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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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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의 공리주의와 자유주의 


연세대학교 철학과

김 형 철

1. 서론

우리 인류가 살고 있는 사회가 과거에 어떠한 문화적 전통과 역사적 배경을 가졌든지간에 이제 자유민주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개인의 가치와 인생의 목적에 대하여 전통에 구속되어서 판단을 내리고 사회전체이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반자유주의적 행태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는 경우는 과거와는 달리 드물다. 개인의 자유가 불가피하게 억압되어야 할 경우에 사회는 그 정당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이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는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기 보다는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유보하는 이유를 밝혀야 하는 풍토가 조성되게된 것은 무엇보다도 자유주의자들의 노력에 의해서이다. 한 사람의 방탕한 '자유'를 위해서 다수의 진정한 자유가 묵살되는 상황은 인류 전체의 비극이고,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인류는 계속해 왔다.

자신의 개별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지 않은 곳에서 개인들은 창조적인 삶을 영위할 수가 없다. 개인의 창의성이 억압받는 곳에서도 우리는 개인들이 물리적 형태의 쾌락적 삶을 사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인간의 삶이라고 볼 수 없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북한주민들의 표정가운데 김일성 주석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우리는 가끔 본다. 자연스러운 의문은 "저들이 왜 울까?"라는 것도 있지만, "저들이 정말로 울까?"일 것이다. 아마 누가 그들에게 지정된 장소에서 지정된 시각에 정확하게 울음을 '자연스럽게' 터뜨리라고 지시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정말로 자발적으로' 참을 수 없는 울음을 터뜨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부로부터의 정보가 철저히 차단된 상태에서 자신의 현재 상황이 '지상낙원'에 살고 있고, 그 모든 것이 오직 김일성 주석의 하늘 같은 은혜 때문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감격해서 우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감사의 눈물'이라고 볼 수가 없다.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혐오하고 분노하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개인의 독특한 개성을 말살하려고 하는 모든 기도다. 그것은 위장된 형태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용납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죄악이다. 개인의 자율성이 보장되면서 추구되는 질서는 존중될 수 있는 것이지만, 개인의 자유의 말살위에서 영위되는 질서는 누구를 위한 질서인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의 자율성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필요조건이다. 타율적인 삶은 아무리 표면적으로 윤택한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 생명이 길지 못하다. 사회는 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진전시키는 방향으로 운영되어야 하고, 이러한 배려는 모든 개인에게 평등한 기회의 바탕위에서 주어져야 한다. 자신의 삶과 운명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가장 잘 알고 또 그에 대한 총괄적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것이 자유주의자들의 신념이다.

각 개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을 지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행복 이상의 인생의 궁극적 목표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모든 개인이 이기주의적으로 자기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할 수는 없다. 로빈슨 쿠르소와 같은 원자적으로 고립된 삶을 사는 것은 개인 스스로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더군다나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달리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립적 삶을 살 것을 우리는 누구에게도 권할 수 없다. 개인은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사회는 단순히 고립된 삶을 사는 개인이 모여있는 집단과 다르다. 그곳에는 개인의 행위를 평가하고 지도하고 규제하는 공동의 도덕 원칙이 존재한다.

만일 각 개인이 추구하는 바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자신의 행복이라면, 사회도덕으로서 적합한 원칙중의 하나는 아마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으로 축약되는 공리주의일 것이다. 고통과 불행은 그 자체로 가능한 한 회피되어야 할 악이고, 쾌락과 행복은 그 자체로 가능한 한 추구되어야 할 선이다. 이러한 공리주의는 역사적으로 의무 그 자체를 수행하기 위하여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진정한 도덕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는 의무론(혹은 법칙론)과 대칭되는 이론이다. 그것은 또한 자신의 이익 또는 행복만을 극대화하려는 윤리학적 이기주의와도 구분된다. 개인의 행위 또는 사회의 정책은 그것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실현할 수 있는지에 따라서 그 옳고 그름이 판정된다는 것이 공리주의의 핵심이다. 오늘날 우리의 공공재정정책이 특히 이러한 공리주의적 사고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되기 힘들다.

이 논문의 목적은 현대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확립에 사상적 배경을 제공한 밀의 사상을 집중적으로 검토하는 데 있다. 밀은 벤담의 단순한 공리주의를 보다 합리적이고 설득력있는 공리주의로 격상시키는 역할을 해냈고, 19세기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어느 철학자 못지 않게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에 대해 열정적으로 옹호하였다. 현대사상사에서 아직도 살아 숨쉬면서 발전을 계속하고 있는 정신적 두 지주인 공리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는 밀의 사상을 이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 논문은 밀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벤담의 공리주의에 대한 검토를 하고자 한다. 밀이 벤담을 비판한 것은 사실이지만, 벤담의 사상에서 출발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또한 밀의 생애에 대한 개략적 이해는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밀이 자신의 저서 {공리주의}에서 주장하는 요점을 정리하고, 그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밀의 사상을 우리는 자유주의적 공리주의라고 부를 것이다.


2. 벤담의 쾌락적 공리주의

밀의 공리주의에 대한 분석을 하기 위해서 그의 스승이었던 벤담의 공리주의를 검토하여야 하는 것은, 플라톤의 사상에 대한 연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에 필수 선행조건인 것과 마찬가지의 논리에서 당연한 일이다. 밀이 강단철학자의 전형적 인물이라기 보다는 사상가로서 현실에서 실천에 직접 뛰어 들었듯이, 벤담도 법률가로서 사회제도의 개혁, 특히 사법제도의 혁신에 자신의 활동의 대부분을 소비하였다. 그는 새로운 도덕 원칙을 제시함으로써, 당시 낡은 전통과 구습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던 영국사회를 새롭게 혁신할 것을 주창하였다. 예를 들어 감옥소(prison)라는 명칭을 교도소(rehabilitation or correction facilities)로 바꾸는 것 등은 그와 같은 공리주의자들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벤담의 공리주의는 쾌락과 고통의 계산에 따라서 인간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주장한다는 점에서 쾌락적 공리주의라고 불린다. 벤담은 주장하기를

인류가 쾌락과 고통이라는 두 주체적 주인의 지도하에 놓이게 된 것은 자연이 정한 이치이다. 우리가 무엇을 행위해야 하는 것을 지적하고, 무엇을 마땅히 행위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그들만이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옳고 그름의 기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원인과 결과의 사슬이 그들의 영향력하에 있다. 그들은 우리가 행위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지배한다. 그에 대한 우리의 종속을 거부하려고 우리가 모든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노력은 그 사실을 예증하고 확인해줄 따름이다. 한 인간은 그들의 제국적 지배를 포기하려고 선서하는 흉내를 낼 수는 있지만 그것은 말뿐이고, 실제로는 그는 그것에 끝까지 종속되어 있을 것이다. 공리의 원칙은 이러한 쾌락과 고통에의 종속을 인지하고, 그것을 이성과 법의 힘으로 행복의 구조물을 구성하려는 목적을 가진 체계의 기초로 삼는다. 그러한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려고 하는 체계들은 의미 대신에 소리, 이성 대신에 변덕, 그리고 빛 대신에 어둠을 다루고 있을 따름이다.(밀, 33-4쪽)


벤담의 선언은 사실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도덕적 원칙을 도출하는 형식을 분명하게 취하고 있다. 벤담은 많은 사람들이 쾌락주의적인 인간의 측면을 사실상 없는 것으로서 혹은 그저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것으로서 치부하는 것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면서 대단히 냉소적 자세를 취한다. 이러한 그의 인간관은 그가 칸트와 같은 의무론자(deontologist)들이 근거하고 있는 추상적 의미의 권리개념을 허구적인 것(nonsense on stilts)으로 일축한다.

이어서 벤담은 공리(utility)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공리는 이해 당사자의 혜택, 이득, 쾌락, 선, 혹은 행복(이들은 이 경우에 있어서 같은 것을 의미한다)을 창출하거나, 혹은 그의 해악, 고통, 악, 혹은 불행을 방지하는 경향을 가진 어떤 대상에 속한 성질을 의미한다. 만일 그 당사자가 공동체 전체이라면, 그것은 공동체 전체의 행복을 의미하고, 만일 특정 개인이라면, 그것은 특정 개인의 행복을 의미한다.(밀, 35쪽)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사실 세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벤담은 개인과 그 개인들의 집합으로서의 공동체 사이의 구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벤담은 공동체를 개인과 별개의 존재론적 지위를 가진 것으로 보지 않고, 단순히 개인의 집합으로 보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둘째, 그는 선의 증진과 악의 감소를 동일한 현상으로 파악한다는 사실이다. 이점은 후에 밀이 행복의 적극적 증진보다 악의 소극적 감소를 더욱 강조함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현대에 소극적 공리주의(negative utiltitarianims)를 주창하는 학자들이 있는 것을 보더라도 다소 문제가 있는 발상으로 보인다. 세째, 공리가 개인의 심리적 감정(feeling)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대상물의 속성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벤담의 정의는 공리가 마치 객관적인 개념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는 밀의 공리개념에서도 유사한 애매모호성이 나타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쾌락과 고통을 경험할 수 있는 근원에는 네가지가 있다. 물리적, 정치적, 정신적 혹은 대중적(moral or popular), 그리고 종교적 근거가 바로 그것들이며 그 중에서 벤담은 물리적 근거가 가장 근원적이라고 주장한다. 즉 쾌락과 고통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경로가 다양하지만, 자연주의적, 경험주의적, 세속주의적 전통에 서 있는 벤담에게는 다른 세가지가 궁극적으로 물리적 형태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서로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 여건(circumstances)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각각의 여건에 상응하는 제재(sanction)를 가하게 되면 인간의 행위의 동기를 변형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밀, 59-62쪽) 밀은 여기에 양심(conscience)이라는 다섯번째의 제재를 추가하고, 그것에 제일의 중요성을 부과한다.(밀, 279-87쪽) 즉 밀은 도덕의 정당성에 대하여 벤담보다 비물리적 속성 또는 형이상학적 속성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단순히 양적으로 환원되는 쾌락과 고통에 대한 측정에는 강도(intensity), 지속성(duration), 확실성 또는 불확실성(certainty or uncertainty), 근접성 또는 원격성(propinquity or remoteness) 등과 같이 그 자체로 고려되어야 할 네가지 여건이 있다. 이들에 추가해서 부차적으로 고려되는 경향은 다산성(fecundity)과 순수성(purity)이 있고, 마지막으로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extent)를 계산해야 한다. 이들 일곱개의 기준들은 쾌락과 고통을 개인간 비교가능한 기수적 효용(interpersonally comparable cardinal utility)의 개념을 성립하게 해주는 필요충분조건이다. 두가지 지적할 점 중의 하나는 이러한 주장 안에는 이들 일곱가지 기준들이 상충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이 단선적인(linear) 차원에만 있지 않은 경우에 양을 계산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한 개인의 쾌락과 고통을 계산하는 과정에서는 상대적으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기술적인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계산에 포함될 대상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유정적 존재(sentient being)를 모두 도덕공동체에 포함시킨다면, 피터 싱어(Peter Singer)처럼 우리는 대체로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할 것이고, 여기에 미래세대를 포함시켜야 하는지 등의 복잡한 문제가 제기되지만, 벤담은 이러한 문제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렇듯 유정성의 개념을 어느 정도로 엄격하게 적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과제이다.

벤담의 쾌락과 고통의 개념은 도덕적 고려 이전의(pre-moral) 상태를 지칭한다. 벤담의 쾌락과 고통은 도덕적 판단 기준 이전에 계산되는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 고려를 이 계산과정에서 하게 되면 이중계산(double counting)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과연 공리주의가 도덕이론인가에 대한 오해를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일반도덕에 의해서 인정되지 않는 쾌락과 고통도 동등하게 계산에 넣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리주의자들은 공리주의가 일반도덕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비판에 개의치 않는다.

끝으로 벤담은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계산의 대상에 포함된다"(everybody to count for one, nobody for more than one)는 주장을 함으로써 자신이 평등주의적 입장에 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평등이 공리주의자들의 궁극적 목표는 분명히 아니다. 벤담에 따르면, 유일한 본질적 가치는 쾌락이고 그것의 평등한 분배는 수단적 가치만을 가지고 있으며, 궁극적 도덕기준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의 원칙밖에 없다.


3. 밀의 생애

존 스튜어트 밀은 영국 런던에서 1806년에 제레미 벤담의 친구이며 열렬한 공리주의 옹호자인 제임스 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았고, 또 나중에는 벤담의 사사를 받게 되었다. 정식 학교 교육을 받은 적이 없이 사교육만을 받은 셈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3살부터 희랍어를 배웠고, 8세부터는 라틴어를 배웠다. 15세에 그는 경제학, 역사학, 철학, 그리고 자연과학의 여러분야들을 포함한 다양한 수업을 받았고, 그가 후에 철두철미하게 영국의 경험론적 관점에서 철학을 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교육에 힘은 바가 크다. 17세가 되던 해에는 아버지를 따라서 실질적으로 인도 식민지를 관할했던 동인도 주식회사에 입사하여 52세에 그 회사를 은퇴하게 된다.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거의 무한에 가까운 존경은 표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는 장남으로서 아버지와 아침에 산책하면서 나누는 학문적 대화에 많은 희열을 느끼고, 아버지를 기쁘게 해 줄 여러가지 질문을 생각했다가 그것을 산책길에서 물어보고 함께 토론했던 추억을 밝힌다. 동생들의 교육에 장남으로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려고 했다는 사실들도 무척 인상적인 내용이다. 후에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서 벤담의 조수로서, 또 제자로서 일하게 되면서 공리주의적 사고에 심취하게 된다. 나중에 그는 '공리주의 사회'라는 진보적 단체를 구성하는 핵심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당시 영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전통에 기초한 여러 사회제도를 공리주의적 원칙하에서 개혁하려고 했던 벤담의 합리적 사고에 열렬한 지지자가 되나, 후에 밀은 벤담의 공리주의에 주요한 수정을 가하게 된다.

그러나 20세에 그는 심각한 슬럼프에 빠지게 되고, 지적 활동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되는 위기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 과거에 등한시하고 경멸하기까지 했던 문학과 시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가지게 된다. 자신의 어렸을 적 교육이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라는 데 대한 자성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사람으로 밀 스스로 지칭하는 사람들은 워즈워스(Wordsworth), 콜리지(Coleridge), 카알라일(Carlyle), 괴테(Goethe), 생시몽(Saint-Simon), 그리고 꽁트(Comte)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전환이 단순 쾌락주의적 공리주의에 머물렀던 벤담으로부터 자신의 독창적 공리주의를 전개해나가는 계기가 된다. 물론 그는 벤담을 비판하면서도 자신을 평생동안 공리주의자라고 생각하는 데서 후퇴하지 않았다. 또한 이 시기동안에 그는 개인이 하나의 획일된 사고와 행동을 하는 것이 가져오게 될 폐해를 절실하게 실감하게 된다. 이는 뒤에 {자유론}에서 개인의 개별성과 자율성에 대한 열렬한 지지로 나타나게 된다.

25세의 나이에 밀은 부유한 상인의 아내이면서 지적으로 대단히 뛰어나다고 밀이 칭찬하게 되는 헤리옷 테일러 부인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헤리옷 부인이 다른 남자의 유부녀였기 때문에 그들의 친밀한 관계는 곧 영국 상류사회의 스캔달이 되었고, 그들의 만남은 헤리옷 부인의 남편이 죽고 난 후 결혼으로 완결된다. 뜻하지 않게 그 부인은 밀과 프랑스 여행 중에 사망하고, 그는 아비뇽에 집을 구입하고 그녀의 무덤을 가까이서 방문하게 되는 열정적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의 {자서전}은 그의 사후에 그 부인의 딸이 자신과 관계된 부분을 삭제한 채 출판사에 원고가 넘겨지게 되어서 출판되었다. {자유론}의 헌사에서 그가 보여준 그 부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보통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뜨거운 것이었다. 밀은 1873년에 67세의 나이로 진리에 대한 뛰어난 능력과 열정적인 마음을 가진채 인류에게 지대한 공헌을 하다가 삶을 마감하였다.


4. 밀의 자유주의적 공리주의

밀은 벤담의 쾌락적 공리주의를 비판적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는 영국의 경험주의적 전통을 도덕에도 일관되게 적용시키면서 형이상학적 입장에 기초한 칸트의 도덕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당신의 행동이 모든 이성적 존재에 의해서 법칙으로서 수용될 수 있도록 해주는 규칙에 따라서 행동하라" 그러나 그가 이 격률로부터 어떠한 도덕의 실제적 의무를 도출하기 시작할 때, 그는 가장 포악하게 비도덕적인 행위의 규칙이 모든 이성적 사람들에 의해서 수용됨에 있어서 어떠한 모순도, 어떤 논리적(물리적인 것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불가능성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거의 처참할 정도로 실패한다. 그가 보여준 사실은 그것들의 보편적 수용의 결과가 아무도 선택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 불과하다.(밀, 254쪽)


이것은 철두철미하게 반형이상학적 경험론에 기초한 발언이고, 결과주의(consequentialism)에 충실한 입장이다. 행위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궁극적 기준은 그 보편적 법칙성에 있다고 하는 선험적 도덕원칙도 실제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그 정당성을 결과에 둘 수 밖에 없다. 시즈위크(Sidgwick)와 같은 공리주의자들은 대부분의 도덕이 실제로는 공리주의적 성격을 띤다고 주장한다.

이로부터 밀은 공리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도덕의 기초로서 공리 혹은 최대행복의 원칙을 수용하는 교의(creed)가 주장하는 바는, 행위는 행복을 증진시키는 경향에 비례해서 옳은 것이고 행복의 반대를 생산하는 경향에 따라서 그른 것이다. 행복은 쾌락, 즉 고통의 부재를 의미하고, 불행은 고통, 즉 쾌락의 박탈을 의미한다. 그 이론에 의해서 정립된 도덕기준에 대한 투명한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한다. 특히 그 이론이 무엇을 고통과 쾌락의 개념에 포함시키는지와 이러한 점이 어느 정도로 미결정된 문제인지에 대한 것이 그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러한 보충설명이 이 도덕이론이 기초한 삶의 이론--즉 쾌락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목적으로서 바람직한 유일한 것이고, 모든 바람직한(desirable) 것들(다른 어떤 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공리주의에서도 다양한 것들)은 그 자체로 내재한 쾌락을 위해서거나 혹은 쾌락의 증진과 고통의 방지에 대한 수단으로서 바람직하다--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밀, 257쪽)


이러한 밀의 입장은 표면적으로 벤담과 크게 다른 점이 없어 보이지만, 쾌락과 고통을 야기시키는 대상들을 반드시 육체적 물리적 쾌락만을 배타적으로 지칭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열려진 상태로 남겨두었다는 점에서 벤담과는 구별된다. 그는 이어서 사람들이 에피쿠로스 학파와 그 추종자들의 쾌락주의를 "돼지의 철학"이라고 비판하는 것에 반박한다. 인간의 쾌락만을 극대화하기 때문에 돼지와 인간을 동일시한다는 비판에 대한 에피쿠로소 학파의 반박의 요점은, 인간의 위치를 격하시키는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 비판자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기껏해야 돼지들 정도의 쾌락밖에 즐길 줄 모르는 존재라는 전제를 가정해야만 비판자들의 입장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피쿠로스 학파에 따르면, 인간은 더 상위의 쾌락을 즐길 수 있는 지적 능력과 상상력을 보유한 존재라는 것이다.(밀, 258쪽)

이러한 반박은 묵자가 맹자에게 한 비판에 대한 반박과 논리적으로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묵자가 겸애설을 주장하면서, "길에 있는 노인을 자신의 친할아버지와 평등하게 잘 대우해야 한다"라고 한 주장에 대해 유가는 그것을 "자신의 친할아버지를 길거리의 노인과 마찬가지로 푸대접하라"는 말로 재해석하였다. 물론 이것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하는 입장이 가진 한계를 지적하려는 전략이다. 밀도 마찬가지로 공리주의자가 쾌락만을 추구한다는 것이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맹자와 밀은 차별이 정당하게 가해져야 하는 곳에서 평등을 고집하는 것은 의도하지 않은 오류에 봉착하게 된다는 논리를 펴는 것이다.

밀은 여기서 에피쿠로스 학파와 벤담을 자신과 다음과 같이 구별한다.

공리주의적 저술가들은 일반적으로 정신적 쾌락이 육체적 쾌락보다 주로 더 큰 영원성, 안전성, 절약성의 관점에서--즉 그들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 여건적 이득(circumstantial advantages)의 관점에서-- 우위를 인정한다는 사실은 반드시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점에 있어서 공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소위 더 높은 입장을 전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취할 수 있었다. 어떤 종류의 쾌락은 다른 것들보다 더욱 바람직하고 더욱 가치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공리의 원칙과 대단히 양립가능한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을 측정함에 있어서 질이 양과 마찬가지로 고려됨에도 불구하고, 쾌락의 측정은 오직 양에만 의존하여야 한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을 것이다.

만약 누가 나에게 쾌락에 있어서의 질적 차이의 의미가 무엇인가, 혹은 한 쾌락을 다른 쾌락보다 더욱 가치있게 만드는 것이, 단순히 쾌락으로 간주할 때, 양적 차이를 제외하고 그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거기에는 오직 한가지 가능한 대답이 있을 뿐이다. 두 쾌락 중에서, 만약 양자를 경험한 모든 사람 혹은 거의 모든 사람이, 그것을 선호할 도덕적 의무의 어떠한 감정에도 관계없이, 그 중 어느 하나를 결정적으로 선호한다면, 그것은 더욱 바람직한 쾌락이다. 만약 그둘 중 하나가, 양자에 충분하게 친숙한 사람들에 의해서, --비록 그 사람들이 그것에 더욱 많은 불만족이 동행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선호되는 다른 것보다 월등한 위치에 놓여지게 된다면, 그리고 만약 그것이 그들의 속성상 발생될 수 있는 다른 쾌락의 어떠한 양에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선호된 향유(preferred enjoyment)에, 양을 대단히 능가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 양에 적은 고려를 하게 되는, 질적 우월성을 정당하게 부여한다.(밀, 258-9쪽)


이 논의는 대단히 복잡하지만 두가지 주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첫째, 밀이 대부분의 경우에 정신적 쾌락이 육체적 쾌락보다 많은 양의 가치를 가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더 나은 방법으로 질적 차이의 개념을 도입한다는 점은 주목할만 하다. 그리고 그러한 질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공리주의와 일관되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밀이 양적 차이를 전혀 도외시한다고 생각할 수 없다. 둘째, 질적 차이는 양자를 모두 경험한 사람의 판단과 선호에 의해서 인정된다는 사실이다. 그는 끝내 형이상학적으로 초월적인 새로운 기준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현명한 판단자의 판단은 초월적인 것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숙고된 경험에 기초한 것이고, 이것이 최종적인 판단인 이유는 달리 의존할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만약에 여러 사람의 의견이 상이할 경우에는, 다수결에 따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밀, 261쪽) 일부 비판가들이 지적 엘리트들의 독재를 밀이 옹호한다고 주장하지만, 밀은 분명히 지식을 소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별하면서도 독재가 아니라 민주적인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한다.

따라서 밀은 행복과 만족(happiness and content)을 구별하고, 인간이 자신의 존엄성(dignity)을 유지하기 위하여 행복을 희생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즉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질적으로 높은 쾌락을 발생시키는 것은 행복의 일부분이며, 결코 희생되어질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만족한 돼지가 되는 것보다 불만족한 인간이 되는 것이 낫고, 만족한 바보가 되는 것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낫다. 그리고 만약에 바보 혹은 돼지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 이유는 그들이 문제를 자신들의 입장에서만 보기 때문이다. 비교되는 다른 당사자는 양면을 다 알고 있다."라고 주장한다.(밀, 260쪽) 밀의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소크라테스와 돼지의 쾌락 사이에 질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이유가 전자는 양쪽에 대한 지식을 모두 가지고 가치판단을 내린다는 점에 있다는 사실이다. 밀이 철두철미하게 경험론의 전통에서 공리주의를 옹호하려는 시도--비록 그것이 성공적이었는가는 나중에 판단하기로 한다고 하더라도--를 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행복이 인간의 활동에 필수적 목표가 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밀은 공리가 행복의 추구만이 아니라 불행의 방지 혹은 감소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다고 인정한다. 더 나아가서 후자가 전자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말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행복을 절대로 성취할 수 없다는 주장은 과장이라고 말한다.(밀, 263쪽) 물론 밀은 불완전한 사회에서 행복이 불가피하게 희생되어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xx 또 비자발적으로 행복의 포기를 강요당하는 노예의 삶을 사는 야만인 시대가 인류사에 있었다는 점도 인정한다. 역설적으로, 행복을 포기함으로써 더 큰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 단지 밀이 부정하는 것은 행복의 희생 그 자체가 선하다는 주장이다.(밀, 267-8쪽)

또한 밀은 인간이 자신의 시대에서 경험하고 있는 고통--예를 들어 가난--은 완전히 인간의 노력과 애정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믿는 19세기적 낙관주의자이다.(밀, 266쪽) 이상적 사회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벤담과 마찬가지로, 밀도 법과 사회제도, 그리고 교육과 여론이 개인이익과 전체이익이 합일되도록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밀, 268-9쪽)

밀은 공리주의에 대한 두가지 상반되는 비판에 대해서도 반박한다. 먼저, 공리주의가 인간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비판에 대해서, 밀은 이러한 비판이 도덕기준의 의미에 대한 오해 그리고 행위의 규칙과 행위의 동기를 혼돈하는 오류에 기인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공리주의는 모든 인간이 항상 공리주의적 동기에서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를 인도해주는 규칙이 최선의 결과를 낳는 방향으로 제정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그는 우리가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동기가 의무에서건 돈을 지불받기 위해서건 그 행위는 옳다고 주장한다.(밀, 269-70쪽)

다른 하나는 공리주의가 인간의 성품에 대한 도덕적 평가는 하지 않고, 단지 행위의 결과에 대한 "차갑고 딱딱한" 계산만을 한다는 비판이다. 만약에 공리주의가 인간의 성품에 따라서 도덕을 판단한다면, 즉 착한 사람이 행하는 행동은 모두 옳고, 악한 사람이 하는 행동은 모두 그르다고 판단해야 한다면, 이것은 공리주의 뿐만 아니라 도덕원칙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고 밀은 주장한다.(밀, 271쪽) 왜냐하면 어떤 도덕규칙도 그러한 것에 기초해서 도덕성을 판단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마 유교와 같은 덕윤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외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밀은 덕을 함양하는 목적 자체도 더 많은 공리가 창출될 수 있기 때문이지, 그 자체로 도덕을 판단해주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밀, 272쪽)

밀은 공리주의도 다른 도덕과 마찬가지로 엄밀한 규칙적용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여건에 대한 고려를 해야 하고, 상충되는 규칙들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리주의만이 이러한 상충되는 규칙들 사이에 최종적 판단을 내려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롤즈는 공리주의가 도덕원칙의 적용에 있어서 지나치게 유연한 자세를 취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롤즈, 1971b; 22-7쪽) 즉 공리주의는 노예제도와 같이 절대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사회제도도 공리가 극대화되기만 하면 인정할 수 있는 데 이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밀을 비롯한 공리주의자들의 반격은 대단히 희귀한 여건하에서는 노예제도가 정당화될 수도 있지만, 그러한 경우는 현대사회의 물질적 여건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공리주의자들은 절대적 규칙의 준수를 요구하면 그 둘이 상충하는 경우에 두가지 절대규칙중의 하나가 파기되어야 하는 모순에 처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밀은 공리주의 원칙의 증명을 시도한다. 이 증명은 엄격한 의미의 증명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양심에 설득력있는 증거를 가지고 호소하는 것이다. 우선 그는 행복이 그 자체로 가치있는가를 증명하는 것은, 어떤 대상이 보여질 수 있는가를 증명하는 유일한 증명이 사람들이 그것을 실제로 보는 것이고, 들려질 수 있는가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듣는가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밀, 288쪽) 즉 어떤 것이 바람직하다(desirable)는 것의 유일한 증명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바란다(desire)는 것이다. 이는 바라는 바(desired)가 반드시 바람직하다(desirable)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의 증명이라고 볼 수 없다. 사람들이 실제로 욕구하는 것 중에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마약, 담배, 술, 난삽한 성관계 등과 같이 사람들이 실제로 선호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결코 바람직하고 가치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에 대한 밀의 대답은 첫째, 우리에게 달리 증명할 수 있는 어떤 길이 있는가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즉 경험주의적 관점에서 경험해보지 않고, 더 나아가서 경험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과연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초월적 형이상학에 기초한 가치론 역시 직접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제 1 명제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굳이 밀만이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무어(G. E. Moore)가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라고 명명한 것은 "가치와 사실은 엄격하게 분리된다"는 흄의 전제를 수용할 때 정당한 것이다. 무어가 그것을 오류라고 불렀다는 사실, 흄이 존재와 당위의 분리를 선언했다는 사실이 모든 자연주의자들이 오류를 범한다고 말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둘째, 개인들이 실제로 선호하고 욕구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가치있다는 주장이 무리없이 수용되려면, 개인들의 판단이 항상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전제가 수용되어야 한다. 물론 각 개인이 항상 합리적인 상태에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항상 비합리적 상태에 있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개인들은 합리적 정신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어린아이와 정신이상자들을 제외하면, 정상적 교육을 받은 성인의 경우에는 합리성이 정상적인 정신상태이다. 따라서 관련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 숙고적 판단하에서 욕구하는 것은 대체로 바람직한 것들이 많다고 주장될 수 있다. 욕구에 관한 한 개인은 주권자의 입장에 있다.

여기서 밀의 주장은 적어도 바람직한 것의 필요조건을 말하는 것이지 충분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아무도 어떤 대상을 욕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즉 사람들이 실제로 욕구하는 것 모두가 다 바람직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는 예외적인 경우이고, 개인들이 명백하게 합리성을 결여한 상태에 국한된다는 사실을 밀은 지적할 것이다. 따라서 밀이 자인하듯이 그의 증명은 기하학적 증명과 같이 엄밀한 것이 아니라 설득력있게 우리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요점은 다른 증명 방식이 없다는 것이다.

밀은 행복이 유일한 본질적 가치인가에 대한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한다. 그러나 그것이 덕, 돈, 명예, 권력, 음악, 건강 등이 본질적 가치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덕은 그 자체로 추구되어야 할 본질적 가치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본질적 가치 중에서도 최상의 가치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주장이 행복이 유일한 본질적 가치라는 주장과 양립가능한가? 밀의 대답은 이들 다양한 가치들은 행복의 주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행복이 유일한 본질적 가치라는 사실이 행복의 내용과 요소가 벤담과 같이 단일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원래 이들 가치들은 그 자체로 본질적 가치들인 것은 아니었다. 밀의 연상심리학(association psychology)을 받아 들인다면, 이 가치들--특히 돈의 경우--은 처음에는 행복의 주요한 수단으로 출발하였으나, 그것이 가져다 주는 행복과 완전하게 밀착되면서 행복의 일부분으로 고착되었다.

밀은 결국 행복의 개념을 광의적으로 해석하여서 "진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항구적 이익"을 공리 또는 행복이라고 주장하고, 그러한 인간의 자율성을 증진시키는 데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들도 행복의 개념에 포함시킨다. 롤즈의 기본적 가치들에 권리, 자유, 부, 소득, 권력, 기회, 자긍심(self-esteem)등을 포함시키고, 이것들은 합리적 개인의 인생목표가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기본적인 요소들이라고 주장한다.(Rawls, 1971; 92쪽) 브링크(Brink, David)는 객관적 가치론을 공리주의와 결합하여서 객관적 공리주의가 가장 정당한 형태의 공리주의라는 주장을 한다. 그는 가치를 본질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extrinsic values)로 구분한다. 전자는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는 것이고, 후자는 전자에 대한 수단으로서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후자는 다시 단순한 수단적 가치와 필수 수단적 가치(necessary instrumental values)로 구분된다. 밀이 광의로 해석한 행복의 개념은 필수 수단적 가치도 본질적 가치의 한 부분으로 포함하는 것이다. 즉 본질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수단적 가치는 본질적 가치와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밀은 쾌락적 전통에서 벗어나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브링크도 주장하듯이, 공리주의가 반드시 쾌락주의적일 필요는 없다. 이러한 점에서 밀이, 자신이 스스로 인식하든지 않든지 간에, 벤담의 용어를 사용하여서 행복과 쾌락을 동일시하는 것은 많은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오히려 밀은 드워킨(Ronald Dworkin, 1981)이 분류하는 자원주의(resourcism)--여기에 롤즈가 포함된다--에 더욱 가깝다고 하겠다.

센(Sen, 1973)은 공리주의의 핵심적 요소를 세가지로 정의한다. 첫째, 결과주의(consequentialism)는 행위나 정책의 결과만이 그 도덕성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된다는 주장을 편다. 행위의 동기를 중시하는 의무론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사고이고 모든 공리주의가 필수적으로 함유해야 하는 요소이다. 밀은 {공리주의}의 여러 곳에서 칸트를 비판함으로써 결과주의적 입장을 표명하지만, {자유론}에서 그가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에 대하여 보여주는 거의 절대적 지지는 과연 그가 결과주의를 일관되게 옹호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 즉 자유에 대한 옹호가 결과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경우에는--물론 밀은 거의 모든 경우에서 자유와 공리가 충돌하지 않는다고 믿지만-- 결과주의와 마찰을 빚게 된다.

둘째, 복지주의(welfarism)는 가치의 유일한 기준적 주관적 심리적 기준인 개인의 감정(feeling)에 둔다. 밀은 행복이 쾌락과 동일시되고, 행복으로 다른 가치들이 모두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벤담과 달리 단순한 육체적 쾌락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경멸하면서 정신적 쾌락이라는 다소 애매모호한 개념을 도입하고, 복수 이상의 가치를 행복의 필수요소로 받아들인다. 그의 공리 개념은 단순한 주관적인 가치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객관적 요소를 다분히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킨다.

세째, 각 개인의 공리를 총합(sum-ranking)하여서 사회복지함수(social welfare function)를 계산한다. 여기서 필수적으로 대두되는 문제들 중의 하나는 과연 상이한 개인들간의 공리가 비교가능한가라는 것이다. 개인마다 동일한 경험으로부터 향유하는 선호도가 각각 다를 때, 그것들을 총괄해서 비교할 수 있는 독립적이고 유일한 측정기준이 있느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것은 다분히 기술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행복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필수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공리주의뿐만 아니라 사회분배정의를 실현하려는 어떤 다른 도덕도 상이한 개인간의 비교를 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이유로 해서 실증적 과학자들은 도덕철학이 비과학적이라고 일축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도덕적 요청사항으로 개인간 비교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고, 실제로 우리는 개인간 비교를 항상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설령 그러한 기술적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가정하더라도, 롤즈와 노직과 같이 개인의 독립성(separateness)을 무시하는 사회복지함수 산출방식이라는 비판은 여전히 가능하다. 벤담의 대답은 공리의 계산은 일차적으로 각 개인의 공리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고, 한 개인의 공리에 더 가중치를 준다든지, 또는 그것을 제외시키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을 적용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밀은 그 이유에 추가해서,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이 공리의 개념에 내포되어 있고, 권리와 정의의 개념을 공리주의자들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비판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개인의 독립성을 의무론자들보다 덜 고려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개인의 독립성에 대한 고려는 더 강하게 할수록 반드시 좋은 것인가라는 의문은 동시에 제기될 수 있다.


5. 결론

현실적 제도로서의 사회주의가 곤궁에 처하고,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고조된 현재의 상황에서 자유주의적 공리주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각별할 수 밖에 없다. 특히 환경에 대한 위기의식이 단순히 비관론자들의 과장된 경고만은 아니라고 인식되기 때문에 인간이 어떠한 도덕원칙하에서 사회생활을 영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인류생존을 고려하면서 제시되어야 한다. 자유주의적 공리주의는 과연 그러한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소크라테스의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옳은 삶인가?"라는 우리 생에 대한 반성적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자유주의적 공리주의는 과연 줄 수 있는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유주의적 공리주의를 체계화한 밀의 사상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센의 공리주의에 대한 정의 따르면, 밀은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공리주의자로 분류되는 데 큰 무리가 없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은 특히 밀이 일관된 결과주의를 고수하였는가에 있다. 왜냐하면 결과주의는 공리주의에서 탈락할 수 없는 필수적 요소이고, 많은 학자들이 현대에 와서 두 개념을 거의 구분없이 사용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가장 큰 걸림돌은 밀이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에서 결과주의를 무시하였다는 비판이다.(Ten, 1980; 9-40쪽) 여기서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았지만, 밀은 개인의 합리성에 기초한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고, 개인에 대한 간섭도 인지적 합리성이 결여된 상태--예를 들어 어린아이, 정신이상자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인의 자유로운 결정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 전체공리와 행복의 증진과 결정적으로 상충하는 경우가 심각하게 대두된다고 밀이 생각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밀이 어떻게 분류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가 어떻게 개인의 자유와 사회전체의 공리를 자체모순없이 증진시켜 나갈 수 있는가이다. 현대 한국사회는 공리주의적 사회도 아니고 자유주의적 사회는 더더구나 아니다. 개인 삶의 의미와 사회전체의 방향은 극복하고 발전해야 할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자유주의적 공리주의로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하지 않는 어떤 도덕원칙도 우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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