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vies Review

비틀즈
- 작성일
- 2019.4.30
포화속의 우정
- 감독
- 필립 카델바흐
- 제작 / 장르
- 독일
- 개봉일
- 2014년 2월 27일
뒤죽박죽인 컴퓨터 파일들을 싹 정리해야겠다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던 차에, 예전에 작성해 둔 한 문서를 찾을 일이 생겨 버렸다. 문서를 찾고 나서 문득 그 파일과 함께 있던 예전에 작성해둔 몇 개의 글을 함께 찾았다. 책 사이에 넣어둔 비상금을 잊고 있다가 우연히 찾은 것 마냥 반가운 마음에 기쁘다가도, 막상 과거의 글들을 다시 읽어보니 나의 20대 특유의 애늙은이 마냥 겉멋이 든 문체 때문에 손발이 오그라들 것만 같다. 몇 년 후에는 지금 글들도 아마 그런 느낌이겠지? 앞으로는 최대한 힘을 빼고 글을 쓰는 연습을 해야겠다 싶다.
찾은 글들 중에 2013년도에 보았던 독일 미니시리즈 드라마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Unsere Mutter, Unsere Vater)>에 대한 리뷰가 있었다. 미니시리즈라지만 편 당 90분의, 총 3편으로 이루어진 아주 괜찮은 수작으로 기억한다. 우리나라에는 이것을 편집한 <포화속의 우정>이라는 영화로 이듬해 2014년 상영했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는 원 제목이 훨씬 더 여운이 있는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하지만 무튼, 그 때의 감동을 잠시나마 추억하는 차원에서 그 리뷰글을 포스팅해볼까 한다. 앞서 말했듯 당시 애늙은이의 겉멋든 표현임을 감안하고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인간이 싸움을 하지 않는 평화로운 동물이라면 그 역시 가장 큰 재앙이다. 모든 것이 한정되있는 지구에서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체수 조절이 필수적이다. 분노, 질투, 갈등은 어쩌면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큰 축복이다. 전쟁은 과거부터 이러한 필수적인 과정을 통해 먹이사슬의 머리인 인간을 조절해 왔다.
- 토마스 홉스, <군주론>
무엇을,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드라마 속 다섯 명의 주인공들. 그리고 전쟁
3부작 드라마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는 아주 어릴 적(어렴풋하게만 기억할 뿐이지만) 부모님과 함께 눈물 흘리며 봤었던 한국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떠올리게 한다. 극 중 최재성 씨와 채시라 씨, 박상원 씨가 그랬던 것처럼, 이 독일 드라마는 2차세계대전이라는 격렬한 전쟁의 시기 안에서, 5명의 친구와 형제가 어떻게 살아가게 되었는지(혹은 어떻게 살아가도록 만들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전쟁이라는 참혹한 상황에 대비되어 더욱 부각되는 뜨거운 휴머니즘을 다루는 수작이기도 하고, 뜨거운 여름의 더위를 '몰입된 긴장감'으로 떨칠 수도 있는 재미있는 전쟁 드라마이기도 하다.
1941년 7월 10일, 독일의 모스크바 진공을 앞두고 5명의 주인공들은 베를린 시내의 주점에서 그들만의 파티를 연다. 극에 대한 서술을 이끌어 나가는 빌헬름 빈터(극 마지막에 생몰 연도가 나타나는데, 그가 가장 오래 살았기에 드라마에서도 서술을 맡은 듯하다)와 그의 동생 프리드헬름. 그리고 빌헬름을 사랑하는 종군 간호사 지망생 샤를로테, 유대인 재단사 빅토르, 그리고 빅토르의 연인이자 가수가 꿈인 그래타. 이들은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도 여전히 밝고 즐겁다. 아마 당시의 그들은 전쟁을 장미빛 미래로 향하는 필연적인 과정으로 여겼던 것 같다. 물론 전쟁을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도 존재한다. 프리드헬름은 전쟁을 기피하기도 하고, 참여하기를 반기지 않는다. 전쟁에 대한 당위성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유대인인 빅토르도 사회적 분위기가 달갑지 않다. 점점 유대인에 대한 배척 분위기가 강화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던 것.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친구'라는 인간적인 관계가 그들을 뭉치게 한다. 그리고 사회를 지배하던 시대적 분위기가 그들을 자연스레 몰아간다. 이제 드라마가 의도하는 것처럼 이제 그 5명의 시선들을 따라, 전쟁이 그들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빌헬름과 프리드헬름 형제 : 전쟁은 인간의 내면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촉망받는 군 장교. 승리밖에 모를 것 같은 당당함이 풍기는 형 빌헬름. 반면 전쟁에 대해 소극적이기만 한 동생 프리드헬름. 둘은 과연 형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전쟁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 동생 프리드헬름은 “전쟁은 인간의 악한 본성만 이끌어 낼 뿐이다.”라며 절규하며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계속해서 거부하지만, 빌 헬름은 부하들이 동생을 폭행하는 것을 방관하면서까지 강하게 동생을 전장의 현실로 몰아붙인다. 하지만 정작 1941년 여름에는 홍수를, 겨울에는 폭설을 겪으며 생각처럼 전세가 흘러가지 않음을 감지하고 서서히 생각의 변화과정을 겪는다. 승리라는 목표에 도취되어 전쟁의 잔혹성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승리라는 달콤함이 사라지자 전쟁의 폐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점점 그는 지쳐간다. 최전방에서 비로소 느끼게 된 것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 있어서 나치즘이니, 패배주의든 그런 이념들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총통이 겨울 내로 전쟁은 끝날거래요.” 라고 말하는 소년병 신참의 말에 “그래? 어느 겨울인지는 말해주던가?” 하고 되받아치는 모습을 보면, 전쟁에 염증을 느껴가는 그의 내적 갈등을 엿볼 수 있다. 후에 모스크바 근처에서 총 공격을 앞두고 ‘질 것을 아는 전장에 부하들을 내몰아야 하는가?‘하는 생각으로 완전한 내적갈등에 빠진 모습을 보여주는데, 마침내 그 전투에서 부하들의 대부분을 눈 앞에서 잃고 본인조차 전장에서 이탈해버리게 된다. ‘전쟁 초기엔 조국을 위해 싸운다. 의심을 하기 시작했을 땐 동지를 위해 싸운다. 하지만 주변에 동료가 남아있지 않다면?‘이라는 그의 독백이 인상적이다. 마침내 그는 전쟁의 참혹성 앞에서 남는 것은 없다는 것을, 그 허무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부서진 탱크의 공간. 그 작은 공간 안에서 조차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 부서진 탱크는 전쟁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안에는 죽은 사람과 앞으로 죽을 사람만이 존재할 뿐이다.
전쟁으로 인해서 변하게 된 것은 형 빌 헬름만이 아니다. 처음에는 전쟁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견지해오던 동생 프리드헬름.그러나 “전쟁은 인간을 가축처럼 만든다.”며 박애주의를 보이던 그 역시 전쟁이 진행될수록 자의와 상관없이 전쟁의 당사자가 되어간다. 그것은 인간성이 상실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닌 그라드 전투에서 강력한 저항을 겪은 이후 소련군과의 긴 대치에 들어간 독일군. 그 전장의 순간에 프리드헬름은 선임과 함께 망을 보고 있었다. 전쟁 자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프리드헬름은 선임의 지시를 무시하고 담배를 피운다. 그 순간 그것이 정말 원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소련군의 폭격으로 독일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 그 것이 그를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헝클어진 머리칼 만큼이나 그의 이성은 점점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만큼 더 잔혹해진다. 그 와중에 처음부터 함께 했던 동료들은 하나 둘 죽어나가고, 해가 지날수록 충원되는 병력의 연령은 낮아진다. 신참의 어떻게 전투에서 이겨왔냐는 질문에 그는 대답한다. “전쟁 속에서 군인은 그저 인간이고자 하는 유혹에 저항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저 옆사람이 맞길 기다리는 거지. 군인이란 겁쟁이였다가 가끔씩만 용감해지면 되는거야.” 라고. 쿠르스크 전투 3일 전의 프리드헬름은 전쟁에서 자신의 역할 이상을 해낼 뿐만 아니라, 전쟁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존재로 바뀌어져 있다. 그런 그를 보며 동료들은 “네 형이 녀석을 군인으로 만든거야.” 라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를 하나의 전쟁 기계로 만들어버린 것은 그의 형이 아니라, 생과 사의 문제를 너무나도 가볍게 치부하는, 하지만 순간의 선택이 결국 목숨으로 직결되는 전쟁의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도 모르지만 결국 그는 그렇게 본연의 인간성을 잃어간다. 그 뒤 모스크바 총공격 전 전투에서 형이 포격에 죽는 모습을 목격하고(실제로는 죽지 않았지만),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다. 죽음을 각오한 돌격 끝에 적군의 지지선을 돌파하고 건물을 장악했지만 결국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장면 역시 제작자의 의도가 담긴 장면이라고 생각하는데,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바쳐 목표를 향해 돌격하고 그 목표점을 지키기 위해서 상대방 역시 목숨을 걸며 싸우지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목숨들은 희생되지만, 정작 그 목표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건물이라는 것. 알 수 없는 목표를 위해 목숨을 바치게 하는 것,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에 고귀한 인간을 도구처럼 희생시키는 전쟁의 속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그 후에 소련군의 포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그는 소련군복으로 위장하게 되는데, 그렇게 돌아오는 프리드헬름을 아군인 독일군이 쏴버린다. 다행히 찰리(샤를로테)의 정성 어린 간호와 천운으로 생명은 부지한 채 베를린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이 장면에서도 과연 전쟁 속에서 누가 아군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씬이다.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 아군인가? 자신을 죽이는 것도 아군인가? 결국 전쟁 하에서는 아군도 적군도 없다. 전쟁은 오직 피해자만을 만들 뿐이다. 프리드헬름을 쏘면서 독일 군인들은 어디에 맞았는지 내기를 하고 있었다. 비록 적으로 판단했을지언정, 인간이 아닌 가축이나 사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다. 전쟁은 인간을 하나의 소모품처럼 만들어버린다.
그 뒤 형 빌 헬름은 외딴 농가에 숨어있다가 독일군에 발각되어 전과자들로 구성된 이른바 쓰레기 청소부대로 강제 차출당한다. 이미 이 때는 독일의 패색은 짙지만, 전쟁의 흐름과 상관없이 그들은 하나의 도구 취급을 받는다. 동생 프리드헬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살아서 베를린으로 돌아왔건만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그를 반기지 않는다. 전쟁의 비참함을 알면서도 그는 스스로 영웅이라 생각치 않는다. 그에게는 살상의 감각만이 남아있다. 결국 자진해서 다시 부대에 지원한다. 그가 소속된 곳은 아인자츠그루펜(이동 살상 부대). 결국 자의든 타의든 그들은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현장으로 다시 투입된다.
샤를로테, 크레타, 빅토르 : 전쟁 안에서의 개인의 삶은 철저히 무시된다
처음에는 그저 사람을 살리는 일에 대한 보람을 가졌던 샤를로테.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빌 헬름의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것과, 그녀의 인간을 위한 생각들은 마냥 밝기만 하다. 하지만 전쟁의 현실은 그녀의 꿈과는 전혀 다르다. “독일인 군인을 위해 봉사하겠습니다” 라는 샤를로테의 순수한 말을 그녀의 여자동료는 성적인 말로 받아들였 듯, 전쟁은 어떤 행위가 선의에서 시작되건 악의에서 시작된 일이건 상관없이 부정적인 결과로 받아들여지게 하는 잔혹함이 있다. 그녀 역시 전쟁의 피폐함에 점점 가치관이 변해간다. 유대인 간호사 릴리아를 보면서 인간적으로는 미워할 이유가 없다는 내면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결국 당시 사회의 대의에 따라 고발하게 되었고, 그 후 유대인을 죽이는 군인을 만나면서 계속해서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현실이 너무나도 그녀의 바람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의 꿈은 좌절된다. 이제 그녀를 버티게 하는 것은 빌 헬름과의 사랑뿐이다. 하지만 전선에서 만난 파티의 자리에서, 빌은 찰리(샤를로테)의 마음을 모른 척 한다. “난 찰리가 희망을 품게하고 싶지 않아” 라는 말을 남기며. 물론 안전과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삶이었기에 취한 태도였겠지만, 어찌되었건 전쟁의 참혹성은 개인으로 하여금 사랑의 자유마저 앗아간 셈이다. 그 뒤 프리드로부터 빌의 죽음을 전해받게 된 샤를로테. 그녀의 울음소리 뒤로 환자들의 고통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육체적 상처가 있는 사람만이 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다치고, 인생의 희망을 잃어버린 그녀 역시 부상병과 마찬가지로 이미 전쟁의 환자이자 피해자다. 마침내 그녀는 현실에 포기하듯 자신을 던진다. 의사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거치는 것은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긴 했지만, 어쩌면 그러한 행동조차 전쟁에서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 그녀의 마지막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전쟁에 의해서 꿈과 사랑이 짖밟히는 상황은 빅토르와 그레타에게서 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아무런 잘못없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죽음의 위기에 처한 빅토르를 탈출시키기 위해, 그레타는 게슈타포 장교를 유혹한다. 하지만 전쟁을 근거로 만들어진 사회적 계급, 그리고 그 상위계급의 지배층은 그러한 생존을 위한 개인의 노력마저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그녀의 노력과 달리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빅토르는 유대인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에 실리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한 여성(이 여성도 군인으로 쓸 수 있는 남성이 아니면 출산하지 못한다는 말로 잉태했던 딸을 강제 유산당한 아픔이 있다)과 함께 기차에서 탈출하지만 곧이어 폴란드 레지스탕스에 편입되어 활동하게 되었고, 심지어 이 곳에서 조차 유대인이라는 사실로 인간적인 존중을 받지 못한다. 독일인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적과 아군만이 존재할 뿐이었고, 불행하게도 유대인은 대부분 적에 속했다. “전쟁은 이미 패했어요. 남은 건 선택이죠. 죽거나 거짓말하거나” 라 말하는 빅토르에게서 외로움이 느껴진다. 어느 사회에서도 그는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한편 가수로서의 꿈이 이루어지는가 싶던 그레타 역시 전방에서 전쟁의 참혹성에 대해 직접 경험하면서 많은 변화를 거치게 된다. 샤를로테의 외침에 의해 보석이 든 짐을 내려놓고 환자의 들 것을 잡는 장면. 순간 그녀의 눈과 가슴에 들어온 전쟁의 참혹함은 그녀가 짊어지기에 너무나도 힘든 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전황의 악화는 전쟁의 참혹성을 더욱 증대시켰다. 결국 그레타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장교로부터 버림받는다. 동시에 강제로 유산을 당하고 수용소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다.
이들의 삶에서 개인의 삶과 꿈, 그리고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와 감정, 권리는 철저하게 무시된다. 민족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참여했던 전쟁에서 그들의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전쟁’을 위해 희생되어진다. 인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전쟁이, 어느 순간 전쟁을 위한 인간으로 뒤바뀌게 된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은 전투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전쟁은 기다림이다. 다음 전투를 위한, 다음 식사를 위한, 다음 아침을 위한”이라는 빌 헬름의 말을 통해, 그 시대의 삶과 그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 전쟁을 위한 과정과 도구로서 변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진정한 승자를 찾아서
결국 전쟁의 승자는 누구인가?
현실주의 혹은 신현실주의로 대표되는 오늘 날의 국제관계. 안타깝게도 전쟁은 영화나 드라마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우리의 현실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들이 감당해야했던, 그리고 실제로 그 시대 사람들이 감당해야만 했던 전쟁의 참혹성은 그러한 현실주의적 이론만으로 설명되기에는 너무나도 참혹한 면이 많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전쟁의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피해자만 있을 뿐이다.
혹자는 말한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이라고. 그것은 전쟁이 정치에 있어서 일정부분 유용한 기능을 제공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 기능이란 바로 내부의 단결 및 정권의 연장이다. 일종의 내부 갈등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전쟁은 기본적으로 아군과 적군이라는 편가르기를 전제로 한다. 외부의 공통의 적을 만든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기능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명분은 만들어내기 나름이다. 결국은 살육을 위한 살육, 폭력을 위한 폭력이 되는 것이다. ‘편 가르기’라는 전제는 더 많은 부작용을 초래한다. 편 가르기는 마찰을 가진다. 필연적으로 우열을 가리려는 속성이 있다. 전쟁의 승패를 가리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생명은 하나의 도구가 된다. 도구화 된 인간은 철저하게 개인의 삶의 가치를 무시당하게 된다. 상대를 죽여야만 내가 이기는 룰 안에서 생명에 대한 멸시는 그 직간접적인 당사자들을 피폐하게 만든다.빌헬름에게서 삶과 죽음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한 것도. 샤를로테의 꿈과 사랑을 모두 앗아가 그녀의 인생을 한 때 포기하게 만들었던 것도. 동생 프리드헬름을 점점 살육기계로서 잔혹하게 만들어간 것도. 빅토르에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세상 모두의 공적인 양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하며 사랑도 잃고 세상에 대한 환멸만을 가지게 했던 것도. 사랑을 지키면서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레타에게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유산을 강제하고 전쟁의 희생양으로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한 것도 모두 단 한 가지다. 바로 전쟁. 그 전쟁의 참혹성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전쟁은 이기고 지느냐의 승패를 살고 죽고의 생존의 문제로 바로 귀결시킨다. 그래서 전쟁 하에서의 인간들은 본연의 인간성을 상실한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긴장감과 위협은 모든 환경과 상황을 대립의 대상으로 치부하게 한다. 이분법적인 사고. 나와 적으로 나뉘는 순간 더 이상 타협은 없다. 다만 전투에서 살아남는다고 해서 그것이 승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는 존재하되, 승자는 없고 패자만 존재하는 룰. 그것이 전쟁이다. 전쟁 초기 소련군을 사살하고 시체를 무더기로 버린 늪을 기억하는가? 어느 순간 그 늪에 빠진 빌 헬름. 주변에는 벌레가 가득하다. 시체가 있던 곳이니 벌레가 꼬인 것이리라. 그 벌레는 징그럽게도 살아있는 독일군에게 달라 붙는다. 전쟁의 잔혹성은 마치 그 벌레와도 같다. 전쟁의 피폐함은 죽은 패자에게도 적용되지만, 결국은 살아있는 자들도 피폐하게 만든다. 다시 말하지만 전쟁에서 승자는 없다. 오직 피해자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전쟁’이 아닌 ‘상생’
극 속에서 주인공들이 행복해하던 순간을 떠올리면 언제일까? 대표적으로 그들이 함께 모여 처음 사진을 찍던 순간. 그 외에도 형제가 전장에서 함께 손을 잡고 누워 이야기하던 순간. 야전병원에서 샤를로테와 빈터 형제, 그레타가 모여 짧은 파티를 벌이던 순간. 러시아계 간호사를 가르치며 대화를 나누던 샤를로테 등등. 그렇게 행복의 순간은 항상 혼자가 아닌 ‘함께’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결국 승자와 패자가 없이 참가자 모두가 패자가 되는 룰이 전쟁이라고 한다면, 모두가 패자가 아닌 승자가 될 수 있는 ‘상생’이야말로 인간을 위한 바른 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정치의 가장 큰 기능은, 사회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조정하고 함께 상생할 수 있는 바른 길을 도모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아닐까 싶다.
참고자료
- 케네스윌츠(2007.10.20), “인간 국가 전쟁”, 아카넷
- 히로세다카시(2011),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가”, 프로메테우스 출판
- 로만 폴란스키(2003.01.03), 영화 “피아니스트”
- 미국드라마(2001.09.09~11.04), 드라마“밴드 오브브라더스”, 미국 H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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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글이라 표현방법이 투박합니다.
그래도 원작은 참 좋습니다.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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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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