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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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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수 없는 일이야
글쓴이
싱클레어 루이스 저
현대지성
평균
별점9.3 (17)
김진철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허나 세계사의 모든 재앙은 선량한 시민들이 방심하는 새 벌어지고야 말았습니다. 1258년의 바그다드 대학살, 1527년의 Sack of Rome 같은 참사 역시 당대인들은 아무도 그 가능성을 점치지 않던 벼락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저때로부터 다시 수백 년 전 훈 족의 유럽 침공 역시 그들(서유럽인들)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재난이었겠는데요. 당시 성직자들은 "하늘이 내린 형벌"이라며 당대인들의 참회를 유도했다고도 합니다. 넉넉히 세속화한 현대에 들어서는 성직자들의 저런 소명은 재능 뛰어난 문필가나 예술가들의 몫이 되었으며 그 유력한 "증거" 하나가 바로 이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쓰여진 시기는 1935년입니다. 이때면 FDR이 당선되고 뉴딜 등을 의욕 가득히 밀어붙일 시점이죠. FDR은 나중에 4선에까지 성공합니다만 이때는 아직 다음 재선에 성공할지조차 마냥 낙관은 못 할 무렵이었습니다. 많은 사회학 서적에도 나오듯 공화당 지지층과 초상류 계급은 FDR 공포증에 떨며 사석에서 대화를 나눌 때 "그 사람"이라고만 지칭했다고도 하죠. 이때 공화당 진영에서 내세운 게 "독재는 곤란하다"였는데, 다수 국민의 일시적 지지를 바탕으로 법치와 원칙이 무시된 채 포퓰리즘 정책이 마구 추진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민주당 진영에서는 상대당의 반격에 대해 "공포 신드롬"이 일지 않았을까요? 그들 입장에서는 FDR의 피치 못할 경기 부양 정책 드라이브에조차 신경증적으로 반응하며 좌절시키려 드는 공화당, 보수 측의 움직임에 마찬가지의 두려움을 충분히 느꼈을 겁니다.

정파들은 여론의 지지가 상대 진영에 쏠린다 싶으면 서로 "포퓰리즘"이라며 비난의 날을 세웁니다. 내 편이 우세하면 국민의 엄중한 뜻을 업은 것이며, 상대가 우세하면 대중 선동, 포퓰리즘이라며 저속한 여론몰이에 기댄 비겁함을 마구 비난합니다. 우리는 저 시기 역사의 승자가 FDR의 민주당이었음을 잘 알고 있기에, 승자 측(즉 민주당 지지자나 리버럴)의 공포감이나 신경증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버트 랭커스터 주연의 <엘머 갠트리> 원작자라든가, 예전 세계문학 전집에 반드시 포함되던 <메인 스트리트>의 저자로 우리가 잘 아는 싱클레어 루이스가 이 재미난 풍자 문학의 author인데요. 과연 재기발랄한 그 답게 가상의 정치상황을 들어 미국 정치 시스템의 모순과 단점을 신랄하게 풍자합니다.

1935년이면 아직 나치가 유럽에서 그 위험성을 심각하게 드러내기 전입니다. 라인란트 재무장, 안슐루스(오스트리아 병합), 심지어 베를린 올림픽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많은 이들이 잊고 있지만 히틀러 치하의 독일은 아직 빵 하나에 몇 억 마르크를 호가하던 무서운 인플레이션이 유발한 경제 난국에서 아직 회복이 안 되었을 시절입니다. 사실, 회복될 조짐이 끝까지 안 보이자 히틀러가 무리한 도발을 일으키기도 한 건데요. 경제적으로 비실거리는 독일이 그런 무리수를 둘 줄은 당시 (반대 진영의) 책임 있는 정치인들이 미처 몰랐다고 해야겠습니다. 싱클레어 루이스 같은 문인들이 마치 탄광의 카나리아처럼 위험의 예조를 알고 이런 문학 작품을 창작해 낸 셈입니다.

전쟁이 발발한 후면 상대 진영의 주요 인사나 지도자에 대해 사정없는 폄하와 모욕이 가해지지만 이때만 해도 그 호칭이 조심스럽습니다. 이를테면 나치 독일 선전상 괴벨스에 대해 여전히 "박사"라는 경칭을 작품 중에서도 꼬박꼬박 달고 있으니 말입니다. 허나 싱클레어 루이스는 자국 내에 불고 있는 심상찮은 "우익 독재의 역풍" 조짐에 적잖이 노심초사했던 듯합니다. "만약 우리 미국에서도 애국주의, 보수주의를 내세워 히틀러 같은 극우 독재자가 부상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때는 바야흐로 영화, 라디오 등 대중에 동시에 접근할 수 있는 매체가 발달해 갈 무렵인데, 이 작품 중에도 등장하는 윈드립 대통령(물론 가상 인물입니다)은 대중의 감성 격동에 필요한 모든 자질을 다 갖춘, 참으로 위험한 정치인입니다. 그는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감정" 속으로 들어가 마음껏 파묻힐 수 있고, 그 감정을 적절한 제스처 속에 담아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아돌프 히틀러가 수천만 독일 민중을 홀리고 사로잡은 비결이 아니었겠습니까?

(이 소설 속에서) 루스벨트는 재선에 실패하지만 여전히 여유 있고 인지한 미소를 머금으며 평정심을 잃지 않는데 이런 모습이야말로 당대 미국인들에게 다가온 그의 평균적 이미지였습니다. 의도적으로 작출된 이미지라기보단 그의 본모습에 가까웠다고 봐야 타당하겠는데요. 무솔리니나 히틀러, 혹은 지금의 트럼프 처럼 의도된, 연출된 분노를 가득 담은 표정과는 정말 대조되죠. 역사에 진짜 승자로 남은 지도자들은 이처럼 그 인간적 본모습을 들여다봐도 품격과 여유가 넘치는 사람들입니다.

"반동분자"라고 하면 보통 집권에 성공한 공산 정부가 반대파를 색출, 검거, 숙청할 때 씌워붙이는 오명입니다. 헌데 이 작품 중에서는 우습게도 윈드립 정부(당연히 우파)가 반대파를 지목하고 탄압할 때 즐겨 부르는 누명으로 자주 쓰입니다. 소련에서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하자 이에 대항수라도 놓듯 이탈리아에서 불과 몇 년 후에 극우파 독재가 시작되었는데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한 건 그로부터 한참의 세월이 지나서였습니다. 전체주의 정권의 불건전한 속성이란 좌우를 막론하고 공통되는 점이 많다는 걸 그는 날카롭게 비꼬는 셈입니다.

출판, 인쇄의 자유도 탄압 받습니다. 도리머스 사장이 들고 온 비분강개한 내용 가득한 원고를 보고서 식자(공)실장 댄 윌거스는 강력히 항의합니다. "전 이녹 아든이 아니에요!(사장님에 대해 마냥 충성스러울 수 없다는 뜻을 서투른 은유로 표현한 말)" 미니트맨에게 끌려가서 총살 당하기 싫다는 건데, 여기서 미니트맨은 나치 독일의 SS와 같습니다. 그뿐 아니라 정치적 반대자를 체포, 감금하는 concentration camp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재현됩니다. 사실 소수파에 대한 탄압과 마녀사냥은 미국 역사에서 그리 드물게 보던 바도 아니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아니, 근거 없는 소립니다. 무엇인가 끔찍한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야, 현실의 기정 사실화, fait accompli, 혹은 옐리네크적 의미에서 "사실의 규범력" 같은 것은 모두를 지배하는 지상 권력으로 군림합니다.

사실 FDR이 대중의 지지를 확고히 얻던 무렵에 이런 소설이 나왔다는 건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좀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이란 유럽에서 이민 온 "실향민"들이 세운 근본 없고 위태로운 공동체였으며, 혹여 유럽 본토 전역이 나치와 파시스트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면 이의 영향을 북미에서 어떤 방식으로 받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판이었습니다. 1932년 소위 보너스 아미의 시위를 군대가 무차별 진압한 것도 어쩌면 파시즘 대두의 전조가 될 수 있는 사건이었는데(적어도 진보 성향의 지식인들은 충분히 그렇게 받아들일 만했죠), 더군다나 미국에는 본디 독일 출신의 이민자가 무시못할 상당수를 점하는 인구 분포가 뚜렷했죠.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을 보면 개전 후 독일계 미국 시민이 이웃들로부터 린치에 가까운 폭행을 당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소설은 딱히 특정 인종을 편들거나 적대시하는 게 아니라 "다수에 의한 횡포"가 빚는 불의, 공포를 유머러스하게 풍자하는게 본 의도인 듯합니다.

이 소설은 1980년대에 세계적인 인기를 모았던 미니시리즈 <V>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졌죠. 막상 이 소설을 읽은 분들은 대체 외계인 다이애나가 벗겨진 가면 아래 파충류의 퍼런 피부를 드러내며 쥐 한 마리를 맛있게 먹어치우던 그 드라마와 이 정치 풍자 소설이 무슨 관계인지 궁금해할 수도 있습니다. <V>를 블루레이 디스크 등으로 다시 보시면, 서두에 다소 의아한 장면들이 펼쳐지는 걸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명백히 반 우익 풍자라는 걸 이제는 모두가 알 수 있죠. 원래 제작진은 소설의 내용에 충실하게 드라마를 만들 생각이었는데 방송사에서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로 막았다고 하죠. 제작진은 아마도 당시 배우 출신 레이건 대통령이 너스레를 떨어가며 강경 우익 드라이브를 펼치는 모습이, 반 세기 전 싱클레어 루이스가 예언한 디스토피아와 꽤 닮아간다는 느낌을 받고 이 기획을 밀었을 겁니다. 이 걸작을 2018년에 한국에 번역해 준 출판사의 의도에 대해서도 살짝 흐뭇해지는 면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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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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