의 사용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이러한 자연법주의에 따른 국가이론은 각 개인이 자신의 폭력을 (계약을 통해) 국가에 양도하기 이전에는 자신의 폭력을 합법적으로 또는 권리상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자연법 론은 다윈의 생물학에 의해 재활성화되는데, 다윈의 생물학에 따르면, 자연선택 이외에는 오직 폭력만이 자연의 모든 생명체들의 목적들에 유일하고 적합한 원초적 수단이라 생각한다. 즉 이 입장에서는 자연적 목적에 적합한 폭력은 이미 적법한 것이 된다.
이러한 자연법주의는 법 실증주의적 태도와는 상반되는 것인데, 그 이유는 법실증주의가 폭력을 역사적으로 생성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적의 정당성에 비추어 폭력을 평가하는 자연법주의와 달리 법실증주의적 입장은 폭력을 적법성이라는 수단적인 척도에 비추어 판단한다. 다시 말해 ‘정의’가 ‘목적’들의 척도라고 한다면, ‘적법성’은 수단들의 척도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 두 입장들은 공통적인 도그마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일치한다. 즉 정당한(gerechte) 목적은 정당한(berechtige) 수단을 통해 성취될 수 있고, 정당화된 수단은 정당한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자연법주의는 목적의 '정의‘를 통해 수단을 ’정당화‘하려하고, 법실증주의는 수단을 정당화함으로써 목적의 정당성을 ’보증‘하려 한다. 그런데 여기서 정당한 목적 대 정당한 수단 사이에서 화해할 수 없는 갈등이 발생한다면 어떨까? 이때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이율배반이 드러나게 된다. 벤야민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목적의 정당성만이 아니라 수단의 정당성이라는 상호 독립적인 척도들을 확립해야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벤야민은 정당성의 척도에 관한 물음에서 ’목적‘의 영역이나 정당성의 척도에 관한 물음을 제외한다. 대신 그는 폭력을 형성하는 수단의 정당화에 대한 물음에 천착하려 하는데, 이는 그가 자연법주의보다는 법실증주의적 입장에서 폭력의 문제를 고찰해야 한다는 기본입장을 고수하려는 것이다. 만일 자연법주의적으로 폭력을 형성하는 수단의 정당화로 접근해 간다면, 이는 곧 토대 없는 결의론3)으로 이어진다고 비판한다. 예컨대 법실증주의가 목적에 맹목적이라면, 자연법주의는 수단에 대해 맹목적이다. 결국 수단으로서의 폭력에 천착하려는 벤야민은 법실증주의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점에서 법실증주의는 폭력의 유형에 관한 근본적인 구분을 시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구분은 역사적으로 인정된 폭력과 그렇지 못한 폭력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벤야민이 폭력과 관련된 역사철학적 고찰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에 지속적으로 관심의 끊을 놓치 않아야 한다.
우선 법실증주의는 적법성을 수단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폭력은 적법한 폭력과 적법하지 않은 폭력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벤야민이 보기에 이러한 구분이 직접적으로 자명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고 정당한 목적과 부당한 목적이라는 ‘자연법주의적 오해’를 법실증주의에 다시 도입할 수는 없다. 반대로 모든 폭력에 대한 역사적 기원에 대한 신원증명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러한 구분을 위해 벤야민은 법의 목적이 아닌 ‘폭력의 목적’에 대한 보편적 역사의 인정이나 부정이 존재하는지의 유무를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인정의 결여 부분에 자연적 목적이 등장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에 적법한 목적, 즉 수단으로서의 폭력 평가의 척도가 등장하는 것이다.
자연적 목적이 폭력에 의해 합목적적으로 추구되어야 하는데, 법실증주의적 경우에는 개인이 이러한 자연적 목적을 추구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법실증주의는 개인들이 개별적인 자연적 목적을 위한 폭력동원을 법적 강제력을 통해서만 허용한다. 예컨대 교육적 처벌권이 자연적 목적들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역에 행해질 수 있음에도 실정법은 여기서도 자연적 목적들이 과도하게 폭력적으로 추구되지 못하도록 ‘적접한 목적’을 통해 제한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개인들의 모든 자연적 목적은, 폭력성의 정도와 관계없이 폭력적으로 추구될 경우 법적 목적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현재 유럽 입법의 일반 준칙으로 정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진태원 역, 143.)4)
이런 점 때문에 법실증주의에 따른 법은 폭력을 개인의 수중에 놓는 것을 법질서 자체를 위협하는 위험으로 간주하게 된다. (예컨대 여기서 법은 ‘사적 복수의 금지’라는 것을 기본적인 정신으로 삼고 있다는 것도 이런 맥락와 연결되는 언급일 게다.) 그런데 벤야민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간다. “개인들에 맞서 폭력을 독점하려는 법의 이해관계는 법적 목적들을 보존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오히려 법 자체를 보존하려는 의도에 의해 설명되어진다. 곧 법의 수중에 있지 않을 때의 폭력은 그것이 추구할 수 도 있는 목적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법의 바깥에 현존한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법을 위협한다.”(진, 144.)5)는 것이다. (이러한 언급은 법이 폭력을 독점하려는 경향과 연결되는데, 결국 법을 확장시키고 성립시키는 것은 법 바깥에 있는 영역 아닐까? 그래서 법 밖에 존재하는 폭력이 법의 존재자체를 의문시하면서 동시에 법을 성립시킬 수 있는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이러한 질문이 아감벤의 주권과 법의 개념으로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지 싶다.) 예를 들어 대범죄자의 폭력성과 그것에 대한 대중의 동경은 법에 대한 반감을 공유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이것은 곧 법에 대한 위협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벤야민은 이것이 법질서 내에서 법적으로 허용된 폭력을 봐도 이런 사실이 잘 드러난다고 언급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파업권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계급투쟁이다.
파업이라는 것은 조직된 노동자들에 의해 행사되는 폭력으로서, 파업의 경우 노동자는 국가 외에 폭력을 행사하는 유일한 법적 주체가 된다. 벤야민에게 이러한 파업은 행동의 중지(이것은 이후 아케이드 프로젝트 등에서도 메시아적 중단, 진보의 혁명적 중단, 또는 정지상태의 변증법 등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비(非)행동인데, 이런 행동이 표면적으로는 비폭력이며 사용자의 폭력에서 벗어나려는 행위 불과하다. 이러한 파업은 단순히 사용자로부터 거리두기(Abkehr: 등 돌리기) 또는 낯설게 하기(Entfremdung)에 불과하다. 그리고 벤야민은 그런 경우 파업은 ‘순수수단’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국가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피할 수 없을 때, 그들에게 파업권을 허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파업이 순수수단이라 하더라도 그 중지 행위 내면에는 폭력의 요인이, 그것도 협박(Erpressung)의 형태로 등장할 때가 있다. 이것은 외면적인 어떤 것만을 수정하게 되면 다시 이전처럼 작업을 재개할 태세를 갖추고 등장하는 파업의 경우에 그렇다. 이러한 파업권은 국가의 관점과 달리 노동자의 관점에 따르면 특정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폭력을 사용할 권리’를 전제하고 있는 파업인 셈이다. 이렇게 국가의 관점과 노동자의 관점이 대립되면 ‘혁명적 총파업’이 발생한다. 그리고 국가는 이에 대해 ‘비상조치법’이라는 대응 카드를 꺼내든다. 여기서 노동자는 정당한 파업권이라는 주장을, 국가는 파업권의 남용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맞서는 것이다. 이때 국가는 일정한 수준에서 폭력을 용인하다가도, 혁명적 총파업과 같은 폭력이 등장하면, 이에 대해서는 불법(즉 입법자들에게 의해 전제된 파업이라는 특수한 계기가 개별 사업장이라면 모르겠으나 모든 사업장에 주어진 것은 아닐 진데, 이러한 파업을 모든 사업장에서 동시에 벌이는 것은 당연히 불법)이라는 논지를 펼치는 것이다. 벤야민은 이러한 법률 해석상의 차이에서 법적 상황의 ‘객관적 모순’을 발견한다. 여기서 이전에는 권리의 행사로 여겨지던 것이 특정한 상황에서는 폭력적인 것으로 해석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예컨대 노동자가 자신에게 부여된 권리를 사용하여 이러한 권리를 부여했던 ‘법질서를 전복’시키려 하는 능동적인 경우 ‘폭력’이라고 규정된다. 반면 행동을 중지하는 파업과 같은 것이 ‘협박’으로 작용하는 수동적인 경우에도 ‘폭력’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 따라서 만약 특정한 상황에서 법이 폭력의 행사자들로서의 파업자들과 폭력적으로 맞서게 된다면, 이는 법의 논리적 모순이 아니라 법적 상황의 ‘객관적 모순’을 증명해줄 뿐이다.
전쟁권(법) 역시 파업권의 경우와 같이 객관적 모순에 의거하고 있다. 예컨대 전쟁권 또는 전쟁법은 생존을 위한 자연적 목적과 시민에 의한 법 준수를 강요한다는 법적 목적이 서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모순적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파업권 역시 생계유지를 위함이라는 자연적 목적과 국가에 의해 강제되는 시민의 법 준수 사이의 갈등이 존재한다. 이러한 모순 덕분에 국가는 생존과 같은 자연적 목적의 외부적 힘들이 전쟁권을 인정하도록 강요할 때, 그리고 계급들이 자신의 자연적 목적을 위하여 파업권을 인정하도록 강요할 때, 그들의 법을 법 정립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것은 곧 새로운 법이 인정받게 되는 상황과 연결되는데, 벤야민은 이를 법정립적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법은 자연적 목적을 향한 폭력을 포함하여 모든 폭력을 적어도 법적인 주체로서의 개인들로부터 빼앗으려고 한다.
[참고로 아감벤은 이것을 모티브로 하여 법 적용 중지 영역이라는 예외상태가 법을 가능케 하는 원천으로 설명하는 듯 하다. 즉 법은 예외상태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확보받는 것이다. 로마노의 견해를 빌어서 표현하는 아감벤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지 싶다. “만약 긴급 사태가 법률을 갖지 않는다면 긴급 사태는 법률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긴급 사태 자체가 법 본래의 원천을 구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긴급 사태야 말로 법 전체의 최상위이자 근원적인 원천이며, 이에 비하면 다른 것들은 어떤 의미에서 파생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리고 사실상의 절차, 예를 들어 혁명을 통해 국가가 세워질 때 엄밀한 의미에서의 법률 제도, 즉 국가의 원천과 정당성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그러한 국가의 헌정 질서의 원천과 정당성은 긴급 사태에서 찾아져야 한다. …… 따라서 긴급 사태라는 형태를 띠는 한 예외상태는 혁명이나 헌정 질서의 사살상의 수립과 더불어 ‘비합법적’이지만 절대적으로 ‘법률적이고 헌법적인’ 하나의 조치로 모습을 드러내며, 이는 새로운 규범(혹은 새로운 법질서)의 생산으로 구체화된다.”(조르조 아감벤, ������예외상태������, 새물결, 2009, 58-59.)]
이제 벤야민은 폭력이 법적 관계들을 정초하고 변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본다. 그래서 모든 폭력에는 우선 법정립적 성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기존의 국가나 법은 이러한 폭력을 두려워하고 맞서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맞섬은 법적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서의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벤야민은 전자를 ‘법정립적 폭력’, 후자를 ‘법 보존적 폭력’이라 부른다. 벤야민은 우선 이 둘의 관계가 첨예하다는 사실을 ‘사형’제도를 통해 보여준다. 우선 벤야민은 폭력이 법의 기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그에게 사형에 대한 비판은 법 자체의 기원을 공격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에게 사실 사형의 의미는 처벌이 아니라 법 자체를 강화하고 심지어 이를 통해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데 그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적인 힘을 대중들이 감성적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영웅적 범죄자의 살해 행위에서 그런 양상들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벤야민은 법정립적 성격과 보존적 성격에 대해 좀 더 천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벤야민은 이 두 가지 폭력이 유령과 같은 혼합을 통해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혼합의 공존을 설명하기 위해 우선 벤야민은 경찰을 폭력 연구의 대상으로 상정한다. 즉 경찰들은 ‘법적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폭력 또는 강제력(처분권)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이러한 강제력을 광범위하고 다양하게 스스로 설정하는 권한(명령권)을 갖고 있기도 하다. 예컨대 경찰은 사람들의 권리를 무례하게 침해할 수 있는 권한은 없는 반면, 아주 민감한 사안, 즉 법률이 국가를 제대로 보호해 줄 수 없을 만큼 국가에 위협적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은밀하게 자신의 권한을 행사한다. 벤야민은 이것을 경찰의 수치스러움이라고 하면서, 그 이유로 경찰에게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 사이의 분리가 어느 정도 제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첫 번째 폭력은 ‘승리’를 통해 자신을 입증할 것을 요구받는 반면, 두 번째 폭력은 자기 자신이 새로운 목적들을 정립해서는 안 된다는 제한에 복종한다. 경찰들은 이 두 가지를 상황에 따라, 예를 들어 치안을 목적으로 한다는 명분에 따라 임의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여기에 벤야민은 “문명국가들의 생활에서 경찰이 포착할 수 없으면서도 도처에 퍼져 있는 유령으로 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찰의 폭력도 무형적인 것”(진, 152)6)이라고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벤야민은 경찰법(권)은 국가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취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경험적 목적들을 더 이상 법질서를 통해 보증받을 수 없는 지점을 표시한다고 언급한다. 이는 아마 법의 공백 또는 법의 외관을 경찰법이 표시한다고 의미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제 경찰의 폭력은 법 정립적이거나 법 보존적이 된다. 이러한 경찰의 폭력은 입법권과 행정권이 통일되어 있는 통치자의 권능(즉, 폭력Gewalt)를 대표한다.
이에 대한 고현범의 견해를 참고하자. 사실 경찰의 강제력 또는 폭력은 법이 미처 포괄하지 못하는 개별적인 사안에 대해 작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법의 공백 또는 법의 외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찰에게 법정립적 폭력과 법 보존적 폭력의 구별이 지양되어 있다는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벤야민은 법보존적 폭력으로서 사형제도가 보여주는 ‘법 속의 부패한 것’, 나아가 경찰제도 속에 나타나는 ‘유령적인 것’이라는 표현은 벤야민 자신이 경찰에게 발견한 구별불가능성을 언급하는 표현인 셈이다.7) 이러한 구별불가능성을 주권개념과 연결시키는 아감벤은 이렇게 표현한다. “경찰관과 사형집행인의 복장을 하기로 기꺼이 동의한 주권자는 마침내 오늘날 범죄자와의 원초적인 인접성을 보여준다.”8)
여기서 벤야민은 “수단으로서의 모든 폭력은 법정립적이거나 법보존적이다.”(진, 152)9)라고 강조한다. 폭력이 이 둘을 포기한다면 폭력 자신의 타당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셈인데, 이럼으로써 최선의 법의 경우에 있어서도 수단으로서의 모든 폭력은 법의 문제 설정 일반에 관여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쯤에서 법의 문제와 관련하여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갈등들을 비폭력적으로 화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사실 계약 같은 것이 아무리 평화적으로 체결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는 다분히 폭력이라는 기원이 내포되기 마련인데(이는 홉스적 사회계약론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벤야민은 “어떤 법 제도 안에 잠재적으로 현전하고 있는 폭력에 대한 의식이 사라지면, 그 제도는 타락하고 만다.”(진, 153)10)고 생각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벤야민 당대의 ‘의회’가 있다. 이 의회는 자신을 성립시킨 ‘혁명’에 대한 기억을 망각해버림으로써 아주 가련한 상태에 처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의회는 사실 자신을 대표하고 있는 법정립적 폭력에 대한 감각을 결여했던 것이다. 예컨대 의회가 타협을 통해 비폭력적으로 정치적 문제를 처리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면에는 타협을 추동한 외부의 힘 또는 동기가 존재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타협을 통해 의견을 수용하는 것에는 다소 ‘강제적’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러한 폭력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벤야민은 이렇게 언급한다. “원칙적으로 비폭력적인 정치적 화해 수단에 관한 논의에서 의회주의가 논의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중대한 문제들에 관해 의회가 이끌어낼 수 있는 결과는 그 기원 및 결과에서 폭력과 결부되어 있는 법질서일 뿐이기 때문이다.”(진, 154.)11)
그렇다면 비폭력적 갈등의 해결은 정말 불가능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벤야민은 “진심(Herzen)의 문화가 사람들에게 화합(Übereinkunft)을 이룰 수 있는 순수수단(reine Mittel)을 제공해주는 곳에서는 어디서든 비폭력적인 일치가 존재할 수 있다.”(진, 154.)12)고 한다. 계속해서 벤야민은 이러한 순수수단을 모든 종류의 합법적이고 불법적인 수단에 맞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진실한 예의, 공감, 평화의 사랑, 신뢰 등이 순수한 수단들의 주관적 전제에 해당한다. 이러한 순수수단은 언제나 직접적일 수 없고 매개적인 수단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이것은 갈등의 중재에 직접 끼어드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사물들(Sachen)을 경유하는 방식으로 관계하는 것이다. 예컨대 재화를 둘러싼 인간들의 갈등의 가장 사물적인(sachlichsten) 관계에서 순수수단의 영역이 열리는 것이다. 여기서 벤야민은 시민적 화합의 기술인 대화(Unterredung)가 그리고 상호이해(Verständigung)의 영역으로서의 언어가 순수수단의 사례가 된다고 언급한다. 여기서는 비폭력적 일치가 가능하고, 의미심장한 관계를 통해 폭력을 원칙적으로 배제하는 것이 가능하다. ‘거짓말’이 처벌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것이 폭력으로서의 법을 통과하지 않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물론 나중에 법이 타락을 하면서 기만 혹은 사기를 처벌 대상으로 만들어 이 영역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이런 일이 생긴 이유는, 사기를 당한 사람이 폭력적 사태를 불러일으킬 것을 법이 두려워하여 이를 사전에 막아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두려움이 법의 기원에서 유래하는 법의 고유한 폭력적 본성과 갈등을 빚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법은 이제 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자신의 목적(사실은 폭력을 독점하기 위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순수수단에 제한을 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순수수단의 제한과 허용의 문제는 국가의 이익과 모순되는 ‘파업’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일단 파업은 국가에 맞서는 폭력을 미리 억제시키기 때문에 파업권을 허용한다. 특히 파업권이 법질서의 개입 없이 평화롭게 조정되는 사적 개인들의 갈등일 경우 법적으로 이러한 순수수단은 제한되지 않는다. 물론 계급과 민족이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지만, 벤야민은 사적 개인들 사이의 평화적 교류를 주재하는 순수수단과 유사한 정치 자체에서의 순수수단만을 살펴보겠다고 자신의 견해를 제한한다.13) 그 대표적인 예로 등장하는 것이 파업인데, 벤야민은 계급투쟁과 관련하여 어떤 조건들 아래에서는 파업이 순수수단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면서 소렐에 의지하여 두 가지 종류의 파업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정치적 총파업이고 다른 하나는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이다. 이 양자는 폭력과 관련해서도 서로 대립하는데, 소렐에게 전자는 주인만을 단순하게 교체하는 것으로서 단순히 국가권력 또는 국가폭력을 강화하는 데 그치지만, 후자는 국가권력(폭력)의 타도 그리고 국가의 폐지라는 과제를 자신의 목표로 설정한다. 그래서 전자는 노동 조건의 외형적 변형만을 목표로 폭력을 작동시키기 때문에 법정립적인 반면, 후자는 국가의 폐지라는 점에서 무정부주의적이다.(이는 이후에 언급되는 신적 폭력과 연결된다. 특히 비테는 전자를 신화적 폭력으로 규정한다.14) 반대로 비테는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이 순수수단이자 비폭력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이것이 지배 자체를 소멸시키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동일한 것의 신화적 반복인 역사를 돌파하는 힘을 가졌다고 한다. 이것은 곧 신이 역사 안으로 돌입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15) 그래서 총파업과 함께 모든 고상한 것들이 사라져 버린다.16) 소렐은 이러한 혁명 상황이 본래의 폭력을 줄이는 데 어느 정도 적합한지에 대해 상세히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벤야민은 의사의 파업(작업 중단)과 같은 것을 무자비하고 불쾌한 그리고 비열한 폭력이라고 규정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파업이 생명의 방치를 전제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계급투쟁과 달리 벤야민은 외교사절들이 비폭력적 합의의 수단을 형성하는 데도 관심을 가진다. 이것은 사적 개인들 사이의 화합과 매우 유사한 방식을 사용하지만, 국가와 국가라는 공적이름으로 갈등을 해결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것이 중재 재판이라는 해결방식보다 상위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모든 폭력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사적인 개인들의 교류와 마찬가지로 외교관들 사이의 교섭은 고유한 형식과 덕목을 산출해왔다. 물론 이것이 나중에 겉치레로 타락했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벤야민은 이제 자연법에서 예상하는 폭력이든 실정법에서 예상하는 폭력이든 폭력의 전 영역에서 법적 폭력의 문제성에서 벗어나 있을 폭력은 하나도 없다고 규정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제 모든 법이론이 포착하는 폭력과는 다른 종류의 폭력이 있는지 어떤지에 대한 물음이 필연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법 이론이 포착할 수 없는 폭력이 있을까? 그리고 정당화된 수단을 투입하는 데서 볼 수 있는 운명과 같은 폭력이 정당한 목적 자체와 화해할 수 없는 대립관계에 놓이게 된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리고 “동시에 이 목적들에 대해, 정당화된 수단도 아니고 정당화되지 않은 수단도 아니며, 수단과는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종류의 폭력이 예측될 수 있다면 어쩔 것인가?”(진, 160)17) 여기서 일종의 (즉, 전망의 부재로 인한, 또는 새로 만들어지는 언어를 통해서는 아직 옳음과 그름을 판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상황) 결정불가능성의 문제가 등장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벤야민은 수단의 정당화와 목적의 정당성에 대한 결정의 문제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벤야민은 이러한 결정은 이성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전자에 대해서는 운명적 폭력이 후자에 대해서는 신이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벤야민은 이러한 언급이 다소 익숙하지 않다면, 이는 정당한 목적을 법적 목적, 다시 말해 정당할 뿐만 아니라 보편화 가능한 목적으로 생각하는 지배적 습관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사실 두 상황이 유사한 듯 보여도, 한 상황은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목적이 다른 상황에서는 전혀 그럴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벤야민은 일상 생활에서 등장하는 ‘분노’를 보라고 한다. 분노는 가장 가시적으로 폭력을 분출시키는데, 이때의 폭력은 미리 확정된 목적에 수단으로서 관계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수단이 아닌 발현(Manifestation)이다. 벤야민은 이를 통해서 이 폭력 즉 신화적 폭력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18)
벤야민에게 신화적 폭력은 신들의(Göttler) 순수하고 단순한 발현이다. 신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도, 신들의 의지의 발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신화적 폭력은 일차적으로 신들의 현존재(Dasein)의 발현이다. 예컨대 벤야민은 아폴로와 아르테미스의 행동에서 법위 위반에 대한 처벌이 아닌 법의 정립을 목격한다. 니오베의 오만함이 불운을 불러내는 것은 오만함이 법을 침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운명이 이길 수밖에 없는 그래서 이 운명의 승리 덕분에 법이 출현하게 되는 싸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고대인들에게 위에서 등장하는 신의 폭력은 법보존적인 처벌의 폭력과 확실히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예컨대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영웅은 운명에 도전하고 이에 맞서면서 이 영웅이 인간에게 새로운 법을 가져다주리라는 희망을 남긴다. 이와 유사하게 오늘날 대중들이 대범죄자에게 감탄하면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영웅들이 타고난 신화의 법적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은 파괴적이지 않다. 특히 니오베의 경우에 니오베의 자식은 죽을지라도 어머니인 니오베는 죽지 않으며, 대신 자식의 죽음 덕분에 니오베는 영원히 침묵하는 처벌을 받은 자가 되면서 동시에 신과 인간의 경계석(새로운 법의 정립)이 된다.19)
벤야민은 신화적 발현들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직접적 폭력이 법정립적 폭력과 가깝고 심지어 동일하다고 본다.20) 이때 법 정립적인 폭력은 이중적인데, 우선 법 정립은 폭력을 수단으로 해서 제정된 것(제정된 법)을 자신의 목적으로 추구하지만, 자신이 목표로 삼은 것을 법으로 제정하려는 바로 그 순간 폭력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엄밀하게 직접적으로 그러한 폭력을 법정립적인 폭력으로 만든다. 그래서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법의 정립이 폭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폭력과 필연적이고 내밀하게 연루되어 있는 목적을 권력(Macht)의 이름 아래 법으로 제정하기 때문이다.”(진, 162)21) 이제 법의 정립은 곧 권력(Macht)의 정립이며, 그런 한에서 폭력의 '직접적인' 발현 행위이다. 이는 앞서 전쟁법과 관련하여 법정립적 폭력이 매개적이었다는 것을 넘어서 법정립적 폭력의 직접성이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벤야민은 신화적 폭력의 원초적 이미지의 형태가 신의 단순한 ‘발현(Manifestation)’에 있다고 보는데, 이런 의미에서 법 정립은 신화적 폭력에 가까운 것으로 성립하는 셈이다. 이제 정당성, 혹은 정의는 모든 신적 목적 정립의 원리이며, 권력(폭력)은 모든 신화적인 법정초의 원리이다. 이제 법 제정은 곧 권력(폭력)의 제정이자 법 혹은 폭력의 발현이 된다. 이는 아마 법적 효력의 발생이라는 말과 의미가 상통하는 것이지 싶다.
이제 신화적 법정립의 원리인 권력을 국법에 적용하면, 엄청난 결과가 발생하게 된다. 전쟁 이후의 평화와 같은 ‘경계설정’이 바로 국법의 역할인데, 이것이 곧 법정립적 폭력의 원초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법정립적 폭력에 의해 보호받아야 하는 것은 정작 전리품이 아니라, 권력이라는 사실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벤야민에 따르면 경계들이 확정되는 곳에서 적은 단순히 전멸하지 않고, 승자의 무력이 압도적임에도 불구하고 적에게 권리가 인정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계약 당사자 쌍방에게 넘어선 안 되는 똑 같은 경계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넘어서면(위반하면) 안 되는 법률들의 동일한 신화적 이의성(애매성)이 끔찍한 원형의 형태로 등장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법을 보증할 수 있는 것인 폭력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떠한 평등성(동등성)도 존재하지 않고, 기껏해야 동등하게 거대한 폭력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경계를 설정하는 행위는 법에 대한 또다른 인식을 제공하는데, 그것은 바로 ‘속죄’이다. 이는 법률의 범위를 한정 짓는 데 있어서 원시시대에는 불문율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모르고 이 경계를 넘게 되면, 처벌이 아니라 속죄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위반이 법의 관점에서는 우연이기보다는 운명이며, 법은 여기서 자신의 의도적인 애매성(이의성)을 다시 보여준다. 그래서 헤르만 코헨은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침해, 이러한 위반을 유발하고 초래하는 것은 바로 운명들의 질서들 자체인 것 같다.”(진, 163.)22) 그는 이를 불가피한 통찰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상황에서 직접적 폭력의 신화적 발현(법적립적 폭력의 발현)은 좀 더 순수한 폭력의 영역을 열어놓기보다, 자기 자신을 모든 법적 폭력과 심층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드러낸다. 덕분에 신화적 폭력은 신적 폭력의 등장을 파괴하는 것이 과제로 제기된다.(진태원 164쪽 참고.)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영역에서 신화에 대해 신이 맞서듯이 신화적 폭력에도 신적인 폭력이 맞선다. 그것도 후자의 폭력은 모든 면에서 전자에 대한 반대상을 가리킨다. 신화적 폭력이 법정립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를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가 없으며, 신화적 폭력이 죄를 부과하면서 동시에 속죄(sühnend)를 시킨다면 신적 폭력은 죄를 면죄(entsühnend)주고, 신화적 폭력이 위협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내리치는 폭력이고 신화적 폭력이 피를 흘리게 한다면 신적 폭력은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죽음을 가져온다.”(최, 111)23) 이러한 폭력의 사례로 벤야민은 성경, 민수기 16장에 나오는 고라의 무리에 대한 신의 심판을 니오베의 전설과 대립시킨다.24) 여기서 신은 특권(Vorrecht)25)을 누리던 레위족 사람들을 경고나 위협도 없이 내리치고 말살한다. 그런데 이 신은 이 말살을 통해 동시에 면죄시키기도 한다. 여기서 피를 흘리지 않는다는 것과 면죄한다는 것의 관계가 성립된다. 이런 점에서 “신화적 폭력은 자기 자신을 위해 순수하고 단순한 생명에 가해진, 피를 흘리게 하는 폭력이며, 신의 폭력은 생명체 자신을 위해 모든 생명에 가해진 폭력이다. 첫 번째는 희생을 요구하며, 두 번째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떠맡는다.”(진, 165.)26) 우리는 앞서 벤야민이 정치적 총파업과는 대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이 국가 권력 또는 국가 폭력의 파괴라는 단 하나의 과제를 설정한다고 언급한 점을 기억해야 한다.(진, 157 참고.)
신의 폭력은 종교적 전통뿐 아니라, 일상적 삶 속의 단편 속에서 생겨나는 신적인 것의 발현 안에서도 발견된다. 이것은 모든 법정립의 부재로도 정의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은 파괴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순수한 폭력이지만, 이것은 재화들, 법 생명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들과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파괴적인 것이다. 이것이 절대적으로 파괴적이지 않은 이유는 결코 살아 있는 자의 영혼과 관련해서는 파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수한 폭력, 즉 신의 폭력으로부터 그리고 이것의 확장으로부터 치명적인 폭력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연역적 추론이 생겨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살해 불가능성’이 하나의 계율로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것은 신이 이미 가로막고 있는 행위의 지침이지 판단의 척도나 근거가 아니다. 이렇게 해서 벤야민은 생명의 신성함에 대해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고 간단히 언급한다.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폭력의 비판은 폭력의 역사에 대한 철학이다. 역사에 대한 ‘철학’이라고 한 이유는 역사의 출발점에 대한 이념만이 이 역사의 시간적 자료를 비판적, 식별적, 결정적으로 위치시킬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것만을 주시하는 시선은 기껏해야 법정립적이고 법보존적인 폭력의 형성에서 나타나는 변증법적인 상승과 하강만을 알아차릴 뿐이다.”(진, 167-168.)27) 이렇게 되면 법보존적 폭력이 지속되는 동안 적대적 대항 폭력들이 억압됨으로써 법정립적 폭력이 간접적으로 약화된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는 새로운 폭력들 내지는 이전에 억압된 폭력들이 지금까지 법정립적이었던 폭력을 제압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법(이 또한 새로운 타락을 맞게 되는데)을 정립할 때까지 계속된다.28) 그래서 벤야민은 새로운 역사적 시대가 신화적 법형식들의 마법적인 원환, 즉 법보존적 폭력이 법정립적 폭력을 약화시키는 마법적 순환적 관계를 돌파하는 데 근거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동시에 벤야민에게 신적 폭력이란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으로서 신화적 폭력이 갖는 마법적 순환적 운동을 근거 짓는 초월적 조건으로 볼 수도 있다.29) 그래서 새로운 역사의 시대가 법을 탈정립하는 것에, 그리고 법과 더불어 법에 의존하는 폭력들처럼 그 법이 의존하는 전체,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국가 권력(폭력)을 탈정립하는 것에 근거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시대는 인간이 발현하는 최상의 순수폭력인 혁명적 폭력이 가능한 시대를 말한다. 우리는 이것이 어떤 경우에 실현될지 결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신의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산회적 폭력만을 인식할 수 있지 신의 폭력을 인식할 수는 없다. 신화가 법과 더불어 서출화한 모든 영원한 형식들은 다시 한 번 순수한 신의 폭력에 노출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다만 신화적 폭력, 곧 개입하여 통제하는(schaltend) 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법정립적 폭력을 거부해야만 하는 과제가 남아 있을 뿐이다. 물론 우리는 법보존적 폭력, 즉 통치하는 폭력에 봉사하는 관리된(verwaltet) 폭력 역시 거부해야 한다. 따라서 성스러운 집행의 옥새와 인장이지 결코 수단은 아닌 신의 폭력은 아마도 베풀어 다스리는(waltend)30) 폭력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1) 벤야민은 이 논문 전반에서 ‘정의’를 법의 목적과 관련해서 논의하고 있음에 유의하자. 이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아감벤, ������예외상태������, 119 참고.
2) 여기서 벤야민이 자연법주의에서 ‘경우’를 강조하는 것은 이후에 등장하는 자연법주의에 따라 폭력을 연구하는 것이 ‘결의론’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비판하는 것과 연결된다.
3) 결의론은 기존의 신학적, 도덕적 기본 원리 또는 교회나 사회 등의 관습적 규칙들의 타당성을 가정한 가운데, 구체적인 사오황에서 개인의 행동이 신학적,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인지를 판단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는 스토아학파와 가톨릭 도덕신학에서 발전되었는데, 법학의 경우에는 법률적으로 규제된 정황에서 출발하여 개별적인 사례들에 대해 법적 판결을 하는 방식이나 시도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기독교에서 결의론은 특히 예수회원들에 의해 옹호되었는데, 여기서의 결의론은 인간의 자립적 활동을 구속하고 정신적 예속을 강요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4) “현재 유럽의 입법 상황의 일반적 준칙을 표명하자면, 개인의 모든 자연적 목적들은 그것이 다소 큰 폭력을 가지고 추구된다면 법적 목적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최성만 역, 85.)
5) “사람들은 개인에 대해 법이 폭력을 독점하는 데 관심을 갖는 것은 법적 목적을 지키려는 의도 때문이 아니라 법 자체를 지키려는 의도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놀라운 가능성을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각각의 법의 수중에 놓여 있지 않은 폭력은 그 법에 휘험으로 작용하는데, 그 이유는 그 폭력이 추구하는 목적 때문이 아니라 그 폭력이 법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점을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최, 86.)
6) 최, 96.
7) 고현범, 「현대 폭력론에 대한 연구」, ������대동철학������ 50집, 대동철학회, 2010, 78쪽을 참고.
8) 조르조 아감벤, ������목적없는 수단������, 난장, 119쪽.
9) 최, 96.
10) 최, 97.
11) 최, 98.
12) 최, 98. 원서는 벤야민 전집 II-1의 S. 191. 여기서 순수수단이란 벤야민에게 목적과 대립하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과의 관계에서 벗어난 수단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수단(Mittel)이라는 단어는 독일어 표현상, 매개나 중간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는 것에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진, 154 각주 11번 참고.) 우리는 또한 벤야민이 이런 의미에서 순수한 수단을 진심을 통한 일치와 연결시키며, 비폭력성의 중단 또는 지배의 중단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대화, 사랑, 심지어 지배를 제거하려고 했던 운동인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이 사례로 끌려나올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순수한 수단이 어떤 것을 위한 목적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순수한 수단이 된다. 그러니 지배의 제거나 비폭력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지배와 현재의 폭력을 ‘중단’시킨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순수한 수단이 된다. 그리고 이 순수한 수단으로서의 순수한 폭력 개념이 등장한다.
13) 요약자 주: 하버마스는 사적 영역에 속했던 공론장이 정치영역으로 번져나가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순수수단이 정치화 그리고 법제화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공론장의 의회로 대표되는 제도적 공론장과 그렇지 않은 공론장으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의사소통행위이론을 통한 합의론으로, 이어서 절차적 민주주의론으로 발전된다. 좀 더 자세히 언급하면, 하버마스는 절차적으로 규제된 공론장(이것이 제도화된 형태가 의회이다.)과 그리고 일반적 공론장으로서의 공론장을 구분한다. “일반적 공론장은 한편으로는 의회의 제도화된 공론장에 비해 불평등하게 분배된 사회적 권력과 구조적 폭력과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의 억압적 영향과 배제적 결과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정도가 심하다. 다른 한편 그것은 무제한적 의사소통 매체의 장점을 갖는다. 이 매체 속에서 절차적으로 규제된 공론장에 비해 새로운 문제들이 더 민감하게 지각되고, 자기이해의 담론이 더 광범위하고 더 표현적으로 이루어지며, 집합적 정체성과 욕구의 해석이 더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다. 비공식적 여론은 이상적으로는 권력에 장악되지 않은 정치적 공론의 구조 속에서 형성되는데, 민주주적인 의견형성과 의지형성은 이 비공식적 여론의 공급에 의존한다. 그리고 비공식적 공론장은 다시 평등한 시민권이 사회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그러한 사회적 기초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하버마스는 이 기초를 사회적 계층화와 착취의 족쇄를 깨버린 기초이며, 이 기초 위에서만 문화다원주의적 잠재력이 완전히 개화된다고 표현한다.(FG, S. 373-374, ������사실성과 타당성������번역본은 374-375 쪽.)
14) 베른트 비테, ������발터 벤야민������, 한길사, 2001, 61쪽 참고.
15) 이에 대해서 비테, 2001, 62 참고.
16) 이러한 언급은 맑스의 공산당선언에 나오는 “모든 견고한 것들은 대기 중으로 사라진다.”라는 언급과 유사하다. 그리고 마샬 버만은 이것을 ������현대성의 경험������이라는 책의 표제문으로 내세운다.
17) 최, 106.
18) 벤야민은 일단 개별적 상황과 관련된 폭력을 직접적으로 분출되는 일상적 ‘분노’에 의한 폭력으로 제시한다. 우리는 매일 매일 화가 치미는 크고 작은 상황과 부딪히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분노가 유발하는 폭력은 수단이 아니라 발현이다. 이 발현이라는 말과 함께 벤야민은 신들의 존재의 발현으로서 신화적 폭력을 논의한다. 그런데 벤야민에게 이러한 신화적 폭력은 법 정립적 폭력과 동근원적이다. 이것은 권력의 설정이며, 폭력을 직접 발현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언급에 대해서는 고현범, 「현대 폭력론에 대한 연구」, ������대동철학������ 50, 2010, 84쪽을 참고.
19) 니오베는 탄탈로스의 딸이고 테바이의 여왕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명성, 아름다움, 권력 등 그 모든 것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중에서도 그녀가 가장 자랑스러워한 것은 바로 자식들로 일곱명의 아들과 일곱명의 딸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테바이에서는 매년 레토와 그녀의 자식인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를 기념하는 축제가 열렸다. 이때 군중속에 나타난 니오베는 거만한 태도로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티탄의 딸이고 자식도 둘밖에 없는 레토를 모욕하기 시작했고 그 어느 여신보다 모자랄 것이 없는 자신을 숭배하지 않는 사람들을 탓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니오베의 명령에 복종해 제전을 중단하였다. 레토는 이에 분개했고 아들과 딸을 불러 복수하게 했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는 그 즉시 날아가 니오베의 아들들을 차례로 화살로 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아들을 모두 잃은 슬픔에 니오베의 남편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 아들을 모두 잃었지만 아직 딸들이 남아있었다. 니오베는 그때까지도 여신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딸 하나가 화살에 맞아 쓰러지더니 차례로 여섯 딸들이 죽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딸 한명을 끌어안으며 니오베는 살려주기를 간청했지만 곧 마지막 딸까지 죽었다. 니오베는 죽은 자식들과 남편 곁에 앉아 슬픔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에게 살아있는 기색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니오베의 마음도 몸도 모두 돌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눈물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회오리바람에 실려 고향 산에 운반되었다. 지금도 한 바윗덩어리로 남아 있는데 그 바위로부터는 물이 졸졸 흐르고 있다. 그것은 니오베의 끊임없는 슬픔을 말해주는 것이다.
20) 신화적 발현을 우리의 일상에서 경험한다면 어떤 것일까? 뒤르케임 식의 사회적 금기로서의 도덕이라는 신성을 침해하는 대범죄자의 처벌을 통해, 새롭게 법이 정립되고, 그 범죄자가 새로운 법의 경계석으로 남게 되는 그런 상황일까? 예컨대 조두순이나 김길태같은 사람들이 이념이나 도덕을 침해당한 대중의 분노의 발현(Manifestation)을 통해 아동보호법이나 성폭력방지법을 새롭게 정립하도록 하는 것처럼 말이다.
21) 최, 108.
22) 최, 110.
23) 진, 164. 여기서 내리친다는 것은 ‘중단’시킨다는 의미와 연결되는데, 이는 곧 법 파괴적인 것이며, 법을 압도하는 폭력이며, 모든 법 정립의 부재와 연결되는, 그래서 종국에는 국가 폭력을 탈정립(Entsetzung)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법 정립적 폭력, 즉 신화적 폭력이 설정하는 경계란 권력의 경계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옳고 그름을 가늠하는 정의의 경계는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고현범, 85쪽 참고하라. 그런데 이러한 중단은 이미 그의 역사철학 테제의 역사의 결에 반하여 역사를 솔질한다는 표현과 연결되며, 이것은 그의 메시아주의와 연결 된다. 그리고 여기서 피는 순수하고 단순한 생명(bloßen Leben)의 상징이다.
24) 여기서 고라의 무리는 광야에서 모세의 권위와 권력에 대항하는 사람들인데, 신은 이들을 땅을 갈라지게 하여 그 속에 묻어버린다. 그리고 남아 있는 세력들에게는 염병을 내려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다.
25) 여기서 벤야민은 이 특권과 관련하여 앞에서 왕, 귀족 그리고 권력가들이 누리는 것이라는 설명을 한다. 요약에서는 이를 삭제했다. 이에 대해서는 진, 163쪽 또는 최, 109쪽을 참고하라.
26) 최, 111-112.
27) 최, 115.
28) 그렇다면 벤야민은 폭력 비판이 가까운 것과 먼 것을 동시에 보는 시선을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셈인데, 이는 아우라에 대한 벤야민의 정의, 즉 ‘가까운 것과 먼 것의 동시적 현현’이라는 정의와도 관련된다. 벤야민의 아우라 정의는 다음과 같다. “도대체 아우라란 무엇인가? 공간과 시간의 기묘한 얽힘이다. : 가까이 있을 수 있는 먼 것의 일회적 출현. 무더운 여름 오후에 고요히 휴식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던지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혹은 나뭇가지에서 생겨나는 것. 다시 말해 이 산의 아우라, 이 가지의 아우라가 숨을 쉬고 있다.” W. Benjamin, Walter Benjamin Gesammelte Schriften Bd. II-1, Frankfurt a. M., Suhrkamp, 1977, S.378.
29) 이에 대해서는 고현범, 86쪽 참고.
30) 진, 169에는 waltend를 주권적이라 번역했는데, 이렇게 번역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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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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