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의 우리말 칼럼

우달이
- 공개여부
- 작성일
- 2009.10.17
수년 전 영화 <선생 김봉두>의 강원도 사투리와 <황산벌>의 기호지방 사투리가 넉넉한 웃음을 안겨 준 적이 있습니다. TV <개그콘서트>의 ‘생활사투리’ 코너도 많은 사람의 배꼽을 빼놓았지요. 요즘도 사투리 열풍이 방송과 영화를 휩쓸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예전에는 방송에서 뚜렷한 이유 없이 사투리를 쓰면 난리가 났지요. 방송이 우리말을 훼손하는 ‘원흉’이라면서 말입니다.
신문도 그랬습니다. 특히 기사문에서는 철저히 표준어만을 사용하도록 했지요.
하지만 요즘은 그런 인식들이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사투리도 건강한 우리말로 받아들이려는 분위기가 커지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정말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투리를 표준어에 대립되는 말로 삼아 무조건 배격하는 것은 우리말의 건강한 성장을 가로막는 ‘우매한 짓’입니다.
말은 태어나 자라고 사멸하는 생명체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사투리가 내일에는 표준어가 될 수 있습니다. 사투리는 표준어의 자양분인 셈이지요.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골뱅이’는 표준어가 아니었습니다. ‘달팽이’ ‘고둥’ ‘우렁이’의 사투리로 다뤄졌지요.
이 때문에 저는 계간지 <말과글> 등에 숱하게 기고를 했습니다. ‘골뱅이’는 표준어가 돼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 정성을 알았는지,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이 ‘골뱅이’를 떳떳한 표준어로 올려놓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어찌나 기뻤는지, 당시 국립국어원에 전화를 걸어 고맙다는 인사까지 한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골뱅이’ 같은 말이 많습니다. 하나 예를 들어보죠.
“너 끝까지 개길래” “너, 자꾸 개기지 마”의 ‘개기다’도 그런 말입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사전들은 죄다 이 말을 ‘개개다’의 잘못이라고만 밝히고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아니, 세상에 ‘개개다’를 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40년 넘게 우리말을 듣고, 40년 가까이 우리말을 읽었지만, 아직 그런 말을 하거나 쓰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얘기하는 ‘개기다’는 “순종하지 않고 박박 대들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반면 사전들은 ‘개개다’를 “성가시게 달라붙어 손해를 끼치다”로 뜻풀이해 놓고 있습니다. 언중이 쓰는 ‘개기다’와는 분명 의미가 다릅니다.
따라서 ‘개기다’도 하루빨리 표준어로 대접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사전들이 사투리나 비표준어로 다루고 있는 말이라도, 그것을 무조건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투리를 쓸 때는 그것이 사투리라는 사실은 알고, 글맛에 맞춰 써야 합니다. 사투리를 표준어로 알고 쓰면 곤란하다는 얘기죠.
지금 사투리나 비표준어로 다뤄지고 있는 말을 쓰지 않으면, 결국 우리말은 오늘의 의미대로 화석처럼 굳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말의 가짓수가 줄어들고, 먼 훗날에는 남의 나라 말을 빌려야만 겨우 뜻을 전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말글을 죽이는 일입니다.
얘기가 조금 딱딱해졌지요? 이제부터 재미난 얘기 하나 해 줄게요.
요즘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멀쩡한 표준어에 사투리의 고깔을 씌우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아무 때고 쓰이는 ‘거시기’도 그중 하나죠.
한번은 어느 방송에서 한 출연자가 ‘거시기’라는 말을 쓰니까, 다른 출연자가 “방송에서 왜 고향 사투리를 쓰느냐”고 면박을 주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거시기’라는 말을 쓴 출연자가 ‘미안하다’고 하는 거예요. 세상에 이런 코미디가 어디 있습니까?
‘거시기’는 절대 사투리가 아닙니다.
“이름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 곤란한 사람 또는 사물을 가리키는 대명사” “하려는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가 거북할 때 쓰는 군소리”가 바로 ‘거시기’입니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모든 사전에 표준어로 올라 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죠.
“아따, 시방 몇 시여”의 ‘시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투리가 아니라는 얘기죠. ‘시방(時方)’은 ‘지금(只今)’과 같은 의미의 한자말이자 바른말입니다.
또 “내사마, 식겁했다 아입니꺼”의 ‘식겁(食怯)’도 예전부터 국어사전에 “뜻밖에 놀라 겁을 먹다”는 뜻으로 올라 있던 표준어입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조지다’라는 말 있죠? “하도 조지기에 얼른 자리를 피했다”거나 “친구 놈 때문에 신세를 조졌다”의 ‘조지다’ 말입니다. 이 말 역시 표준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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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