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

toward73
- 공개여부
- 작성일
- 2009.2.4
※ 벤야민과 카발리즘 (수잔 벅 모스의 �아케이드프로젝트� 중에서)
수잔 벅 모스에 따르면 벤야민의 카발리즘 수용은 맑스적 혁명적 교수법을 위한 형이상학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런 카발리즘은 숄렘이 정의하길, “전통을 통해 받아들인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카발리즘은 유대교의 ‘전통’하고 실제로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유대교의 전통은 신성한 텍스트를 읽기 위한 해석학적 방법론과 연결되어 있으며, 권위 있는 랍비 철학이 정설로 받아들인 것과 관계 있는데, 카발리즘은 일종의 신비주의로서 텍스트의 숨겨진 의미를 읽으면서 씌어질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의도에 따라 텍스트를 해석하는 역사주의적 접근을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은 본래적 의미를 복원하려 하지도 않았고, 역사적 정확성 같은 외부적 문제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창작에서 기쁨을 느꼈으며, 그들의 해석은 랍비 철학이 정설로 받아들인 것과 거리가 멀었다.(수잔 벅 모스, �아케이드 프로젝트�, 문학동네, 301-302쪽) 벅 모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전통에 관심을 가진 것은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형하기 위해서였다.”(302쪽)
그런데 여기서 드는 한 가지 생각, 그렇다면 벤야민이 복원하려는 과거의 파편은 결국 전통을 기억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전통을 현재의 맥락과의 충돌을 통해 기억해내려는 활동인 셈이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이 이러해야 할 것이다. 복원되지 않은 과거의 복원이 과거 그대로 맥락초월적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재의 권력을 파괴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로 ‘기억’을 끄집어낸다면, 나는 그 기억이 벤야민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한다. 망각이 기억으로 환원되는 파편의 귀환을 우리가 어떻게 환대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맑스주의와 결합된 벤야민의 카발리즘 속에 들어난 메시아주의를 떠올릴 것이며, 이 메시아는 현재 우리에게 복원을 기다리는 수많은 망각과 무의식 속에 침잠되어 있다. 이들이 결국 내 사유의 결을 부수고 임재 할 것이다.
결국 카발리즘에 따르면 과거의 텍스트가 없으면 현대의 현실적 진리를 해석할 수 없지만, 현실은 텍스트를 읽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형한다. 결과적으로 “기존의 조합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302)되며 전통의 상징들이 전통을 파괴하는 위력을 갖는다. 기억된 과거는 “과거와 단절되기 위해 과거를 존중하는 셈이다.”(302)
이러한 존중은 벤야민에게 역사를 해석하는 인류의 책임과 연결된다. 이것은 결국 사물의 주어진 상태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죄’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이 해석의 결과 그래서 새 자연의 사회주의적 잠재력을 폭발시키는 해석의 결과는 이러한 패배주의적 운명 수용 혹은 역사적 실패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결국 기억 구원 이름붙이기는 벤야민의 이론에서 하나의 계열을 이루는 셈이다.(310-311쪽) 이 때문에 벤야민에게 반성적 태도는 회상이며, 알레고리를 발견하는 산책자들은 ‘회상’을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312쪽) 이게 독일어로 Erinnerung인데, 이건 곧 상기하다는 의미를 지니다. 결국 ‘회상’ 역시 ‘기억’활동에 해당하는 것이다. 벅 모스에 의해 인용된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명상자의 기억은 너절한 죽은 지식 더미를 지배한다. 인간의 지식은 그런 것들을 이상하게 의미 있는 방식으로 짜맞춘다. 자의적으로 잘린 조각들을 모아서 퍼즐을 맞추는 것이다. .... 결과는 결코 예측할 수 없다. 두 항목 사이에는 아무런 자연적 매개가 없기 때문이다.”(312)
그리고 산책하는 명상자들의 행위는 이내 사용가치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사물들을 모으는 수집가의 행위로 연결된다.(312쪽)
결국 그에게 이런 일련의 행위들은 세속적인 연속체로서의 역사를 중단하는 ‘중지’행위로서의 구원과 연결되고, 이러한 구원은 메시아가 역사에 침입하는 ‘지금-시간’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해석작업과 새로운 의미의 발생이라는 사건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철학에서 정치적 행위가 해석되는데, 그에게 정치행위란 “두 층위의 역사적 시간을 연결하는 것이다.” 여기서 두 층위란 경험적 여사의 선형적 진행을 의미하고, 다른 한 층위는 메시아적 시간의 층위이다. 구원은 경험적 역사에서 메시아적 시간의 흐름으로 ‘순간’적으로 수직 상승 하는 것이다.(314쪽)
벅모스는 이러한 비약적 도약의 시간이 ‘구원’의 이미지와 연결된다고 하고 있으며, 잠재성의 실현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집단 무의식(집단적 소망이미지)이 폭발력을 가지는 순간이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것을 그녀가 앞서 설명했던 교차축에 제3의 축을 첨가하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315-316)
그런데 여기서 드는 또 한 가지 생각. 근대의 침입과 식민지 경험이 일천했던 서구와 달리 동양은 식민지 근대화와 근대의 이식을 경험했다. 우리는 여기서 거짓메시아의 재림으로 서구 근대의 침입과 일본의 침입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비약적 타락을 상상할 수 없었던 벤야민과 달리 적어도 우리는 이런 경험을 통해 비약적 타락을 언급할 수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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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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