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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철
- 작성일
- 2024.1.9
호모위버멘쉬
- 글쓴이
- 신호철 저
문이당
위버멘쉬는 독일어로 초인이라는 뜻입니다. 니체 이전에도 여러 철학자가 이 개념에 대해 논했으며, 독재자 히틀러가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왜곡하기도 했으나, 본디는 참된 인간(멘쉬)의 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도구로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었던 관념이기도 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이 책 앞표지에도 "순수한 인간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자문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코로나19는 몇 년 전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당황해하는 채신도 채신이지만동네 아줌마들, 그 중에는 금니를 박은 호들갑스러운 이도 한 명 포함되는데, 또 코로나가 번지는 것 아니냐면서 부산스럽게 설칩니다. 이런 분들 때문에 가뜩이나 불안정한 분위기가 더욱 나빠지는 건데 다만 주인공들은 대체로 의연합니다. 그러나 채신의 침착함에도 한계가 있어서 일단 추루 보강을 걸고 조퇴를 신청하는데 꽉 막힌 원장은 대뜸 짜증부터 냅니다. 상황이 바뀌면 원칙의 적용도 뭔가 신축적이어야 하겠는데 말입니다.
"거룩한 긍정. 세계의 상실 후 나의 (프라이빗한) 세계를 비로소 얻은 그 누군가." 니체의 말처럼 보이지만 p86에 잘 나오듯 곽경식 교수 해설서의 한 발췌입니다. 소설 속에서 갑자기 루푸스가 퍼지고 그 부작용으로 위버멘쉬와 (그냥)멘쉬 사이의 분화가 일어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느슨한 동포애나마 갖고 작동되던 사회는 이제 옛 모습대로 남은 멘쉬와, 고통을 통해 다른 존재로 거듭난 위버멘쉬 사이에 서로 타자화와 적대화가 진행됩니다. 어느 시대나 그렇지만 이처럼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면 그에 의미를 부여하는 시도가 일어나고, 곽경식의 해설서는 그 중 가장 너른 지지를 얻은 경전이라 하겠습니다.
페니실린 역시 의도치 않았던 실수에서 비롯했듯, 이 극적인 변용 역시 박 실장 등 일단의 연구진들이 모스를 잘못 다뤄 일어난 불의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니 박 실장이, 예컨대 p118 같은 곳에서 한 마리 기니피그처럼 비참한 신세로 떨어지는 것 아닌지 전전긍긍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이채신의 병세는 다행히 나아지지만(p122) 이는 이제 다른 문제 하나를 잉태할 참입니다. 뭐 세상 일이 다 이런 식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위버멘쉬니 뭐니 떠들어도 인간의 본성은 어디 가지 않습니다. 그 중에는 성욕의 변태스러운 충족도 있는데 이게 그나마 위버와 노르말(혹은 운터)을 이어주는 고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여성을 파멸시키려 드는 데에 어쩌면 이렇게도 한심한 술수가 쓰일까요? 저는 이 대목에서 폴 버호벤의 영화 <할로우맨>의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새 시대의 교주로 떠오른 곽경식은 말을 잇습니다. 니체의 말을 또다시 인용하며, 너의 자아에 혼란이 일어닌다 쳐도 그저 받아들이면 된다고 합니다. 그게 너의 자아에 대해 가장 정직하게 일깨워주는 본질이라면서 말입니다. 뭔가 알쏭달쏭하면서도 의기가 물씬 솟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래, 불안해하지 말자, 이 길을 따르다 보면 언젠가는 출구가 나오겠지. 그런데 우리는 이 과정에서 연대의 덕목을 잊으면 안 됩니다. 혹 그러면, 둘로 갈라진 세계는 이제 항쟁하다 종말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털오라기 없는 신인류에 대해 멘쉬들도 어지간히 경멸감을 발동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저는 이 소설의 알레고리가, 어느 순간 부의 도약을 이룬 한국 사회를 겨냥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부를 손에 넣고(그저 운이 좋았던 이들도 있습니다) 나머지 낙오된 전(前) 동족에 대해 더 이상 아무런 공감을 못 느끼게 된 신흥 중산층은 새로운 동류의식과 세계관을 형성하고 이제 도태와 배제의 알거리즘을 만들어나갑니다. 과연 이 항쟁은 어떻게 마무리될지.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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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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