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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ward73
- 공개여부
- 작성일
- 2008.5.12
베니의 비디오 (미카엘 하네케 감독)
이 영화는 미디어의 간접 경험이 가져다주는 중화된 죄책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미디어를 통한 간접 경험은 경험 당사자에게 현실감을 지연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베니가 비디오를 통해 경험한 돼지 살해를 오늘 처음 만난 자신의 여자 친구에게 직접적으로 시험해보는 것과 같은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장면이 영화에 등장하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어떤 아이가 자기 동생을 칼로 찔러 죽였는데, 오락기처럼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 어떤 신문의 기사도 이런 맥락과 유사하지 않을까?
결국 미디어가 유쾌하거나 불쾌한 직접적 경험을 중화시키고 제거함으로써, 미디어와 대면하는 사람은 미디어 속 사건에 대한 동정과 공감이 제거됨으로써 타인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아주 가혹해지기도 한다. 물론 동정과 공감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것도 미디어의 문제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미디어는 동정과 공감을 자극하는 미디어의 특징에 대해서는 일관성 있게 외면하고 있다. 대신 이 영화는 상영되고 있는 ‘베니의 비디오’라는 영화 미디어 자체를 통해 동정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영화 속 주인공과 매체의 관계에서 등장하는 매체의 역할은 경험의 중화와 제거이고, 영화와 영화를 보는 관객 사이에 등장하는 매체의 역할은 동정과 공감을 자극하는 것이라 하겠다.
아무튼 영화는 미디어를 통해 죄책감과 불쾌에 대한 경험이 제거된 한 인간이 미디어를 통해 관음증과 SM의 역학을 작동시키고 이를 극대화시킨다는 사실을 점증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미디어 세대의 시선은 미디어 세대 밖에서도 동시에 등장한다.
그래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아이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서 그가 늘상 강조했던 시민으로서의 의무 책임 합의 등을 단번에 위반하고 자신의 아이를 감싸는 가혹한 현실을 드러낸다.
사실 폭력은 미디어에도 있었지만, 미디어 밖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디어 세대가 형성한 냉소적 시선은 동결건조된 그들의 영혼으로 결국 기성세대의 이중성을 고발하는 양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는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시민으로서 지켜야할 의무 사이에 갈등을 보이고 있는 부모의 감정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다.
미디어가 가진 객관이라는 가면을 쓴 시선을 그 역시 가지고서 냉소적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모든 장면을 스크린이라는 매체를 통해 보는 관객은 어떤가?
이 영화는 관객에게 미디어 세대가 보여주는 폭력적 특성을 보여주는 데 그치는 것인가? 아니면 이러한 특성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모종의 각성을 요구하는 것인가?
내가 보기에 베니의 비디오라는 영화는 미디어 세대의 특성을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드러나는 사건의 의미를 각성할 기회를 관객에게 제공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 그래서 관객은 이 영화를 통해 미디어를 중심에 두고 발생하는 배치와 계열의 의미를 되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1)주인공-미디어-기성세대(부모), 2)주인공-미디어-객관세계(환경세계), 3)미디어2(영화)-미디어1(베니의 비디오)-관객, 4)주인공-미디어-주인공의 친구들과 같은 배치 혹은 계열 말이다.
이들 각 항에서 미디어는 각각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1)에서 미디어는 대립과 단절이라는 역할을 한다. 주인공은 미디어와 지나치게 관계를 맺음으로써 기성세대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기성세대는 미디어를 통해 주인공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물론 미디어가 전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바쁜 삶이 베니를 미디어와 관계하게 한 인과조건이 영화 속에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니의 삶을 그렇게 만들어놓은 아주 중요한 기제가 미디어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미디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2) 여기서 객관세계는 도살당하는 돼지와 베니가 미디어를 통해서만 경험하는 바깥 세계와 자신의 모습이다. 여기서 미디어는 베니로 하여금 특정한 감각을 단절시키고, 특정한 시선(카메라가 제공하는 시선)과 편집된 청각이미지(매체는 소리도 편집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만을 갖게 함으로써 외부세계와의 연결을 제한하는 기제이다. 그래서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가 되고, 미디어 자체가 권력이 되는 것이다.
3) 이 부분이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인데, 미디어를 미디어가 관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디어가 미디어를 관찰한 결과를 관객이 관찰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미 시선은 세 가지로 등장한다. 영화 속 미디어의 시선, 영화 속 미디어를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 그리고 그 영화의 시선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관객의 시선. 만일 관객이 자각하지 못했다면 시선은 두 개밖에 등장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를 자각하지 못하는 관객은 결국 자신의 시선과 영화의 시선을 일치시킬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계열에서 후자는 각각 전자에 대하여 더 큰 권력을 갖고 있다. 제1 항인 비디오는 비디오가 세상을 바라보는 권력을 보여주고, 제 2항인 영화는 비디오가 권력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제 3항인 관객은 비디오와 이 영화가 권력이며, 동시에 이 권력을 자신이 영화를 통해 행사하고 있으며, 자신의 일상이 이러한 권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자각한다. 이처럼 복잡한 시선을 얼기설기 엮어놓고서 이 영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가 바로 이러한 현실자각 아닐까?
4) 마지막으로 이 부분은 미디어의 자극이 주인공의 사회적 관계 역시 단절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항은 사실 1의 항과 유사한 형태를 보여주는 셈이다.
이 영화는 이 각항에 대한 대답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 다른 주제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각항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서 이 영화는 ‘폭력’과 같은 문제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미디어의 간접 경험이 가져다주는 중화된 죄책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미디어를 통한 간접 경험은 경험 당사자에게 현실감을 지연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베니가 비디오를 통해 경험한 돼지 살해를 오늘 처음 만난 자신의 여자 친구에게 직접적으로 시험해보는 것과 같은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장면이 영화에 등장하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어떤 아이가 자기 동생을 칼로 찔러 죽였는데, 오락기처럼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 어떤 신문의 기사도 이런 맥락과 유사하지 않을까?
결국 미디어가 유쾌하거나 불쾌한 직접적 경험을 중화시키고 제거함으로써, 미디어와 대면하는 사람은 미디어 속 사건에 대한 동정과 공감이 제거됨으로써 타인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아주 가혹해지기도 한다. 물론 동정과 공감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것도 미디어의 문제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미디어는 동정과 공감을 자극하는 미디어의 특징에 대해서는 일관성 있게 외면하고 있다. 대신 이 영화는 상영되고 있는 ‘베니의 비디오’라는 영화 미디어 자체를 통해 동정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영화 속 주인공과 매체의 관계에서 등장하는 매체의 역할은 경험의 중화와 제거이고, 영화와 영화를 보는 관객 사이에 등장하는 매체의 역할은 동정과 공감을 자극하는 것이라 하겠다.
아무튼 영화는 미디어를 통해 죄책감과 불쾌에 대한 경험이 제거된 한 인간이 미디어를 통해 관음증과 SM의 역학을 작동시키고 이를 극대화시킨다는 사실을 점증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미디어 세대의 시선은 미디어 세대 밖에서도 동시에 등장한다.
그래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아이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서 그가 늘상 강조했던 시민으로서의 의무 책임 합의 등을 단번에 위반하고 자신의 아이를 감싸는 가혹한 현실을 드러낸다.
사실 폭력은 미디어에도 있었지만, 미디어 밖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디어 세대가 형성한 냉소적 시선은 동결건조된 그들의 영혼으로 결국 기성세대의 이중성을 고발하는 양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는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시민으로서 지켜야할 의무 사이에 갈등을 보이고 있는 부모의 감정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다.
미디어가 가진 객관이라는 가면을 쓴 시선을 그 역시 가지고서 냉소적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모든 장면을 스크린이라는 매체를 통해 보는 관객은 어떤가?
이 영화는 관객에게 미디어 세대가 보여주는 폭력적 특성을 보여주는 데 그치는 것인가? 아니면 이러한 특성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모종의 각성을 요구하는 것인가?
내가 보기에 베니의 비디오라는 영화는 미디어 세대의 특성을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드러나는 사건의 의미를 각성할 기회를 관객에게 제공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 그래서 관객은 이 영화를 통해 미디어를 중심에 두고 발생하는 배치와 계열의 의미를 되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1)주인공-미디어-기성세대(부모), 2)주인공-미디어-객관세계(환경세계), 3)미디어2(영화)-미디어1(베니의 비디오)-관객, 4)주인공-미디어-주인공의 친구들과 같은 배치 혹은 계열 말이다.
이들 각 항에서 미디어는 각각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1)에서 미디어는 대립과 단절이라는 역할을 한다. 주인공은 미디어와 지나치게 관계를 맺음으로써 기성세대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기성세대는 미디어를 통해 주인공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물론 미디어가 전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바쁜 삶이 베니를 미디어와 관계하게 한 인과조건이 영화 속에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니의 삶을 그렇게 만들어놓은 아주 중요한 기제가 미디어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미디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2) 여기서 객관세계는 도살당하는 돼지와 베니가 미디어를 통해서만 경험하는 바깥 세계와 자신의 모습이다. 여기서 미디어는 베니로 하여금 특정한 감각을 단절시키고, 특정한 시선(카메라가 제공하는 시선)과 편집된 청각이미지(매체는 소리도 편집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만을 갖게 함으로써 외부세계와의 연결을 제한하는 기제이다. 그래서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가 되고, 미디어 자체가 권력이 되는 것이다.
3) 이 부분이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인데, 미디어를 미디어가 관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디어가 미디어를 관찰한 결과를 관객이 관찰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미 시선은 세 가지로 등장한다. 영화 속 미디어의 시선, 영화 속 미디어를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 그리고 그 영화의 시선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관객의 시선. 만일 관객이 자각하지 못했다면 시선은 두 개밖에 등장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를 자각하지 못하는 관객은 결국 자신의 시선과 영화의 시선을 일치시킬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계열에서 후자는 각각 전자에 대하여 더 큰 권력을 갖고 있다. 제1 항인 비디오는 비디오가 세상을 바라보는 권력을 보여주고, 제 2항인 영화는 비디오가 권력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제 3항인 관객은 비디오와 이 영화가 권력이며, 동시에 이 권력을 자신이 영화를 통해 행사하고 있으며, 자신의 일상이 이러한 권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자각한다. 이처럼 복잡한 시선을 얼기설기 엮어놓고서 이 영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가 바로 이러한 현실자각 아닐까?
4) 마지막으로 이 부분은 미디어의 자극이 주인공의 사회적 관계 역시 단절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항은 사실 1의 항과 유사한 형태를 보여주는 셈이다.
이 영화는 이 각항에 대한 대답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 다른 주제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각항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서 이 영화는 ‘폭력’과 같은 문제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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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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