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ward73
  1. 잡학

이미지

(13) 바리공주 무조신이 되기까지




△ 만화영화 ‘바리공주’ 의 캐릭터. 미농미디어 제공


 

버림받은 바리,
저승에서 찾은 슈퍼파워
‘친자봉사’ 집착하는 불라국왕
일곱번째 딸을 버리는 순간
불치병속에 버려지는데
이는 바로 국가의 질병이라

우리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여신은 누굴까? 바리공주! 삼척동자도 아는 이름이라고 하면 지나칠지도 모르지만 웬만한 동자(童子)들은 다 아는 이름이다. 과거와는 달리 근래에는 무속신화도 옛이야기로 새 단장을 하고 아이들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사회의 노소 여성들이 굿판에서 만나던 여신이 이제는 동화의 얼굴로 우리 아이들과 만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저 친숙한 바리의 얼굴에서 무엇을 읽고 있는 것일까? 제 몸을 던져 죽을병에 걸린 아비를 살려낸 바리공주. 인당수에 몸을 던져 아비의 눈을 뜨게 한 심청과 닮았으니 효행을 읽어야 할까? 자아를 포기한 저승여행을 통해 생명의 묘약을 얻어 부모를 살리고 그 공덕으로 신이 된 바리공주. 희생을 통한 성화(聖化)라는 종교적 주제를 그 안에서 포착해야 할까? 긴 저승길을 통해 밥하고 빨래하고 애낳는 여성들의 삶을 여실히 재현하는 바리공주. 굿판의 참례자인 여성들이 바리를 통해 바리데기·소박데기인 자신들의 이야기를 후련히 풀어내니 한풀이(解寃)의 미학을 읽어내야 할까?

바리공주를 만나고 느끼고 이해하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수십 종에 이르는 판본만큼이나 다양한 얼굴로 바리는 굿판에서 혹은 독서판에서 우리를 만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부터 만날 바리공주는 우리가 그간 만나본 적이 없는 여신이다. 아니 늘 우리 곁에 있었지만 우리가 느끼고 이해하지 못한 바리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바리데기>가 가족 이야기, 가족의 확대판인 국가의 이야기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불라국이라는 가상의 국가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지 않은가. 불라국은 그저 저승인 서천서역국에 대립되는 이승의 공간만은 아니다. 나아가 이 가상의 국가가 모종의 질병을 앓고 있다는 점도 놓칠 수 없다. 줄줄이 딸만 태어나는 병이 그것이다. 일곱 번째 딸 바리공주는 그 질병의 극점이다. 반드시 아들을 얻어야 한다고 기자치성(祈子致誠)까지 드렸건만 낳고 보니 말순이 바리데기였으니 말이다.

불라국왕 오귀는 왜 그다지도 아들에 집착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불라국이 답이다. 국가는 권력의 지속을 위해 아들-후계자를 필요로 한다. 신라 경덕왕의 아들에 대한 편집증을 생각해 보라. 오귀대왕과 경덕왕은 쌍둥이다. 국왕에게 아들이란 국가의 지속을 보장하는 둘도 없는 장치인데 그 지속장치에 빨간불이 들어온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귀대왕의 불치병이 시작된다. 고대하던 아들 대신 바리데기가 첫울음을 울자 화를 삭이지 못한 왕은 ‘말순이’를 버리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바리데기를 버리자 아버지도 불치병 속에 버려진다. 이런 식으로 <바리데기>는 국가의 질병이라는 문제적 상황을 우리 앞에 던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 후 <바리데기>는 다소 이상한 방식으로 해결을 시도한다. 만약 이 신화가 국가권력의 기원이나 지속, 혹은 변동을 보여주는 왕권신화였다면 경덕왕 식의 해결책을 시도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속신화 <바리데기>는 아들 낳기가 아니라 버린 딸을 통해 문제해결을 꾀한다. 이 역설적 해결책 안에 <바리데기> 신화의 고갱이가 숨어 있다. 그 해결의 경로를 잠시 따라가 보자.

온 나라 의사가 다 와도 소용이 없자 왕후 길대부인은 옥녀무당을 찾아간다. 한데 무당의 점괘가 얄궂다. 이승의 약은 아무리 써도 소용없다. 반드시 서천서역국 약물을 써야한다! 서천서역국이라니? <바리데기>를 비롯한 우리 무속신화에서 서천서역국은 황천수(黃泉水) 건너편에 있는 저승의 한 공간이 아닌가. 다시 말해 서천서역국은 불라국의 바깥, 현실의 바깥에 존재하는 공간인 것이다. 약물은 국가의 외부에 있다.

바깥에 존재하기는 바리데기도 마찬가지다. 바리데기는 ‘또 딸’이라는 이유로 불라국이라는 국가사회에서 쫓겨난다. 오산 무녀 배경재의 구연본(口演本)을 보면 바리는 옥함에 넣어져 강물에 유기된다. 옥함이 흘러 흘러 닿은 곳이 태양서촌이고 바리는 거기서 바리공덕할머니와 할아버지에 의해 양육된다. 그렇다면 태양서촌은 서천서역국과 유사한 공간이 아닌가. 바리데기 역시 지금 불라국의 외부에 있다. 이렇게 한 국가사회의 외부자가 된 존재가 역시 그 사회의 외부에 있는 서천서역국 여행을 통해 생명의 약물을 국가사회 안으로 가져온다는 것. 국가의 서사로 읽는 <바리데기>의 흥미와 비밀은 여기에 있다.

생명의 약물에다 이들 삼형제
아비를 구하고 윤리를 되살리고
무당들의 조상신을 자청하니
바리데기는 한풀이 굿판을 넘어
외부를 지향하는 신화중 신화로다

그런데 좀더 주목해야할 대목은 소생한 오귀대왕 앞에 정작 구원자 바리데기가 불효자식이니 죽여 달라고 엎드리는 장면이다. 약물을 구하러 갔다가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약수지킴이 동수자를 만나 아들 삼형제를 낳았으니 죄가 크다는 것이다. 죽었던 왕이 소생하자 국가적 사회의 윤리도 되살아나고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윤리야말로 오귀대왕의 불치병을 초래한 주범이 아니었던가. 아들에 대한 집착과 아버지의 허혼(見) 윤리는 동전의 앞뒷면이 아닌가. 죽음에서 소생하자마자 다시 불치병의 바이러스가 코앞에 닥친 셈이다.



△  바리공주는 무속인들의 기구(祈求) 대상이기도 했다. 사진은 19세기에 그려진 바리공주. <무신도>(열화당·1989)에서 발췌.


그러나 <바리데기>식 치료법의 특징은 지독한 효녀 바리데기를 불효자식으로 만드는 오귀대왕과 불라국의 윤리가 오귀대왕의 입을 통해 부정된다는 데 있다. 못된 년이라고 자책하는 딸에게 “야야 그런 말 마르라. 친손봉사는 못할망정 외손봉사는 못하겠나? 아들 삼형제는 어디 있다 말이고? 야야 듣던 말 중 반가운 일이로구나.”(김복순 구연본)하고 왕은 위로한다. 이런 왕의 태도는 친손봉사(親孫奉祀), 다시 말해 아들을 통한 왕위계승을 고집하던 자신에 대한 부정이다.

혹시 아들에 대한 편집증이 딸의 아들을 통한 외손봉사로 변형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회의의 눈초리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선조 이후에 강화되고, 17세기 중후반을 넘어가면서 거의 절대화된 친손봉사의 윤리가 여성들에게 가한 억압을 생각해 보라. 그런 억압 속에 있던 굿판의 여성 참례자들에게 오귀대왕의 태도 변화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가부장제적 국가사회의 질병이 외손봉사의 담론을 통해 교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재발의 가능성을 미연에 제어하는 <바리데기> 식 치료법의 한 특징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무속신화 <바리데기>가 무조신(巫祖神)의 ‘본풀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 하필 바리데기는 무당들의 조상신이 되었을까? 이런 물음에 대해서는 바리데기의 저승여행이 무당이 접신(接神) 상태에서 체험하는 천상·지하 여행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라는 해답이 마련되어 있다. 바리데기 자신이 신화 속에서 무당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무당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가? 뭔가 보통 사람과는 다른 힘을 지닌 사람이 아닌가. 다른 힘이란 무당에게 지핀 신의 힘이겠지만 다른 말로 하면 자연에 내재한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내림굿이라는 형태로 변형되었지만 원시사회에서 입무자(入巫者)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격리되어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자연의 내밀한 힘과 접촉하는 신비체험을 한 후 그 힘을 가지고 사회로 돌아와 무당이 되는 것이다. 동북아 문화권에서 무당이 대장장이와 동일시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대장장이가 철광석을 제련하여 무기와 도구를 만드는 능력이야말로 자연의 무한한 힘을 사회 내부로 들여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리데기가 불라국의 바깥에서 치병의 힘을 가져오는 것은 바로 이런 무당의 치병 원리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슈퍼 파워를 사회의 치유에 쓰지 않고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순간 무당은 현실의 망령에 사로잡힌다. 흔히 무당왕(Shaman King)으로 불리는 고대국가의 왕이 그런 존재들이다. 이렇게 되면 권력은 국가사회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 들어온다. 신은 왕에 종속되고 왕 자신이 신성한 존재가 된다. 바리데기를 버린 불라국 오귀대왕은 바로 저 신성왕(神聖王)의 종국적 형상일 것이다.

그러나 바리데기는 오귀대왕이 아니다. 바리데기는 국가 체제 내부에 안주하려고 하지 않는다. 저승에서 돌아와 제 일을 다한 바리데기는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는 아버지의 뜻도 마다하고 재물도 마다하고 무조신이 되기를 자청한다. 다시 국가사회의 바깥으로 나가겠다는 것이다. 바리데기의 이런 선택은 현실과의 관계에 있어서 긴장감이 넘치는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왜냐고? 굿을 통해, 반복되는 이야기를 통해 일상적 현실에 개입해 들어오는 바리데기가 저 국가의 외부에 있음으로써 불라국으로 표상되는 국가적 사회의 현실과 길항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손봉사’에 집착한다면 국왕은 언제든 불치병에 걸릴 수 있다는 팽팽한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가?

근래 <살아있는 우리신화>(한겨레신문사)를 펴낸 저자는 <바리데기>를 두고 ‘이것이 신화다’라는 표현을 썼다. ‘흐린 영혼을 씻어주는’ <바리데기>의 한풀이 미학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나는 거기 한 마디 덧붙이고 싶다. 오늘 우리가 새로 만난 바리, 국가 체제의 외부를 지향하는 바리데기, 이것이야말로 신화다!

조현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

(14) 우리 신화의 중간계




△ 순환적 세계관에서 보자면 죽은 이를 꽃상여에 실어 보내는 장례식도 이승으로의 귀환을 위한 한 단계다. <한겨레> 자료사진


 




‘생명의 원천’ 저승에서 구한 까닭은…

이승의 대립공간 저승
허나 순환적 세계관에서 보면
무수한 이승들 사이 놓인
통과의례적 공간이라

톨킨이 쓰고 피터 잭슨이 영화로 만든 <반지의 제왕>의 흥미로운 부분 가운데 하나는 중간지역이라는 특이한 공간이다. <반지의 제왕>에 그려진 중간계는 물론 주인공이 잠시 거쳐 가는 통과의 공간이 아니라 거대한 판타지가 펼쳐지는 사건의 공간이지만 영웅 프로도와 그 일행의 반지원정이 이루어지는 중간계는 그 자체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물음도 던진다. 우리 신화의 중간계적 상상력은 어떤 것일까?

우리 신화들을 뒤져보면 천상과 지상, 그리고 지하라는 수직적 공간 구획이 보인다. 이런 공간 분할은 우리 신화만의 특징은 아니다. 샤머니즘의 세계 인식 안에 존재하는 보편성이다. 그렇다면 천상과 지하의 중간에 있는 지상의 인간세계가 중간계인가? 단지 공간적 위계로 본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중간계를 단지 공간적 위계가 아니라 어떤 의례적 위치로 본다면 지상은 그런 공간이 될 수 없다. 비인간계인 천상이나 지하와는 달리 지상은 그저 인간계일 뿐이다.

다시 의문이 생긴다. 그러면 의례적 위치라고 하는 신화의 중간계란 무엇을 말하는가? 잠시 인류학이 말하는 통과의례를 떠올려 보자. 모든 통과의례는 참례자를 기존의 사회로부터 분리시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주변적인 상태로 만든다. 그리고 이런 상태를 거쳐야 참례자는 새로운 사회로 통합된다고 한다. 통합 이전의 주변적 상태에서는 일상의 리듬이 정지되고 비일상적 혼돈이 참례자를 감싼다. 의례적 공간이 신비와 금기에 휩싸이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유화가 유폐되었던 금와왕의 밀실이나 알이 버려진 짐승들의 공간, 심청이 인당수를 통해 들어간 용궁, 심지어는 대학의 세속화된 사발식 현장도 그런 공간이다. 신화의 다양한 중간계 역시 이같은 통과의례적 공간이다.

하지만 도처에 존재하는 이런 공간 가운데 중간계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우리 신화의 공간은 ‘저승’이다. 우리 신화에서 저승은 그저 망자(亡者)들이 가는 죽음의 세계 혹은 지옥이 아니다. 저승 중간계의 의미를 탐색하기 위해 저승을 가장 잘 아는 여신 바리데기를 따라 저승길로 잠시 떠나 보자.

바리데기는 아버지 오귀대왕의 병을 고칠 약물을 구하기 위해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저승길을 나선다. 바리데기가 아는 것은 약수가 서쪽 삼천 리 서천서역국에 있다는 것뿐이다. 물론 이 기약 없는 서역행에 도우미들이 없을 리 없다. 노인이나 스님, 혹은 할미의 형상으로 등장하는 도우미들이 길잡이 노릇을 한다. 이들은 그저 친절한 길잡이가 아니라 밭갈기나 빨래하기와 같은 가혹한 노역을 요구하는 시험관들이지만 바리데기가 누군가. 바리데기는 무사히 저승의 입구인 황천강을 건너 저승 땅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저승의 생김새다. 동해안의 유명한 무부(巫夫) 김석출이 부른 <바리데기굿> 무가를 들어보면 높은 산을 서너 개 넘어가면 세 갈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은 극락 가는 길, 왼쪽은 지옥 가는 길이고, 복판 길로 쭉 가면 서천서역국이라고 노래한다. 서천서역국의 동대산에 약수가 있고 환생(還生)꽃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무속신화가 상상하고 있는 저승은 이처럼 극락·서천서역국·지옥이라는 세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염라대왕이 있는 지옥을 저승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상식과는 꽤나 다른 셈이다.

그렇다면 저승의 이런 공간 배치가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중간계의 상상력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극락·서천서역국·지옥의 배치에서 보자면 서천서역국은 중간 지점이다. 나락(奈落)과 지복(至福)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지대가 바로 서천서역국인 것이다. 물론 서천서역국의 약수나 꽃밭이 극락의 앞마당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판본도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판본들이 추인하고 있는 이 공간 배치는 중간계의 의미심장한 상징으로 우리 앞에 던져져 있다. 생명의 원천은 중간계에 있다는 상징!

그런데 서천서역국이라는 중간지대를 품고 있는 저승은 바리데기가 귀환한 이승과의 관계에 있어서 좀더 큰 단위의 중간계로 존재한다. 저승은 이승과 대립된 공간이지만 순환적 세계관에서 보면 저승은 무수한 이승들 사이에 놓인 통과의례적 공간이다. 왜 파드마삼바바의 <티벳 사자의 서>는 중음신(中陰身)의 상태에 놓인 망자를 위해 해야 할 기도와 중음신의 영혼이 새로 탄생하기 위해 저승의 단계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그토록 자세히 안내하고 있는가. 그것은 불교가 저승을 중간계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불교의 상당한 영향을 받은 무속신화가 저승을 중간계로 이해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바리데기가 고난을 뚫고
생명수를 얻어 이승 귀환하듯
늘 죽어야 산다는
신화의 고갱이가 아닌가



△  봉서암 감로도(甘露圖). 감로도는 죽은 영혼에게 단이슬을 베풀어 지옥 아귀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기원을 표현한 불교 탱화다. 천상과 지옥, 현실을 함께 그려 윤회적 세계관을 표현하는 감로도는 특히 한국에서 널리 유행했다. <지옥도>(대원사·1992)에서 발췌.


바리데기는 고난에 찬 중간계의 통과의례를 거쳐 생명수와 환생꽃을 들고 다시 황천강을 건너 이승으로 귀환한다. 바리데기의 이런 희생 덕분에 자식을 버린 아버지 오구대왕은 새 생명을 얻고, 종내는 길대부인과 더불어 천상의 견우직녀성이 된다. 저승길을 거부해 불효를 저지른 언니들과 그 남편들도 하늘의 별이 되고, 동대산 동수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도 삼태성(三台星)이 된다. 이들을 나락에서 지복으로 끌어올린 힘이 중간계의 생명수와 환생꽃, 그리고 스스로 중간계에 들어간 바리데기의 희생에 있었던 것이다.

생명수와 환생꽃이 있는 죽음의 세계-저승. 이 역설이야말로 중간계의 본질이고 신화적 사유의 골간이다. 신화는 늘 죽어야 산다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천지만물은 창조신의 주검에서 생겨난 것이고, 인도네시아 세람도의 여신 하이누벨레의 해체된 몸에서는 섬사람들의 주식이 된 여러 종류의 감자들이 열린다. 죽음은 삶과 단절되어 있지 않고 고리처럼 서로 이어져 있다. 신화적 사유를 함축한 도상(圖像)이라고 할 수 있는 태극 문양에는 언제나 하나의 힘 안에 다른 하나의 힘이 내포되어 있다. 말하자면 음 안에 양이, 양 안에 음이 중간계로 남아 있는 것이다.

저승 중간계가 지닌 이런 신화적 성격은 서양의 대표적 중간계인 연옥과는 다르다.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에서 주로 채용하고 있는 연옥은 작은 죄를 저질렀거나 큰 죄를 저지르고도 용서받은 영혼이 죄를 씻고 최후의 심판을 거쳐 천국으로 올라가기 전까지 대기하는 대합실 같은 곳이다. <연옥의 탄생>을 쓴 자크 르 고프에 따르면 서양사에서 연옥은 종말론이 퇴조하고 현세를 긍정하는 낙관적 세계관이 등장한 12세기에 탄생했다고 한다. 최후의 심판까지 먼저 간 영혼들이 거주할 집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도 인정했듯이 이런 중간계의 상상력은 이미 고대 종교에 있었다. 아니 샤머니즘 같은 원시종교나 신화에도 있었음을 특기할 필요가 있다.

중세에 탄생한 서양의 연옥이 천국행 대합실이라면 저승은 이승으로 다시 나오기 위한 통과의 장소이다. 연옥을 거쳐 도달하게 되는 천국이 영원한 생명의 장소라면 저승을 거처 다시 온 이승은 다시 죽을 수밖에 없는 제한된 생명의 장소이다. 물론 불교에도 카르마(業)를 벗어난 존재가 도달하는 궁극의 장소인 극락이 있지만 극락은 깨달은 자만이 이를 수 있는 머나먼 서방의 장소일 뿐이다. 믿고 선업을 쌓기만 하면 누구나 갈 수 있는 천국과는 거리가 있다. 대부분의 중생들은 이승과 저승을 왕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무속과 불교의 저승이 연옥보다는 더 신화적 중간계에 가까운 셈이다.

이쯤에서 또 다른 물음표 하나가 고개를 내민다. 바리데기 이야기와 유사한 시베리아의 쿠바이코 신화에서 처녀 쿠바이코는 괴물에게 잘린 오빠의 머리를 되찾아 오기 위해 지하계로 내려간다. 무수한 죄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광경을 목도한 후 마침내 지하계의 왕 이를레 칸 앞에 선 쿠바이코. 그녀는 이를레 칸이 던진 시험을 통과한 후 오빠의 머리를 찾아 이승으로 돌아와 지하세계에서 가져온 약물로 오빠를 소생시킨다. 그렇다면 쿠바이코가 내려간 지하계는 중간계가 아닌가?

쿠바이코 신화에서 생명의 약물이 존재하는 지하계 역시 중간계임에 틀림없다. 천상·지상·지하의 수직적 공간인식을 가지고 있는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는 지하계가 중간계일 것이다. 우리의 지하국대적퇴치 설화 역시 지하 세계로 잡혀간 공주를 한 영웅이 구출해 오지 않는가. 그러나 불교는 우리 신화의 중간계에 상당한 변형을 가져왔다. 지하에서 저승으로의 이동이 그것이다. 수직적 위계에 있던 중간계를 수평적 공간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동한 것은 위치일 뿐이다. 무속신화가 간직하고 있던 지하 중간계의 신화적 본질은 결코 훼손되지 않았다.

조현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3.04.26

댓글 0

빈 데이터 이미지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

toward73님의 최신글

  1. 작성일
    2025.5.10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5.5.10
  2. 작성일
    2025.5.6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5.5.6
  3. 작성일
    2025.5.6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5.5.6

사락 인기글

  1.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5.9
    좋아요
    댓글
    159
    작성일
    2025.5.9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2.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5.9
    좋아요
    댓글
    145
    작성일
    2025.5.9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3.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5.13
    좋아요
    댓글
    144
    작성일
    2025.5.13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예스이십사 ㈜
사업자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