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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철
- 작성일
- 2017.4.30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
- 글쓴이
- 가토 노리히로 저
책담
학교 다닐 때 어느 교수님께서 강의 도중 책(경제학)의 몇몇 대목을 짚으며 그러시던 게 기억 납니다. "이 설명은 잘못된 것이고, 심지어 용어 번역조차 바르지 않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기초를 가르칠 때, 다소의 왜곡을 감수하고 뭔가를 전달하는 편이 그나마 나을지, 아니면 아주 원칙대로 꼬장꼬장하게 학습자의 힘들고도 힘든 각성을 유도하는 정석을 걷게 할지는, 선택이 쉽지 않다." 만약 전자의 선택이 무조건 옳다고 믿는 쪽이라면, 어려운 내용도 무조건 쉽게(왜곡되든 말든) 풀어 주는 게 최고의 미덕으로 여길지 모르겠습니다. 어려운 것도 쉽게 설명해 줘야 할 판에, "가뜩이나 쉽고 재미있는 것"을 오히려 어렵게 꼬고 든다면, 그런 작업이 과연 환영받을 수 있을지는 물어보나마나입니다. 책 제목이 더군다나 <...는 어렵다>라면 더욱 그렇죠.
그런데 이 책은 제목과는 달리, 1) 하루키의 작품 중 알쏭달쏭했던(그런 게 뭐가 있었을까 싶어도 이 책을 읽고보니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싶더군요) 대목들에 대한 작가론적, 역사적 해석을 시도한다든가, 2) 독자들은 엄청 환영해도 동료 작가(물론 까마득한 선배들을 포함)나 평론가로부터는 "버터 바른 상업적 치장"이라며 홀대, 폄하되었던 하루키의 작품 세계를, "그들이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게끔" "심각하고 본격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내용이더군요.
어려운 걸 쉽게 풀어내는 작업이 결코 쉽지 않지만, 그저 감성적으로 상쾌해질(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감을 해 주고 지나칠) 내용에다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만만치 않게 어려울 텐데, 하루키의 작품에다 하루키스럽지 않은 심각한 비평 용어로 옷을 입힌 걸 보니(사실은 벗기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당혹스럽다가도 재미있어집니다. 당혹스럽다는 건 "내가 예전에 끌렸던 하루키가 정말 그런 모습 그런 의도였을까" 하는 생경함이 아마도 그 이유일 텐데, 하긴 끌리는 걸 언제까지나 미지의 영역에 남겨 두는 것보다 한번쯤은 정색하고 "분석"해 보는 작업도, 차라리 독자(우리 자신)의 성숙을 위해 의미 있을 수 있습니다.
아예 이런 번거로운 생각도 (하루키의 독자답게?) 떨쳐 내고 나면, 저자(비평가) 가토 노리히로 선생이 하루키의 개인사를 짚어 가며 그 숨은 의도를 자기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대목이 그저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비평 용어를 몰라도, 정말 하루키의 팬이라면 그 느낌이 딱딱한 외피를 깨고 바로 접수되는 "텔레파시"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게 가능한가? 독자 하기 달렸습니다. 읽고 나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저자께서 꽤 열린 마음의 소유자이고, 하루키 말고도 여러 당대의 일본 작가들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는 분이지만, 하루키에 대한 든든하고도 순도 높은 애정을 품고 있다는 점입니다. 애정의 방향을 공유하고 밀도까지 비슷하다면, 한 마디를 던져도 그 말이 품은 의미 열 개가 얼마든지 접수 가능합니다.
저자는 하루키의 활동 시기를 크게 세 단계로 나눕니다. 1979~ 87, 1987~99, 1999~2010이며, 하루키의 팬이라면 저 연도의 구획이 대강 무엇을 기준으로 이뤄졌는지 책을 펴 읽기 전부터 눈치챌 수 있을 겁니다. 각 시기는 "부정성의 행방", "자석이 작동하지 않는 세계에서", "어둠 속으로" 등의 제목이 붙었습니다. 제 느낌으로는 저 거창한 세 개의 어구보다, 각론(저자는 각 시기를 다시 2, 3개의 구간으로 나눕니다)에서 등장하는 "디태치먼트", "내폐성", "맥심(칸트식 개념입니다)", "폴리티컬" 같은 개념어들이, 하루키 문학의 핵심 개성과 은밀한 무의식 등을 속속 잘 짚어낸다 싶었습니다.
제가 특히 공감한 건 제1기, 2기(이 책 저자의 기준)를 향한 분석입니다. 이념의 대립이 청춘기 지성을 족쇄처럼 억압할 때 이미 역사의 향방이 다른 쪽으로 고비를 틀었음을 알고 초연한 듯 쿨한 듯 개인의 내면으로 시선을 집중하면서도 감각의 쾌락("청춘이 자신의 특권을 누리는 건 죄가 아님")에 몰입하는 듯, 그러면서도 스스로 정한 원칙은 지키는 내향성(책에서는 "내폐성"이란, 보다 강도 높은 용어를 씁니다) 따위가, 특히 그런 조류가 자신의 청춘기를 휩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많은 어필을 했을 거란 분석이죠. 여기서 저자는, 안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은근 그의 작품에 깔린 "역사성"에 대해 주목합니다. 한국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널리 공감을 얻는 비결이 있다면, 일본인으로서의 죄의식이나 초국적성의 청춘적 방황 같은 게 도처에 향수처럼 뿌려져 있다는 건데, 저자가 서문에서 특히 최근 고조되는 동아시아의 긴장된 정세를 언급하는 것도 깊은 사려가 깔려 있습니다.
사실 하루키의 문학은 엔터테인먼트 장르로도 분류하기 어려운 게, 모든 작품이 읽기에 말쑥하고 똑떨어지는 경쾌한 내러티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일부 건방진 독자들이, 그의 작품세계라면 아주 익숙하고, 마땅히 이러겠거니 여기는) 어떤 경로로부터 크게 이탈합니다. 한국에서는 당시 알 수 없었으나, 이 점 관련 "대체 뭐냐", "쓰다 만 것 아니냐" 같은 항의를 적잖게 듣고, 편집진도 (벌써 거물이 된 그에게) 문의를 하기도 했다는군요. 이때 하루키는 "(그런 점들을 혹은 의도를) 이해하려면 (나의 시대에는) 오래 걸릴 것" 같은, 어찌 보면 정말 그답지 않은 고답성을 드러내기도 합니다(물론 아닙니다만). 저자는 "왜 우리 독자들과 비평가들이 별도의 이해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이 책을 통해 몇 가지 시론(프레임)을 제시하는 거죠. 이 시도들이 정말 작가 하루키의 내심과 일치한다면, 이제 (책 제목대로) "하루키는 (알고보니 정말로) 어려웠다"가 되는 겁니다. 물론 모르고 지나친 게 알고 보니 어려웠음을 깨달았다면, 깨달은 그 순간부터는 더 이상 어려운 게 아니죠.
저자는 평단과 작가들이 모두 하루키를 폄하할 때 거의 혼자서 그를 옹호하던 스탠스를 보이기도 했고(이 때문에, 그의 표현을 빌리면, "역시 버터바른 치장형 평론가군" 같은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반면 (이제는 하루키의 작가적 위상을 거의 누구도 의심하지 않게 된 후인) 최근 몇 년 동안엔 오히려 하루키에 대한 과격한 비판을 시도하다 매체 편집자에게 주의를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남들이 모두 예스라고 할 때 노를 외치기는 어느 조직, 직역에 속한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데, 그만큼 확고한 신뢰와 분명한 공감에 이르렀기에, 소신 있으면서도 분명한 개성이 깃든 보편타당한 패러다임(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요?)까지 제시할 수 있는 것 아닐지요. 이 책, 한 번만 더 읽고 나서, 지금까지 읽었던 하루키의 작품이 어떻게 달리 보이는지 책장에 꽂힌 모든 그의 책을 다시 만나는 여행을 떠나봐야겠습니다. 위대한 정신은, 즐겁고 예사로운 말투 속에 진짜 진리를 심어 주는 게 그의 진짜 성취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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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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