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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독서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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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소년이 온다󰡕 기억에 남길 구절들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소년이 온다󰡕 95쪽에서 인용된 글)

 

좁은 공간에 백명 가까운 남자들이 빈 공간 없이 앉아 있었으므로, 온몸에서 비 오듯 땀이 흘렀습니다. 목덜미를 스멀스멀 기어내려가는 것이 땀인지 벌레인지 구별할 수도, 확인할 수도 없었습니다. 땀을 흘린 만큼 목이 탔지만, 물을 마실 수 있는 건 하루 세 번 식사 때뿐이었습니다. 오줌이라도 받아 마시고 싶었던 동물적인 갈증을 기억합니다. 갑자기 졸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 그들이 언제든 다가와 내 눈꺼풀에 담뱃불을 문지를 거라는 공포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배고름을 기억합니다. 꺼진 눈두덩에, 이마에, 정수리에, 뒷덜미에 희부연 흡반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던 배고픔. 그것이 서서히 혼을 빨아들여, 거품처럼 허옇게 부풀어오른 혼이 곧 터뜨려질 것 같던 아득한 순간을 기억합니다.

*

그곳의 한끼 식사는 식판에 담긴 밥 한줌과 국 반그릇, 김치가 전부였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21조로 나눠 먹었습니다. 김진수와 한조가 되었을 때, 서서히 혼이 빨려나간 짐승과 같은 상태였던 나는 안도했습니다. 그는 많이 먹을 것 같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얼굴이 창백하고 눈언저리는 병자처럼 어두웠으니까요. 두 눈은 생기도 표정도 없이 공허하게 번쩍였으니까요.

한달 전 그의 부고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그 눈이었습니다. 멀건 콩나물국에서 콩나물을 골라 먹다 말고 멈칫 나를 보던 눈. 그가 콩나물을 다 먹어버릴까봐 긴장하고 있던 나를, 우물거리는 그의 입술을 혐오하며 쏘아보고 있던 나를 묵묵히 마주 바라보던, 나와 똑같은 짐승이었던 그의 차갑고 공허한 두 눈.

(󰡔소년이 온다󰡕 106-107. 󰡔호러리즘󰡕에서 무젤만을 통해 인간의 존재론적 파괴가 언급되고 있다. 배고픔, 공개적 배설, 수저 없는 야만적 식사가 결국 그 존재를 파괴해나간다는... 그와 유사한 내용이라서 기록해둔다. 예전에 전교조 해직 교사의 복직 등을 사범대 후배들이나 교수들이 혐오하고 비난하던 때가 있었다. 내게는 그 상황이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면에 일만의 밥그릇 싸움을 조장한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밥그릇 싸움을 누가 조장하느냐 하는 것이며, 그 조장자가 결국은 은폐된 채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는 데 대부분 성공한다는 사실이다. 전교조가 문제가 많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밥그릇의 규모를 크게 해야한다는 상상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그런데, 사실 눈 앞의 배고픔이라는 물리적 현실 앞에서 누가 그런 의연한 상상을 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자신있다고 장담 못하겠다. 몸뚱어리를 가진 인간이므로....)

 

*

다음의 일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 기억하라고 나에게 말할 권한은 이제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선생도 마찬가집니다.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마지막 전남 도청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 고백을 거부하는 고백의 고통이 담겨있던 아이러니한 표현들 표현하고 싶지 않지만 표현하게 되는 이상한 문장들의 연속..... 󰡔소년이 온다󰡕, 117. 이에 이어 그 아이러니한 증언은 계속 이어진다.)

 

여기 직선으로 쓰러져 죽어 있는 아이들에 대해 선생에게 말해야 합니까?

무슨 권리로 그걸 나에게 요구합니까.(󰡔소년이 온다󰡕, 132)

........

저 새끼들 봐라, 김진수의 등을 발고 있던 장교가 여전히 흥분한 채 소리쳤습니다. 씨팔 빨갱이들, 항복이다 이거냐? 목숨은 아깝다 이거냐? 한발은 옂히 김진수의 등에 올린 채 그는 M16을 들어 조준했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학생들에게 총을 갈겼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봤습니다. 씨팔, 존나 영화 같지 않냐. 치열이 고른 이를 드러내며 그가 부하를 향해 말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진에서 이 아이들이 나란히 누워 있는 건, 이렇게 가지런히 옮겨놓은 게 아닙니다. 한줄로 아이들이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시킨 대로 두 팔을 들고, 줄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소년이 온다󰡕, 133.)

 

(그리고 아이러니한 증언은 또 이어진다.)

기억해달라고 윤은 말했다. 직면하고 증언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아넌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소년이 온다󰡕, 166-167.)

 

*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소년이 온다󰡕, 117.)

 

(두 명이 하나의 식판으로 밥을 먹다가 싸우던 상황에서 화자의 반성이 나오는 구절)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소년이 온다󰡕, 119. 최근 영화 <내부자들>의 개, 돼지 발언이나, 교육부 나향욱 정책기획관의 개, 돼지 발언과 이어지는 구절이다.)

 

*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내가 겪은 일들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묽은 진물과 진득한 고름, 냄새나는 침, , 눈물과 콧물, 속옷에 지린 오줌과 똥. 그것들이 내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아니, 그것들 자체가 바로 나였습니다. 그것들 속에서 썩어가는 살덩어리가 나였습니다.

지금도 나는 여름을 견디지 못합니다. 벌레 같은 땀이 스멀스멀 가슴팍과 등으로 흘러내리면, 내가 살덩어리였던 순간들의 기억이 고스란히 돌아와 있는 걸 느끼며 깊은 숨을 쉽니다. 이를 악물고 더 깊은 숨을 쉽니다.

 

*

각진 각목이 어깻죽지와 등허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 곧은 물성대로 활짝 펴지며 내 몸을 비틀 때,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헐떡이는 일초와 일초 사이, 손톱과 발톱 속으로 그들이 송곳을 꽂아넣을 때, , 들이쉬고, 뱉고,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신음, 일초와 일초 사이, 다시 비명, 몸이 사라져주기를, 지금 제발, 지금 내 몸이 지워지기를,

(󰡔소년이 온다󰡕, 120-121. 증언불가능한 고통도 이해 가능성으로 집어넣는 아렌트의 언급을 막 번역했다. 이해 하는 것은 전례를 통해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응대하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추론이 아닌 이해에 대한 독특한 해석... 그런데 이 이해는 생존자의 이해라는 점. 그렇다면 당사자는 추론도, 이해도, 증언도 불가능한 완전한 무능성에 노출되어 있질 않나. 결국 캬바레로가 호러리즘이라고 일컫는 부분. 아렌트가 간과하고 있는 폭력.....)

 

*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

부마항쟁에 공수부대로 투입됐던 사람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 가능한 한 과격하게 진압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그가 말했습니다. 특별히 잔인하게 행동한 군인들에게는 상부에서 몇십만원씩 포상금이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 베트남전에 파견됐던 어느 한국군 소대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들은 시골 마을회관에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을 모아 놓고 모두 불태워 죽였다지요. 그런 일들을 전시에 행한 뒤 포상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중 일부가 그 기억을 지니고 우리들을 죽이러 온 겁니다. 제주도에서,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모든 신대륙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유전자에 새겨진 듯 동일한 잔인성으로.

......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소년이 온다󰡕, 134-135.)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소년이 온다󰡕, 211. 이 대목에서 끝내 울음이 터졌다. 황량한 몽골 비포장 도로에서 창밖을 한참 볼 수밖에 없었다. 왜 그리 울림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러고 보니 소설 중 광주의 증언을 통해 논문을 쓰고 기억으로 남기려는 학생과 한강의 작가적 위치가 묘하게 겹쳐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희생당한 중학생인 동호가 발간지럼을 너무 잘 타서 발가락 싸움을 하면 늘 형이 이기더라는 일상이 뒤따른다. 그 일상이 갑자기 끊어져버린 사람의 이야기다.)

 

뒤이어 시민을 쏘지 않았던 군인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소년이 온다󰡕, 212쪽 참고.)

그리고 광주 사람들을 희생자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 남았던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한강은 그들을 기억하며 이렇게 말한다.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소년이 온다󰡕, 213.)

그리고 소년이 이끄는대로 한강이 또는 우리가 걷는다.

 

한강의 기록은 구묘역에서 신묘역으로 이장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날을 받아 유족들이 다 같이 이장을 했는데, 관들을 열어보니 처참했던 모습 그대로인 겁니다. 유골에 비닐이 친친 둘러져 있고, 피묻은 태극기가 덮이고 …… 동호는 그래도 처음에 가족이 수습했기 때문에 유골이 얌전했습니다. 우린 무명천을 한마 끊어가서, 누구에게도 맡기기 싫어 뼈 한마디 한마디를 직접 닦았어요. 어머니가 머리 부분을 맡으면 충격이 크실까봐, 내가 얼른 집어서 이빨 하나하나까지 정성껏 닦아줬습니다. 그랬어도 그 일을 이기기가 힘드셨던가봅니다 그때 내가 우겨서 집에 계시게 했어야 했는데.(󰡔소년이 온다󰡕, 214)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한 번에 죽은 동호를 다행이라고 말하는 유족, 다른 학생은 총맞고 죽지 않았다가 확인 사살을 당했는데, 이마 중앙에 구멍이 뚫리고 두 개고 뒤쪽은 텅 비어있었다는... 나는 여기서 아르메니아인의 학살을 다룬 사진이 같이 떠올랐다. 폭력과 고통은 이렇게 국경을 뛰어넘어 즉각 연결되는 것일까? 이 호러의 세계, 이 호러의 역사 그리고 현재를 어찌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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