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

toward73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0.11.7
Entretien de Foucault avec Deleuze
지식인과 권력 : 푸꼬와 들뢰즈의 대화
푸 꼬: 어떤 모택동주의자가 한번은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우리와 함께 활동하는 데에 있어서 사르트르의 의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의 목표와 정치에의 참여에 대해 이해합니다. 당신의 경우 당신은 항상 감금(confinement)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에 당신의 입장을 부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하나의 수수께끼입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꽤 놀랐는데 왜냐하면 나에게는 항상 당신의 입장은 명확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들뢰즈: 아마도 우리는 이론과 실천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경험하고 있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한때 실천은 이론의 적용으로서, 그 결과로서 이해되었습니다. 한때는, 실천은 이와는 반대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으며, 오히려 실천은 이론을 고무시키는 것 혹은 미래의 이론적인 형태들의 창조에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두 경우 모두에게 있어 이론과 실천간의 관계는 총체화(totalization)의 과정으로 이해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보다 다른 각도에서 보고자 합니다. 이론과 실천과의 관계는 보다 부분적이고 파편적인 것입니다. 한편으로 보면 하나의 이론은 언제나 특정한 대상에 대한 것이며(local) 제한된 분야에 관련되어 있죠. 또한 이론은 다소간 그와 거리가 있는 어떤 다른 영역에 적용됩니다. 한 이론의 적용시에 보존되어 있는 그 관계는 결코 유사성의 그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이론이 자신의 영역을 떠나 움직이기 시작할 때부터 그것은 장애물이나 벽, 방해 - 다른 유형의 언설에 역할을 맡도록 요구하는 - 를 만나기 시작합니다 (이론이 어떤 다른 영역으로 옮겨왔다 해도 이는 이 다른 언설(言說)을 통과해서입니다.) 실천은 하나의 이론적인 점(点)에서 다른 점(点)으로 옮겨가는 일련의 매개이고, 이론은 하나의 실천에서 다른 실천으로 넘어가는 하나의 연계입니다. 어떤 이론도 결국 하나의 벽(wall)을 만나지 않고서는 전진할 수가 없으며 이 벽을 부수기 위해서는 실천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당신의 작업은 감금의 맥락에 대한 이론적인 분석으로부터, 특히 19세기 자본주의 사회내의 정신병자 병원(psychiatric asylum)에 관련해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당신은 감금된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말해야 할, 하나의 연합을 만들어 내야 할 (반면 당신의 기능이 이미 그들과의 관련에 있어서의 연합의 기능이었던 것이 가능하다) 필요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집단은 감옥 내에서 발견됩니다 - 이 개인들은 갇혀 있습니다. 당신이 G.I.P1), 즉 수감자들이 스스로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들을 창조해 내는 곳을 조직한 것도 이러한 기반 위에서입니다. 이러한 실천으로 옮김에 있어 당신이 마오이스트가 한 것처럼 당신의 이론을 적용시키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혀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적용(application)이 아니었습니다. 또 개혁을 개시하는 기획도 전통적 의미에 있어서의 탐구(enquiry)도 아니었습니다. 이 강조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보다 큰 영역 내에서의, 동시에 이론적이면서 실천적이기도 한 부분들의 복수성내(複數城內)에서의 연합들의 체계. 우리에게 있어 이론화하는 지식인은 이제 더 이상 주체가 대변하는 대표적 의식이 아닙니다. 행위하고 투쟁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한 집단에 의해서도, 그들의 의식을 대변해 줄 권리를 가진 회합(union)에 의해서도 대변되지 않습니다. 누가 행위하고 말하는가? 그것은 언제나 하나의 복수성(複數性)입니다. 말하고 행위하는 사람들 내부에 있어서조차도 우리 모두는 「groupusclues」(group와 corpuscle을 합친 글자인 듯-주(註))입니다.2) 대변(표상; representation)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행위만이 존재할 뿐입니다-연합을 구성하고 선을 형성하는 이론적 행위와 실천적 행위.
푸 꼬: 내가 보기에는 지식인들의 정치참여가 전통적으로 그의 활동이 가지는 두가지 다른 측면들의 산물(産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부르주와사회(社會)에 있어서의 자본주의적 생산체계 내에서의 그리고 그것이 생산해 내는 혹은 강요하는 이데올로기 내에서의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위치(그의 착취, 빈곤, 거부, 박해, 파괴적인 활동에의 고소와 비난, 불멸성 등). 특수한 진리를 드러내고 예기치 못했던 장소에서 정치적인 관계들을 벗겨내는 그의 고유한 언설(言說). 정치화(politicization)의 이 두가지 형태는 서로를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다른 질서였기 때문에 서로 일치하지도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추방된 사람들’로 분류되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사회주의자(社會主義)들’로 분류되었습니다. 권위들의 부분에 가하는 폭력적인 반격의 순간에는, 이 두입장이 서로 융화되었죠.: 1848년 후(後), 꼼뮨후(後), 1940년 후(後). 지식인들은 사실(事實)들을 논쟁할 여지가 없을 때, 황제는 벌거숭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금지되었을 때 즉각적으로 거부되고 박해받았습니다. 지식인은 아직도 그것을 보아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하는 것이 금지된 사람의 이름으로 진리를 말했습니다.: 그는 의식(意識)이었고, 양심(良心)이었고, 웅변이었습니다.
최근의 사태에서,3) 지식인들은 대중들이 지식(知識)을 얻기 위해 더 이상 자신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환상도 없이, 완전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식인들보다도 더 잘 알고 있고, 자신들을 확실히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知)와 언설(言說)을 막아버리고 방해하고 무효로 만드는 권력, 검열이라는 명확한 권위 속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선을 깊이 그리고 미묘하게 뚫고 나가는 하나의 권력체계가 존재합니다. 지식인들 자신은 이 권력체계의 대변자들(agents)입니다 - ‘의식’에 대한 그리고 언설에 대한 그들의 책임성이라는 개념이 그 체계의 부분을 형성합니다. 지식인의 역할은 객관성의 꽈 막힌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더 이상 스스로를 ‘어느 정도 앞선 그리고 평균과는 다른 자리에 위치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오늘날 지식인의 역할은 그를 ’지(知)‘, ’진리‘, ’의식‘ 그리고 ’언설‘의 영역에 있어서의 권력의 대상과 도구로 변환시키려는 권력의 여러 형태들과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론은 실천을 적용하기 위해 표현하거나 옮기거나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말했듯이 국소(局所)적이고 부분적(部分的)인 것입니다. 그것은 전체(全體)화하지(totalizing) 않습니다. 이것은 권력에 저항하는 투쟁입니다. 가장 비가시적이고 교활할 때 권력을 드러내고 밑바닥을 갉아내기를 추구하는 투쟁. 우리가 투쟁하는 것은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중들은 계속 의식은 지식의 한 형태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리고 주체성의 기반으로서의 의식은 부르주와적 특권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권력을 패퇴시키고 그를 취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는 권력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옆을 따라 인도된 행위이이지 안전한 거리로부터의 그들의 (빛의) 비추어줌이 아닌 것이죠. 하나의 ‘이론’은 이러한 투쟁의 지역적(regional) 체계인 것입니다.
들뢰즈: 분명 그렇습니다. 하나의 이론은 연장들을 넣은 상자와 꼭 같습니다. 그것은 시니피앙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유용해야 합니다. 그것은 기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능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론가 자신으로부터 시작해, 아무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이때 그는 이론가이기를 그칩니다), 그 이론이 무가치한 것이거나 혹은 그 순간이 적절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이론을 수정하지 않습니다. 단지 새로운 것들을 구성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다른 것들을 만들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이를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표현한 것이 프루스트(Marcel Proust) - 순수한 지식인으로 생각되어 온 - 라는 사실은 묘합니다.: 나의 책들을 바깥을 향하고 있는 안경으로 간주해 주시오, 그것이 당신에게 맞지 않으면, 다른 것을 찾으시오. 나는 당신이 당신 자신의 도구를 찾도록 - 가만히 두겠습니다. 이론은 전체(全體)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복수(複數)화의 도구이며 또한 스스로를 복수화시킵니다. 전체화하고자 하는 것은 권력의 본성이고, 이론은 본질상 권력에 대립된다는 것이 당신의, 내가 전적으로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하나의 이론이 어떤 특정한 관점에서 포착되자마자, 우리는 그것이 전혀 다른 어떤 분야에서 깨나오지 않는 한 그것은 약간의 실천적 중요성조차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수정(reform)의 개념은 어리석고 위선적인 것입니다. 수정은 대표자임을 주장하는 사람들(다른 사람들을 위해 말한다고 선언하는)에 의대 도안되며, 그들은 결국 권력의 분리로, 결과적으로 이중의 억압에 의해 증가된 이 새로운 권력의 분배로 귀결하는 것입니다. 혹은 그들은 관련된 사람들의 불평이나 요구로부터 생기는 것이죠. 이 후자의 경우는 더 이상 수정이 아니라 권력의 총체성과 그를 지탱해주는 위계질서를 의문시하는 (그의 부분성의 충분한 힘을 표현하는) 혁명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이는 감옥에 있어 매우 명백합니다.: 재소자의 가장 조그마한 사소한 요구들도 플레븐의 사이비개혁을 뒤흔들어 놓을 것입니다.4) 유치원에서의 어린이들의 저항이 경청된다면, 그들의 물음들이 주목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교육체계는 분쇄될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체계가 총체적으로 인내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모든 측면에 있어서의 그 극단적인 허약함과 억압의 총체적 형태에 대한 요구를 설명해 줍니다. 내 생각으로는, 당신이 당신의 책과 실천적 영역에 있어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근원적인 어떤 것을 가르쳐 준 첫 번째 사람입니다.: 타자(他者)를 위해 말하는 것의 경솔함, 우리는 표상(表象)을 내던졌고 그것은 끝났다고 말했지만 이 ‘이론적인’ 전복의 결과들을 그리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 결국 직접 관련된 사람들만이 스스로를 위해 실천적인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는 이론적인 사실을 깨닫게 됨으로써.
푸 꼬: 그리고 수감자들이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감옥에 대한, 형벌체계에 대한 그리고 정의(正義)에 대한 수인(囚人)적인 이론을 소유했던 것이지요. 궁극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형태의 언설, 권력에 반하는 언설, 재소자들의 반언설(counter-discourse)고 범법자라 불리우는 사람들입니다 - 범법에 대한 이론이 아는 것입니다. 감옥의 문제는 국소적이고 지역(地域)적입니다. (일반적으로 - 註) 한 해에 많아야 100,000명의 사람이 감옥을 거칩니다. 프랑스에서는 현재 300,000명내지 400,000의 사람들이 감옥을 거쳤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변적인 문제는 모든 사람들을 흔들어 놓는 것 같습니다. 나는 감옥에 가보지 않았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감옥의 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에 놀랐고 또 수용자들의 언설을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형벌체계가 권력으로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는 형태이기 때문일까요? 어떤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는 다는 것, 살고 또 사랑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아 버리는 것 - 이것이야 말로 분명 상상가능한 권력의 가장 광폭한 현시일 것입니다.
어느 날엔가 나는 감옥에 갇혀 있는 한 부인과 대화를 가졌는데 그녀는 말하기를, “상상해 보세요, 나이 40되서 나는 비쩍 마른 빵부스러기를 받곤 한답니다." 이 이야기에서 놀라운 것은 권력행사의 유아성이 아니라 케케묵은 어린아이같은 미숙한 방식으로 행사되는 권력의 통제방식에 있어서의 조소주의(嘲笑主義 Cynicism)입니다. 어린이들로서 우리는 빵과 풀로 (음식이) 축소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워왔습니다. 감옥은 그 과잉적인 형태에 있어 권력이 그 벌거벗은 모습으로 드러나는 그리고 그것이 도덕적 힘(force)으로서 정당화되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당신은 강도짓하고 살인하는 것이 죄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당신에게 벌주는 것은 나의 권리내에 속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대해 흥미로운 것 하나는 이따금씩 권력은 자신을 전혀 숨기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권력은 스스로를 가장 미세한 세부까지 추적해 들어간 참주(tyranny)로 드러납니다. 권력은 조소적이고 동시에 순수하며 완전히 ‘정당화 되는’ 바, 왜냐하면 그의 실천은 도덕성의 기틀(framework) 속에서 완전히 수립될(formulated)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권력의 잔혹한 지배는 악에 대한 선의, 무질서에 대한 질서의 진지한 지배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들뢰즈: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역도 참입니다. 수감자들이 어린이들처럼 취급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은 수감자들처럼 취급됩니다. 어린이들은 그들에게는 낯선 소아화(infatilization)에 복속됩니다. 이러한 근거에 입각해, 학교는 감옥을 닮고 있고, 공장 또한 그에 매우 가깝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르노공장(Renault plant)의 입구 혹은 이와 유사한 경우의 어떤 곳이라도 보십시오.“ 낮에 목욕실에 가는데 세 장의 표가 필요합니다. 당신은 18세기 텍스트에서 제레미 벤탐(Jeremy Bentham)의 감옥개혁을 찾아냈죠. 고양된 개혁의 이름으로 그는 개선된 감옥이 그 모델이 되어 준 그리고 그곳에서 개인은 학교에서 공장으로, 공장에서 감옥으로 또는 그 역으로 지각불능일 정도로 조용히 통과해 가는 하나의 순환체계(a circular system)를 수립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의 추진력과 개선된 표상(언설과 거의 비슷한 의미임 - 註)의 본질인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해 말하고 행동하기 시작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표상을 타인의 그것에 (하나의 발전으로서 조차도) 대립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권력의 그릇된 표상성을 대립시키지 않습니다. 예컨대 정의에 반하는 대중적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당신의 말이 생각납니다. 벌은 다른 수준에서 일어납니다.
푸 꼬: 내 생각으로는 법적인 체계, 재판관, 법정, 감옥 등에 대한 대중의 혐오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단순히 정의의 더 나은 그리고 보다 평등한 형태가 아니라 - 이는 별도로 하고 또 무엇보다도 이전에 - 권력은 언제나 민중을 희생시킴으로써 행사된다는 사실에 대한 단일한 지각인 것입니다. 반법치적 투쟁은 권력에 대한 투쟁이며 나는 그것이 불의(不義)에 대한 법체제의 불의에 대한 혹은 그 제도들의 효율성을 개선시키기 위한 투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놀라운 것은 전복의 소요상태나 치안을 무너뜨리는 봉기에 있어 재정구조, 군대 그리고 다른 많은 권력들처럼 법체제는 하나의 필수적인 목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나의 가설은 - 이는 단지 가설일 따름입니다 - 대혁명의 시기에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대중적인 법정(popular courts)은 중하(中下)계급 - 법체제에 대한 투쟁에 있어서의 초기봉기를(initiatire) 노예화시키고 포획하고자 했던 - 을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 그들은 평등한 정의 - 한사람의 재판관이 하나의 정당한 판결을 제시하는 - 의 가능성 위에 기초한 법정체계를 제안했습니다. 법과 법정의 동일화가 가능한 형태는 정의에 대한 부르주와 이데올로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들뢰즈: 우리의 현실적인 상황에 근거해 권력은 전체적 또는 총체적 안목(vision)을 중점적으로 개발해냅니다. 즉 억압의 모든 현존하는 형태들(이민 온 노동자들에 대한 민족주의적 억압, 공장에 있어서의, 교육체계에 있어서의 억압, 청년들에 대한 일반적 억압)은 권력의 관점으로부터 쉽게 전체화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형태들의 통합을 68년 5월 항쟁에서 찾아야 할 뿐만 아니라 보다 바람직하게는 가까운 미래에 대한 집중적인 준비와 조직화에서도 찾아야 할 것입니다. 프랑스의 자본주의는 지금 비고용의 ‘떡고물’(margin)에 의지하고 있으며 완전고용을 약속했던 자유주의적이고 간섭주의적인 외관을 벗어버렸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억압의 형태들의 통일성을 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주자들에 대한 억압, 가장 궁상맞고 더러운 일들은 모두 그들에게 돌아간다. 공장에 있어서의 억압, 프랑스인들은 점차 증가하는 힘들 일에 대한 ‘취향’을 다시 얻어야 한다. 청년들에 대한 투쟁과 교육체계의 억압. 경찰의 억압은 청소년들을 필요로 하는 자리가 보다 적을 때 드세어 집니다. 여러 중류의 전문가들(선생들, 정신병의사들, 모든 종류의 교육자 등(은 전통적으로 경찰에 속해 있던 기능들을 수행하도록 요구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오래전에 예언했던 것이며 그 당시에는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었죠. 감금의 모든 구조들의 재강화, 권력의 이 전체적인 정책에 대항하여, 우리는 국소적인 반격, 여러 충돌들, 활동적이고 가끔은 예방적인 방어를 시작합니다. 권력의 측면에서 계속 전체화 되는 것을 우리가 전체화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방향으로 움직인다면(were to), 이는 중심주의의 대표적인 형태들과 위계적인 구조를 복위시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우리는 측면적인 친화와 선의 전체계 그리고 대중적인 기반들을 구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는 특별히 어려운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더 이상 실재(reality)를 권력의 경쟁과 분배에 대한 전통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정치학의 계속으로서 소위 공산당(Communist Party)이나 노동연맹(General Workers Union)의 대변자들을 통해, 정의하지 않을 것입니다.5)
실재(實在)란 결국 공장, 학교, 바라크, 감옥, 경찰서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realite를 현실이라 번역해야 할 것이다. - 註) 그리고 이 행위는 진술에서 발견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정보의 유형을 가져옵니다. (이는 『Agence de Press Liberation』에 의해 수행되는 유형의 정보를 설명해 준다.)6)
푸 꼬: 투쟁의 적절한 형태를 찾는데 있어서의 이 어려움은 우리가 계속 권력의 문제를 무시해 온 결과가 아닐까요? 결국 우리는 착취의 본성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데에 19세기까지 기다려야 했고 권력의 본성을 충분히 이해하는 데에 오늘날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우리가 권력이라고 부르는 동시에 보이면서 보이지 않는, 현존해 있으면서 은폐해 있는 편재적인 이 수수께끼같은 존재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마르크스(Karl Marx)와 프로이드(Sigmund Freud)는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정부에 대한 이 글들과 그의 메카니즘에 대한 전통적인 분석들은 분명 권력이 행사되고 그것이 기능하는 모든 장소를 찾아내지는 못합니다. 권력에의 물음은 총체적인 수수께끼로 남습니다. 누가 권력을 행사하는가? 어떤 영역에서 행사되는가? 우리는 이제 누가 타인들을 착취하는지 누가 이들을 받는지 어떤 사람들이 연루되는지를 충분한 확신을 가지고 알게 되었으며 이 기금들이 재투자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해서 ... 우리는 그것이 통치하는 자들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지배계급’이라는 관념이 적절한 공식화를 얻어본 적은 없으며, ‘지배하다’, ‘규제하다’, ‘통치하다’ 등의 용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말들은 지나치게 유동적이며 분석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또한 권력의 행사에 부과되는 제한들도 탐구해야 합니다 - 그를 통해 권력이 작동하는 연계들과 위계의 종종 무의미한 측면들에 가하는 그 영향의 정도 그리고 통제, 감시, 금지, 제약의 여러 형태를 권력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그것은 행사되고 있습니다. 엄격히 말하면, 아무도 권력에 대한 공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특정한 방향에 있어 한편으로는 이 사람들에 한편으로는 저 사람들에 과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지 정확히 말하는 것은 종종 어렵지만, 어떤 사람이 권력을 결여하고 있나를 보는 것은 쉽습니다. 당신의 책들(『니체와 철학』에서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2권:『반오이디푸스』와 『그토록 수많은 마루들』-註)에 이르기까지)7)을 읽는 것이 나를 위해 본질적인 것이었다면, 그것은 이러한 문제들을 철저히 탐구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의미에 대한,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에 대한, 기타에 대한 오래된 테마 아래에서 당신은 권력에 대한, 권력의 불평등과 그들의 투쟁에 대한 물음을 개발했던 것입니다. 각각의 투쟁은 권력의 어떤 특정한 원천을 둘러싸고 벌어집니다. (셀 수 없는 조그만 원천들 = 잠시 동안의 대장 boss, 'H.L.M‘8)의 경영자, 교습소 관리인, 판관, 회합의 대표자, 신문의 편집국장) 그리고 만일 이러한 원천들을 지적하는 것 - 규탄하고 터놓고 논하는 것 - 이 투쟁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라면, 이는 그들이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차라리 그것은 이 주제에 대해 말한다는 것, 제도화된 정보선으로 하여금 듣도록 만다는 것, 이름을 생산하는 것, 탄핵대상을 확실히 지적하는 것, 목표물을 찾아내는 것은 권력전복의 첫 번째 단계이며 권력의 현존형태에 대한 새로운 투쟁의 시작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재소자나 감옥의 의사가 행하는 언설이 투쟁의 한 형태를 형성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적어도 잠정적으로 권력으로 하여금 감옥의 조건들 - 현재로는 감옥행정관의 배타적인 성질과 개혁집단에서의 그들의 동조자들 - 에 대해 말하도록 끌어내기 때문입니다. 투쟁의 언설은 무의식에 대립되는 것입니다. 크게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겠죠. 그러나 우리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라는 것이 판명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일련의 전체적인 오해가 ’숨겨져 있는‘ ’억압되어 있는‘ 그리고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연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투쟁의 고유한 대상들에 대한 값싼 ’정신분석‘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무의식을 끄집어 내기 보다는 비밀을 끄집어 내는 것이 아마 훨씬 어려울 것입니다. 두 테제는 최초에 자주 만났던 것들입니다. “글쓰기는 억압된 요소들을 일으켜 세운다”는 것과 “글쓰기는 필연적으로 타도하는 활동이다”라는 두 테제는 진지하게 탄핵할 만한 일련의 조작들을 무심코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들뢰즈: 당신이 제기한 문제에 관해서인데 착취하는 자, 이들을 얻는 자, 통치하는 자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은 보다 흐릿한 어떤 것으로 남습니다. 나는 감히 다음의 가설을 내놓고자 합니다. 맑시즘의 비판은 문제를 본질적으로 이익(interests)의 개념을 통해 정의하는 것이었습니다. (권력은 그의 이해를 통해 정의된 바 대로의 지배계급에 의해 행사된다). 즉각적으로 물음이 제기됩니다. 자신의 이해가 보호받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행위의 한 조각을 요구함으로써 기존의 권력구조를 강하게 지지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아마도 이는 투자(investments)로 인해서일 것입니다. 경제적인 것은 무의식적인 것이든 이해는 마지막 대답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해가 묘사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게 기능하는 욕구의 투자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해에 반해서 욕구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욕구가 그를 대치할 그 곳에 이해는 항상 따라 나오며 스스로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라이히(Wilhelm Reich)의 외침을 묵살할 수가 없습니다. 대중은 속지 않았습니다. 어떤 특정한 시기에 그들은 실제 파시스트적 통치를 원했던 것입니다. 권력을 모양지우고 분배하는 그것을 총리의 성질일 뿐만 아니라 경찰의 성질이도록 하는 욕구의 투자(investments of desire)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총리가 휘두르는 권력이나 경찰이 휘두르는 그것이나 질적인 차이가 없는 것이죠. 사회집단에 있어서의 이러한 욕구투자의 본성은 왜 정치적 정당들이나 연합들 - 계급이해의 이름으로 혁명적인 투자를 소유하는 또는 소유해야 하는 - 이 그렇게 자주 욕구의 수준에 있어 개혁으로 정향(定向)되어 있거나 절대적으로 반동적인가를 설명해 줍니다.
푸 꼬: 당신이 말하듯이 욕구, 권력, 이해간의 상호관계는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그리고 권력의 집행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권력에의 욕구는 권력과 이해 사이의 단일한 관계를 수립합니다. 대중들이 파시스트적 시기 동안에 어떤 사람들 - 이 개인들이 대중에 반해서 그리고 대중을 희생시키면서 그들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희생, 대학살을 야기시키면서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그들과 자신들을 동일화할 수가 없는 사람들 - 이 권력을 쥐기를 욕구했으리라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특정한 권력을 욕구합니다. 그들은 그것이 행사되기를 원합니다. 욕구, 권력, 그리고 이해의 이 유희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착취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매우 오래 전입니다. 그리고 욕구는 오랜 역사를 가졌었고 계속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투쟁과 이 투쟁들로부터 유도되는 그리고 그들과는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국소적인, 지역적인, 불연속적인 이론들이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발견의 문턱에 존재하리라는 것은 가능합니다.
들뢰즈: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그 문제로 돌아가야 합니다: 현금의 혁명적인 운동은 많은 중심들을 창조해냈습니다. 그리고 이는 약함이나 비충분성의 결과로서는 아니죠. 왜냐하면 어떤 종류의 재화가 권력과 반동의 힘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베트남은 국지화된 대항전술 localized counter-tactics의 한 인상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혹은 단일한 한 나라 안에서 이러한 행위와 불연속적인 점들 사이의 횡단적인 연결들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푸 꼬: 당신이 제기하는 지리학적 불연속성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하겠지요.: 우리가 착취에 대해 투쟁을 하는 즉시 프롤레타리아는 투쟁을 지도할 뿐만이 아니라 그의 목표와 방법, 대치를 위한 장소와 도구를 정의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와 연결시키려는 것은 그의 입장과 그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의 투쟁동기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총체적 동일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싸움이 권력에 대항해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들의 이해에 이르기까지 권력이 가해지는 모든 사람들, 그것이 참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영역에서 그리고 자신의 활동성(또는 수동성)에 기반해서 투쟁을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 자신의 이해가 관련된, 그 목적을 그들이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고 그 방법을 그들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는 투쟁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은 혁명적인 가정 속에 들어가는 것이죠. 그들은 자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와의 연계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권력은 자본주의적 착취가 유지되는 방식으로 행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억압되어 있는 장소들에서 싸움으로써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원인(cause)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여성, 재소자들, 징집된 군인들, 병실의 환자들, 호모섹스하는 사람들은 이제 그들에게 가해지는 특정화(particularized) 권력, 제약, 통제에 대항하여 특수한(specific) 투쟁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한 투쟁들은 그들이 급진적이고 비타협적이며 비수정주의자들인 한에서 그리고 기껏해야 윗대가리들을 갈아치움으로써 어떤 권력의 새로운 배치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을 거부하는 한에서 실제 혁명적인 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은 그들이 똑같은 권력체계에 봉사하는 통제와 제약에 대항하여 싸우는 정도까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운동에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투쟁에 의해 제시된 전반적인 그림은 분명 당신이 일찍이 지적했던 총체화의 그것, ‘진리’의 인도 아래에서의 이론적인 총체화가 아닙니다. 투쟁의 일반성은 혹시 권력 자체의 체계로부터 권력이 행사되고 적용되는 모든 형태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들뢰즈: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 가장 사소한 요구에 근거해서 - 그것을 완전히 분쇄하고자 하는 욕구로 이끌려지기 위해서, 그의 (권력의 - 註) 확산적인 (diffuse) 특성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그의 적용의 어떤 것에도 접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혁명적인 공격과 방어는 아무리 부분적일지라도 이러한 방식으로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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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rouype d'information de prisons」: 푸꼬의 최초의 두 저작들은 『I. Pierre Riviere』와 『surveriller et punir』의 연합으로부터 나왔다.
2) cf. M. Foucault, 「Theatram phiolosophicum」, 들뢰즈의 『Logigue du Sens』와 『Difference et repetition』
3) 1968년 5월. 일반적으로 「5월사태」라 불리움
4) Rene Pleven은 1950년 대의 프랑스 국무총리
5) 「Confederation Generale de Travailleurs」
6) Liberation News Agency
7) 『Nitzsche et la philosphlie』(Paris: PUF 1962)와 ≪Capitalisme et schizophrenie≫ I, 『L'Anti-Oedipe』(Guattari와 공저), Paris, Edition de Minuit 1972 참조
8) 『Habitations a loyer modere』: moderate rental hou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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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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