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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ward73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0.9.30
에티엔느 발리바르, 「주체」1)
(2010. 10. 2. 토.)
니체와 번역의 불가능성
발리바르는 최근 철학에서 ‘주체’의 범주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다고 언급한다. 그런 이러한 주체 문제의 핵심에 주체라는 라틴어의 번역과 관련된 말놀이가 있다. 한편에는 주체라는 말이 스콜라 철학 이후 철학자들이 지층 또는 지지대라는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 휴포케이메논(hupokeimenon)을 번역한 말, 즉 subjectum이라는 중성개념이라는 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종속적인 이란 의미를 가진 중세어 subditus라는 낱말과 같은 뜻을 가진 남성개념 subjectus가 있다.
※ 주체개념의 말놀이 1) 그리스어 휴포케이메논(hupokeimenon): 지층 또는 지지대-> 번역-> subjectum(중성) 2) 중세어 subditus: 종속적-> 동의어 = subjectus(남성) |
발리바르는 이제 subjectum과 subjectus라는 두 말의 유희를 검토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subjectum vs subjectus subjectum(지지대): 논리적, 문법적, 존재론적, 초월적 의미 subjectus(종속적): 법적, 정치적, 신학적인 의미 |
발리바르에 따르면, 이렇게 구별된 말들은 서로 구별되어 사용되는 역사를 겪지는 않았고, 오히려 칸트 이후 주체성(subjectivity)과 종속화(subjectivation)의 문제 지형을 둘러싸고 중층결정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상호결정의 방식은 이후 철학자들의 관심과 강조에 따라 선택적으로 강조되거나 억압된다.
이에 따라 발리바르는 니체의 �선악을 넘어서�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 내용을 불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주체’개념의 문제를 살펴본다. 여기서 더욱 재미있는 것은 니체가 여기서 번역의 ‘기만적 과정’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기만은 발리바르가 언급하고 있는 주체 개념의 불어 번역과정에서도 드러나는데, 이 번역에서 불어 번역문은 복종하는 주체와 의지하는 주체라는 낱말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명령행위와 복종의 효과 양쪽에 동일한 비중을 부여함으로써 니체의 텍스트가 ‘나’라는 환영을 향해 직접 가하는 공격과 비판을 피해간다. 오히려 불어는 이 과정에서 주체의 양면성을 더 강조하게 되는 효과를 가지는데, 여기서 언급되는 복종하는 주체는 동어반복이 된다. 반면 의지하는 주체는 모순에 가깝거나 아니면 그 반대처럼 보인다.
발리바르는 이 니체의 이 텍스트가 주체 개념의 구성과 용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언어적 긴장으로 우리를 몰아간다고 생각한다. 특히 주체의 해석과 관련한 신라틴어(특히 불어)적 패러다임과 독일어적 패러다임 사이의 긴장 말이다. 우선 신라틴어적 패러다임의 경우 주체의 종속화에 관한 체계적 고찰에서 1) 논리적, 존재론적이면서도 2) 정치적, 법적인 주체의 함의가 동시에 이용된다. 2) 독일어적인 패러다임의 경우 정치적 차원이 언어에 의해서 가려지거나 또는 차라리 번역의 내재적 체계로 강등되는데, 주체의 존재 양식과 법 또는 권력의 목록에 등록되는 주체 양식 사이의 관계는 자연에 대립하는 자유의 존재론에 의해 독점된다.(이런 언급은 다분히 칸트를 염두에 둔 것이지 싶다.) 물론 이 두 패러다임이 독자적으로 발전하지는 않으며, 두 패러다임은 모든 고전적 참조점들을 공유한다.
“데카르트적” 주체: 칸트적 발명
※ 여기서 발리바르는 데카르트적 주체 개념을 형이상학적 지위로 올려놓는 칸트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그러한 그의 번역이 가지는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이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발리바르는 데카르트가 왜 그러한 형이상학적 의미로 주체를 생각하지 않았는지를 강조한다. |
주체성(Subjektivität)는 사유하고 인식하고 지각력 있는(sentient) 개인, 외부적 대상들로부터 받은 영향의 결과물이 아니라 자체적 성향들(로크와 말브랑슈에 따르면 이차적 성질들)의 결과이며 개인의 내부에 존재하는 현상의 장이자 특질로서의 주체는 이미 바움가르템의 �미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요하힘 리터는 바움가르텐이 사용한 subjectum(독일어 Subjekt)은 추상적 개념 규정의 결과이지 전제는 아니다. 실제로 주체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이후에야 비로소 주체성이라는 철학적 개념으로 자리잡는다. 여기서 칸트는 1) 자연법적 객관성으로 접근할 수 있는 주체 개념을 윤리와 미학적 가치가 추구하는 보편성 개념과 결합시켜버린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2) 세계를 구성하고, 그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작용에 내재하는 일반적 개인성에 ‘주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제 칸트에 의해 주체는 존재의 질서라는 서술어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에 내재적인 규칙들이 된다. 즉 주체는 대상을 구성하는데 필수적인 서술어를 구성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체개념을 발명한 후 칸트는 이제 자신의 성과를 데카르트에 반성적으로 투영한다. 이 과정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우선 칸트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라는 테제가 자발성의 행동이지 감성(Sinnichkeit)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감성은 외부적 현상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인데, 나는 생각한다는 것은 이러한 주체의 모든 표상행위를 동반하기 위한 전제조건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것이 ‘순수 통각’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가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것이 여타의 다른 모든 표상들을 동반할 수 있는 조건이자, 표상 그 자체(나는 생각한다)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상행위는 그 자신을 참조하는 수준에 그치기 때문에 그 이상의 표상을 동반할 수는 없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칸트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것을 ‘순수통각’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순수한 통각은 주체가 행하는 모든 표상행위의 가능조건(선험성transzendental의 정의)이 되기 때문에 이런 주체는 선험적 주체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칸트는 이것이 단순한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칸트는 데카르트의 테제를 이렇게 변주한다. “나는 내가 생각한다고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여기서 칸트는 사유를 목표로 삼고 동시에 사유에 의해 목표로 설정되는 것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 또는 그런 존재를 ‘주체’라고 지칭한다. 이제 주체는 주체 자신을 개념화 할 수 있으며, 그 주체가 사유한 서술어들을 사유하는 주체가 된다. 그런데 발리바르는 바로 이점이 칸트가 두 가지 점에서 데카르트와 모순되는 부분을 생산한다고 생각한다. 1) 정작 데카르트는 �명상들�에서 코기토는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식의 실존적 명제로 환원되는데, 칸트는 이런 주체를 선험적인 주체로 결상시킴으로써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변모시킨다. 2) 데카르트는 단순한 문구인 ‘코기토’를 칸트와 같이 주체가 자신을 개념화하거나 술어를 사유하는 주체로 규범화하지도 않는다. 이처럼 주체를 선험적인 위치로 격상시킨 칸트 덕분에 이후 후설과 하이데거에게도 데카르트적 주체는 선험적 존재로 독해되었고, 그래서 이들이 데카르트를 ‘주체를 실체화했다.’고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이 모든 원인이 칸트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초월적 변증법으로 읽어내려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칸트의 입장으로 좀 더 들어가 보자. 칸트는 사유하는 ‘나’는 형상이 표상되는 장소에서 그것이 나타나는 그대로 알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자신을 오인하며, 이런 오인의 과정에서만 논리적으로 자신을 인식한다. 이런 주체는 현상계에 남아 있는 주체이다. 그러나 정작 논리적인 힘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자발성을 가진 자질로서의 주체는 또한 현상적이지는 않고 이미 선험적이다. 그래서 주체가 스스로를 사유하는 한에서 주체는 실체의 양식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나는 오직 나에게 나타나는 대로(현상적)만 인식할(선험적) 뿐이다. 발리바르는 칸트의 이러한 모순(환영적 vs 선험적 외관)에서 본원적 진리가 등장한다고 말한다. 결국 이 모순이 유일하게 가능한 진리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진리 그 자체이다. ‘주체’는 이제 이 놀라운 대립물들의 통일성을 표시하는 말이다.”(38)
그러나 여기서 발리바르는 칸트의 이러한 주체 설정이 또한 사유의 인식론적 명제들과 경험들에만 한정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예컨대 칸트의 주체는 1) 근본적으로 진리이며 실수이고 인식이면서 오인인 관계에서 등장하는 것으로 반성의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칸트적 주체는 2) 주체가 유혹을 받을 뿐 아니라(현상계) 정언명령 자체의 형태를 직관하도록 명령받는 다는 것을 통해서 의식적 지각이 열리는 존재이다. 이런 두 가지 특성으로 인해 이제 칸트적 주체는 자신의 재현을 현상계로부터 자유롭게 하라는 명령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주체는 ‘순수한’ 사유의 활동이라는 개념에 다가 선다. 이러한 주체는 현상계라는 필연의 영역과 상관없이 없을뿐더러, 오직 자유의 상관물로서만 의미를 가질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 덕분에 이제 선험적 주체는 도덕적 인격성과 동일시된다. 여기서 칸트는 주체를 비로소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나은 세상(목적의 왕국)의 시민이 될 수 있도록 구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인식론적 강조 덕분에 칸트의 주체는 결코 실천적인 정치적 차원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고 비판한다. (바로 이점이 칸트가 데카르트의 실천적-정치적 특성을 놓치는 부분이라고 뒤에서 지적하는 것과 연관된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칸트적 작업이 역사적으로는 시민의 주체되기, 즉 권리의 주체(법의 주체: Rechtssubjekt)라는 범주를 구상하는 것과 연결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칸트는 권리(법)의 주체(Subjectum juris)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없다. 이런 주체는 으레 주권과 법의 주체로서 정치적 주체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은 주체의 해방이나 그 자신을 해방하는 주체라는 관념을 발동시키기 마련인데, 이것이 칸트에겐 억압된 상태로 남아 있다.
Subjectus/ Subjectum: 낱말의 역사적 유희
독일어 Subjekt는 신민이나 신하를 의미하는 Untertan과 그 의미가 구분되는데,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태리어의 주체는 이와 달리 주체가 이중적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낱말들은 1) Subjectum(개별적 속성들의 행위주체)과 2) Subjectus(법이나 권력에 종속되어 있는 주체) 모두를 지시한다. 사실 자유와 강제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주체의 의미는 그리스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예컨대 hupokeimenon은 지지층의 하부층위를 말하는 것이며, hypostasis는 토대 또는 실체를 의미했으며, hypèkoos는 하인, 제자, 조공을 바치는 사신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발리바르는 라틴어로 방향을 트는데, 여기서는 구원으로 이르는 길로서의 ‘복종’이라는 개념이 드러나는 신학적 정치와 도덕적 인류학의 역사가 초점이 될 수 있다.
우선 법리학적 형상으로서의 subjectus(법이나 권력에 종속된 주체) 개념은 로마법에서 절대왕정에 이르는 17세기에 걸쳐 발전한다.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주체개념인 인간 개개인을 언급하는 것에서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개념으로 이동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를 위해 발리바르는 가이우스(Gaius)의 텍스트를 떠올리는데, 여기에는 두 종류의 인간 즉 스스로 독립적인(sui iuris:자신에게 의존적인) 사람과 다른 사람에 의존하는(alieni iuris) 사람이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의존하는 사람은 세 가지 유형으로 등장하는데, 1) 권력(potestas)에 놓여 있는 사람, 2) 다른 사람의 손, 즉 사법권에 놓여 있는 사람(manus) 그리고 3) 노예상태(manicipium)에 놓여 있는 사람이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세 종류의 의존적인 사람을 모두 통합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따라서 이들을 종합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절대적 권위(imperium)이다. 그래서 주체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종속이라는 개념은 제국과 함께, 즉 시민과 수많은 비-시민들이 ‘봉사’(officium)를 해야 하는 황제라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등장하는 것이다. 예컨대 로마민족의 주체들이라는 말은 로마인들이 imperium(절대권력)에 굴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일반화된 로마 시민권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물론 여기서 imperium은 기독교적 imperium, 즉 신으로부터 나오고 신에 의해 보존되는 영적 권력으로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설립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의미의 주체는 비록 종속되어 있지만, 노예는 아니다. 여기서 주체는 복종의 관계에 진입하게 되는데, 이 복종은 1) 통제할 권리를 가진 지배자와 이 권력에 굴복하는 이들 사이에 세워지는 것이며, 또한 2) 명령하도록 선출된 사람(sublimis)과 법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에게 향하는 사람(subditi 또는 subjecti) 사이에도 발생한다. 여기서 subditi는 자신의 복종이 창조와 구원의 경제로 기입(등록)되기를 원하며, 모든 권력이 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안다면, 자신은 충성을 다하는 충실한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안다. 그런데 이러한 복종의 개념은 전(특히 그리스)에 없었던 영혼의 개념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에서 ‘복종’이라는 것은 명령자와의 관계에서 우발적으로 등장하고 알게 되는 것이고, 또한 민주적인 폴리스에서 한 사람이 스스로 명령자,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시민이 되는 것이다. 이런 복종의 개념은 영혼의 특성보다는 자연적 의존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운 복종이라는 개념은 필시 모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후 노예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관념이 스토아철학과 함께 발생한다. 그래서 이후 노예도 주인일 수 있고, 상호적 연결고리(애정=우정 philia)에 의해 타자들에 묶여 있는 시민일 수도 있다. 이렇게 의미의 변환이 생기자마자, 복종은 해방이라는 개념과 체계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이를 위해 복종이라는 개념은 영혼으로 전이되어야 하고, 더 이상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복종이라는 개념은 질서의 신성함을 이해하는 개인의 초자연적인 부분에 이름을 붙여주어야 한다.
군주의 주권인 sublimes가 문자 그대로 노예주의 권위인 독재와 구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Subditus(종속된)-subjectus(법적 주체)는 노예로부터 지속적으로 구별된다. 그런데 이러한 근본적인 구별은 다른 방식으로 정식화 되었다. 신학적 전통 내에서 주체는 믿는 자이고, 기독교도이며, 이는 복종하는 영혼을 가진 자들이므로 결코 주권을 소유하는 사람(사물)이 될 수는 없다. 여기서 그의 복종은 군주의 책임감이나 의무와 일치한다. 이런 입장을 통해 주체가 자유를 사유하게 되면, 그 자유는 1) 복종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긍정하고 이에 기여하는 것으로 가거나(자율성) 아니면 2)그런 의지를 파멸시키는 것(무)으로 가게 된다. 이러한 파멸은 예컨대 신비주의자가 오직 절대주권인 신을 명상하면서 스스로를 파멸시키려고 하는 경우와 같다. 여기서 자율성은 무와 함께 거주한다.
이런 상황이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중세와 르네상스에서 시민들은 자신의 권리가 복권될 때, 스스로를 정치적 동물(zoino politikon)로 전환되도록 허락하지는 않았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동물을 사회적 동물로 번역한 아퀴나스는 인간의 초자연적 자질(christianitas)을 그의 자연적인 것(humanitas)과 구분한다. 즉 그는 믿는 자와 시민을 구부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체 개념에 일대 사건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여기서 주체는 시민으로서 한시적이면서도 자연적인 존재이자 자율적인 존재로 등장함과 동시에 주체는 믿는 자로서 영적이면서도 절대적 신의 권위에 복종하는 자로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은 이 두 몸(영적이면서도 한시적인) 사이의 신비로운 통합을 극단적으로 가져가는 절대군주 왕정에서 돌출한다. 그래서 절대군주는 정확히 국가의 권력, 즉 법과 행정을 통해 자신을 설립하고 권력을 행사한다. 반면 그의 신민들은 법이나 권리의 주체가 아니지만, 적어도 법(권리) 속의 주체들로서 공화국의 구성원으로 포함된다. 여기서 주체들은 시민이다. 다시 말해 모든 시민은 주체인 셈이다.(장 보댕) 그런 그는 그가 복종하는 주권권력에 의해 제한 받는다. 이는 노예의 상황과 비슷하다. 즉 다른 사람의 주권에 의존하는 자유주체로서의 노예 말이다. 여기서 보에티우스의 ‘자발적 종속’으로서의 주권 개념이 등장한다. 이와 동시에 절대주의(통치자 vs 시민)와 독재권력(주인 vs 노예) 사이가 일치하는지 불일치하는지에 대한 논쟁의 역사가 절대군주의 역사와 함께 진행되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시민과 이후 자신을 이상화시키는 본질적 원천으로 작동하게 될 시민혁명의 관점에서 돌이켜보면, 주체의 조건은 노예의 조건, 즉 노예상태로의 주체화/종속화와 동일해질 것이다.
프랑스어에서의 주체성
이제 발리바르는 현대 프랑스 철학이 주체를 어찌 사유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현대 프랑스철학은 주체를 진리나 형이상학적 전통으로 연결시키기보다 그 스스로가 안고 있는 모수의 갈등 덕에 발생하는 ‘내재적인’ 생성이자 힘들의 관계로서, 즉 정치적 문제로서 이해하려고 한다.
예컨대 루소의 경우 주체는 두 가지 얼굴로 등장한다. �사회계약론�에서 시민(주권의 일부이자 법의 저자)과 (동일한 법에 대한 절대복종을 통해 해방을 찾는) 주체가 일반의지의 원천인 개인의 사적 의지의 ‘총체적 소외’(사적 의지의 제거)에 따른 상관물로 제시된다. 여기서 개인적(사적) 의식은 ‘공동체적 나’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나는 진정성이라는 주제로 주체에 접근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시민이 주체를 지양한다는 것으로만 해석될 수 없는 부분이다. 오히려 여기서 루소는 시민이 주체(subjectum)로 생성되도록 종용한다. 그래서 그는 주권(시민)과 주체성 사이의 관계가 전복될 수 있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조건들을 형성한다.(아마 여기서 발리바르는 주권적 시민이 종속적 주체성 개념을 변화시키는 힘, 특히 저항의 주체로 등장하는 개인의 탄생에 대해 언급하는 듯하다.)
이어서 발리바르는 라깡과 푸코를 주목한다. 이 둘은 종속화(subjection)의 과정으로서 주체성의 유령을 가장 체계적으로 사유한 이론가들인데, 대표적으로 라깡은 살아 있는 개인, 즉 주체는 ‘기표의 법’으로부터 소외되는 효과들의 계기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주체는 본원적이라기보다 언제나 의존적이다. 그래서 주체는 정복 불가능한 담론과 제도라는 상징계적 우주로 회귀되는 결과로서만 존재한다. 여기서 주체는 다시 한 번 앞서 언급된 ‘종속성’이라는 테제와 만난다. 라깡에 따르면 이 주체는 나라는 주체가 갖는 정체성의 환영(상상계적 환영)과 이러한 환영 속에 참여하는 미지의 요소(타자로부터 생겨나는 문제의식) 사이를 무한히 오락가락하는 존재이다. 이런 주체는 기껏해야 ‘존재의 결여’를 말하려는 욕망의 자기 구성과정에 불과하다.
푸코의 경우, 주체성은 고백을 얻어내고 제공하는 방법(종교와 심문에서 심리학이나 정신과로 넘어가는 방법)에서 찾는다. 특히 팬옵티콘과 같은 곳에서 주체의 종속화는 기계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서 푸코는 인간 존재를 주체로 변형시키는 객관화 양식, 즉 권력관계를 연구하는 프로그램을 고안하는 것이다. 덕분에 주체는 이러한 담론과 원칙에 따라 주체화되는 것, 즉 주체가 자신을 대상화하여 스스로 구성되는 과정의 결과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푸코는 주체성의 역사를 다룬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푸코는 칸트적 선험적 변증법의 과정에 저항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주체는 개인의 ‘주체성’에 객관적으로 작용하는 종속 또는 주체화 장치들의 총합”이 된다. 이와 동시에 주체는 이 주체성을 그 자체로 향하게 하기 위해 주체의 ‘자유’ 또는 저항의 능력을 가정한다. 이렇게 되면 푸코는 칸트가 다루지 못했던 주체의 정치적 가능성(개인을 일정한 양식의 훈육과 일정한 유형의 개인성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시도하려는 가능성)과 함께 윤리의 가능성(자의식이라기보다는 접근의 양식인 ‘자유의 실천들’과 권력의 새로운 관계들을 발명해내는)을 열어주는 권력의 차등장치를 다룰 수 있다.
이러한 접근 덕분에 우리는 �순수이성비판�에 의해 규정되는 주체성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주체(subjectum, Subjekt이면서 또한 subjectus)가 개인적 종속, 그리고 정치적, 사법적, 신학적 권력과의 내적 관계에 위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내재적 복종과 금욕의 윤리로 다시 이끌어가는 본래적 차이(또는 차연)의 기호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가정들은 데카르트적 주체(또는 비-주체)를 규정하는 “적극적인 유한성”의 문제를 다시 열어준다. 것도 자연이나 사유하는 실체, 즉 재현이 아니라 무한과 무 사이 또는 신과 육신 사이에서 나를 말하기 위한 권력을 변호함으로써 그 혐의를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1) 이 글은 발리바르의 논문 「주체」를 요약한 것이다. 이 논문은 다음 책, 에티엔느 발리바르 외, �법은 아무 것도 모른다�, 강수영 역, 인간사랑, 2008, 27-51쪽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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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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