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진행하는 글쓰기 강의를 수강하는 한 후배가 ‘지구 상’의 띄어쓰기를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저는 처음엔 “당연히 붙여 쓴다”고 얘기하려다 ‘혹시?’ 하는 생각에 국립국어원 누리집의 <표준국어대사전>을 뒤져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뒤통수를 된통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또 하나의 개악이 이뤄진 것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근 10년 전에 30만 원도 넘게 주고 산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상2(上)’의 뜻풀이 ③에 “물체의 위나 위쪽을 이르는 말”이라며 사용례로 ‘지구 상의 생물’ ‘지갑을 도로 상에서 주웠다’ 등을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26(上)’을 보면 “‘구체적인 또는 추상적인 공간에서의 한 위치’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라며 ‘인터넷상’ ‘전설상’ ‘통신상’ 등을 붙여 쓰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풀이에 따르면 지구도 구체적 공간이므로 ‘지구상’을 붙여 쓸 수 있었습니다.

‘상2’와 ‘상26’은 서로 상충하는 면이 있지만, ‘지구상’으로 붙여 쓸 수도 있는 만큼, 그동안 누가 이에 대해 물어오면 위의 설명을 해주면서 “헷갈리지 말고 그냥 붙여 쓰라”고 일러 왔습니다.

그런데요. 지금 국립국어원 누리집의 <표준국어대사전>은  ‘상2(上)’의 뜻풀이 ③에 “물체의 위나 위쪽을 이르는 말”이라는 설명은 그대로 둔 채 사용례에서 ‘지구 상의 생물’은 남겨 두고 ‘지갑을 도로 상에서 주웠다’는 없앴습니다.

또 ‘상26(上)’의 뜻풀이에서는 “‘구체적인 또는 추상적인 공간에서의 한 위치’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를 “추상적인 공간에서의 한 위치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로 고쳤습니다. ‘구체적’을 빼버림으로써 ‘지구 상’으로 띄어 쓰는 것에 힘을 실어 준 것이죠.

알고 보니 지난해 8월에 이렇게 바뀌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개악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우선 지구를 추상적 공간이 아닌 구체적 물체로만 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습니다. ‘지구’는 물체인 동시에 ‘인류의 생활 터전’이라는 추상적 의미도 지닌 말입니다. ‘지구상의 인류는 그동안 끊임없이 자연에 도전하면서…’ 따위 표현에서 ‘지구상의 인류’를 ‘지구 위의 인류’로 바꾸기에는 말맛이 영 살아나지 앉습니다.

또 ‘지구 상’이라면 ‘지구 위’인데, ‘지구 상의 생물’은 지중생물이나 수생생물도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즉 ‘지구 위’뿐 아니라 ‘지구 속’ 생물도 가리키는 것이죠. ‘상(上)의 의미가 거의 없습니다.

반면 ‘도로 상에서 지갑을 주웠다’는 ‘도로 위에서 지갑을 주웠다’로 바꿔도 아주 편합니다. 그런데도 ‘도로 상’은 없애 버리고, ‘지구 상’만 살려 놓은 사용례는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원래 이 부분은 ‘상2’의 사용례에서 ‘지구 상’만 없앴으면 띄어쓰기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국립국어원이 엉뚱하게 고쳐 놓는 바람에 사람들만 더욱 헷갈리게 됐습니다.

하지만 어찌하겠습니까. <표준국어대사전>에 그렇게 올라 있으니, 한국어능력시험 등에서는 ‘지구 상’을 띄어 써야 합니다. 또 ‘상2’에 “물체의 위나 위쪽을 이르는 말”이라는 뜻풀이가 살아 있으므로, ‘도로 상에서 지갑을 주웠다’의 ‘도로 상’ 역시 띄어 써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상(上)’, 즉 “‘그것과 관계된 입장’ 또는 ‘그것에 따름’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관계상 / 미관상 / 사실상 / 외관상 / 절차상) 또는 “‘추상적인 공간에서의 한 위치’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인터넷상 / 전설상 / 통신상)로 쓰인 상은 붙여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