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

서천
- 작성일
- 2022.8.6
대장장이 성자
- 글쓴이
- 권서각 저
푸른사상
2021년 문학나눔 우수도서인, 권서각 시인의 산문집 「대장장이 성자」는 ‘어느 변방 시인의 기억 창고’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부제만 봐도 이 책이 어떤 성격의 책인지 알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197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으로 그동안 3권의 시집(「눈물반응」, 「쥐뿔의 노래」, 「노을의 시」)을 펴냈다. 등단 40여 년(시력은 50년이 넘을 수도)에 3권의 시집이면 과작이라 할 수 있다. ‘쥐뿔’을 한자로 쓴 ‘서각’은 필명이고, 본명은 권석창이다.
시인은 소백산 아랫마을인 경북 순흥 출생으로, 인근의 영주, 풍기, 안동 지역을 묶어 변방이라고 표현했다. 순흥면에 대해서는 은근한 이끌림이 있음을 밝히며 “조선 초기까지 부사가 있는 도호부였다가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 사건으로 세조가 도륙내어 폐부가 되었다고 전해진다.”라고(33p) 소개하고 있다.
「대장장이 성자」에는 모두 30여 편의 산문이 실려 있다. 이 산문들은 모두 저자의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것들이다. 어떤 한 사람의 기억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것을 되살려내서 글로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의미가 있는 기억이길래 그것을 끄집어내 글로 쓴 것일까, 하는 생각 말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이런 의문은 풀렸다.
이 책, 「대장장이 성자」는 저자 자신이 겪은 이야기, 자신이 만난 인물의 이야기, 떠도는 소문 혹은 전설 같은 것을 들려주고 있다. 자신이 겪은 이야기 같은 경우는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그 과정에서 시인이 살던 당시의 사회상과 세태를 알게 해준다. 자신이 만난 인물에 관한 이야기나 떠도는 소문 혹은 진실에 관한 이야기 역시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그 시절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묘미가 있다. 그러니까 이 책에 실린 글들은 한 개인의 기억 속 이야기이지만 단순한 사적 이야기를 넘어서는 산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단순한 회고 취향의 글이 아니라 기록할 의의가 있는 것을 적은 글이라는 말이다. 저자가 글 속에서 자신을 기록자, 혹은 복두쟁이라고 표현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젊은 시절 일본에 다녀온 후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목욕하는 버릇을 굳게 지켰던 것이다. 그의 죽음을 두고 마을에 말이 떠돌았다. 어떤 이는 일본에서 배운 것을 그렇게 오랜 세월 굳게 지켰으니 대단한 친일파라 했다. 어떤 이는, 헤엄 잘 치면 물에 빠져 죽고 나무에 잘 올라가면 나무에 떨어져 죽는다더니, 옛말 하나 그른 거 없다 했다. 기록자는 적는다. 산천은 그대로인데 이제 그런 말을 할 사람조차 없음을 애석해하노라. (48-49p)
“이 이야기는 너만 알고 있어.”
위득이는 위협하듯 말했다.
“그래, 위득아. 니 이야기 난 못 들은 거야.”
그렇게 말했지만 들은 건 들은 거였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복두장이가 이 비밀을 말하면 죽여버리겠다는 임금님 때문에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해 병이 났다고 하지 않는가? 나도 복두장이처럼 병이 날 것만 같았다. (중략) 내 친구 위득이는 개로 인하여 좋은 승용차를 얻었고 나는 개로 인하여 복두장이 병을 얻었다. 내일은 개고기 집에 가서 소주 배불리 먹고 모두 잊을 생각이다. (55-56p)
위득이가 “너만 알고 있”으라고 하며 한 비밀 이야기는 인용한 부분의 앞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위득이가 서울에서 출세한(?) 이야기인 그 이야기는 귀로 듣거나 글로 읽게 된다면 누구라도 배꼽을 잡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인용한 글에서 저자는 “복두장이 병을 얻었다.”라고 했지만 실은 이미 다 까발린 것이다. 갈대밭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고 외친 복두장이처럼.
30여 편의 산문을 통해 알 수 있는 독자는 저자의 이력, 곧 어린 시절, 중고등학생 시절, 교대생 시절, 초등교사 시절, 고교교사 시절, 정년퇴임 후의 이력을 알 수 있다. 요약하면 입이 짧았던, 그리고 바른생활 어린이였던 어린 시절, 중학교 때 공부를 잘했으나 가정형편으로 인해 변방의 종합고등학교에 진학하여 학업에 흥미를 붙이지 못했던 이야기, 그리고 역시 원치 않았던 변방의 교대로 진학하여 유급하고 간신히 졸업한 이야기, 벽지 아닌 벽지에서 초등교사를 시작하여 의무연한 5년을 끝으로 그만둔 이야기, 다시 공부하여 고교교사가 된 이야기, 은퇴 후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사람들(저자는 그들을 강호 뻐꾸기라고 표현한다)과 어울리는 이야기 등.
그리고 시인이 된 이야기, 첫사랑(그때는 사랑인 줄 몰랐거나 수줍은 성격 탓으로 사랑을 고백하지 못했던)과의 추억과 해후에 관한 이야기, 아내와의 만남과 결혼 생활 이야기 등, 이런 이야기들이 평범한 듯하면서도 은근히 읽는 재미가 있었다. 내용도 그렇지만 그 내용을 전하는 저자의 말투,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백한 말투 속에 은근히 담고 있는 해학과 풍자가 읽는 재미를 더해주는 글이 많았다.
이 책 「대장장이 성자」에 실린 산문 대부분은 시간이 좀 지난 옛날의 이야기이지만, 그렇지 않은 산문도 있다. 저자가 생활 터전인 변방 지역 사람들의 정치 성향에 대해 풍자하고 있는 <아무도 할배를 말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은 과거의 이야기이면서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이야기이다. <아무도 할배를 말릴 수 없다>에서 저자는 우리의 아픈 현대사의 시공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야기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미선이 효순이 추모제에서 추모시를 낭송한 이야기,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 분향소에서 추모시를 낭송한 이야기, 세월호 참사 1주기 추모제에 참석해서 추모시(271-273P)에 시가 인용되어 있다)를 낭송한 이야기,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시(275-277에 수록되어 있음)를 낭독한 이야기 등. .
맨 마지막에 실린, 아동문학가 권정생 씨를 추모하며 쓴 <부치지 못한 편지>는 가슴 아프면서도 뭉클한 이야기였다.
‘어느 변방 시인의 기억 창고’라는 부제를 보고, 가졌던 선입견과 의문은 책을 읽고 난 지금 말끔히 해소되었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이전에 간행했던 산문집 「그르이 우에니껴?」를 펴낸 후에 재미 있고 의미 있다는 몇몇 독자들의 응원에 힘입어 그때 못다한 이야기를 이어서 썼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 책을 다 읽고 난 나 또한 이 작가에게 혹 아직도 못다한 이야기가 있다면 더 이어서 책을 펴내주기를 응원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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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