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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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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표기
라틴어 수업
글쓴이
한동일 저
흐름출판
평균
별점9.2 (301)
김진철

언어를 가리켜 존재의 집이라고 부르는 입장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고하고, 느끼고, 표현하고, 감흥을 받는 일체의 기제가 다 언어 속에 이미 근본의 틀을 마련한단 뜻입니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보면 "설령 어떤 민족이 자존과 독립을 잃는다 해도, 그 언어만은 간직할진대 수인이 감옥의 열쇠를 맡아 둔 것과 다름없다"고 한 대목이 있습니다. 특히 다른 민족에 의해 일시 주권을 잃고 민족 문화를 말살당할 뻔한 우리로서 큰 공감을 보낼 수 있는 지적입니다.

어떤 분은 그런 말씀도 하더군요. "라틴어, 흐르는 맑은 샘물과도 같은 언어이다. " 이 말 안에는 많은 뜻이 숨어 있겠으나, 다양한 격변화를 통해 명확한 뜻을 표현하고, 그 말과 글을 배우는 동안 평범한 머리도 공부에 최적화한(이 책 중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두뇌로 변환시켜 준다는 뜻에서, 어쩌면 맑은 물이 탁한 물체를 씻어내듯, 발화와 학습 과정에서 우리의 흐린 정신을 맑게 바꿔 준다는 의미도 들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잘 다듬어지고 도덕적인 영혼을 지닌 저자의 맑은 말씀 덕분에 더 타당한 말씀처럼 들리는 건지도 모릅니다.

p39에 보면 그런 말씀도 있습니다. "산스크리트(संस्कृत)의 '밤에 흐르는 물처럼 모호하다'는 뜻에서 인도-유럽 어족의 no, not 등이 파생되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न(나. na)만 보았다' 등으로 고대인들은 표현하였다.(여기 대해서는 이설도 있음)" 이래서 저자분처럼 뛰어난 학자의 수업은, 그 자체가 인문의 아름다운 연쇄 파장이며 인생에 대한 차분하고 잔잔한 관조일 듯합니다. 하나를 알면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만물의 이치에 대한 설명으로까지 완성되는 거죠. 저자는 말합니다. "엄격한 문법에 따라 의미를 형성하는 라틴어는 그 어느 말보다도 수학적인 언어이다."

Quae sunt Caesaris Caesariet quae sunt Dei Deo

그 유명한, "캐사르의 것은 캐사르에게.... "의 라틴어 구절이죠. 기독교 신약의 원문은 헬라어로 되어 있으므로 아주 큰 의의가 있는 문장는 아니지만, 저 예를 통해 영어 등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라틴어 관계대명사의 용법이라든가, 속격이라든가, 여격의 용법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Beispiel이긴 합니다. 저자 한 교수님도 수업 중에 그런 항의를 듣기도 하시나 봅니다. "왜 특정 종교에 관련된 말씀을 하시죠?" 거참... 서양 문화 자체가 특정 종교의 지대한 영향을 받고 모태로 삼아서 예까지 발전해 온 건데, 종교를 따로 떼어놓고는 문학이든 철학이든 논의가 불가능하죠. 저런 학생의 태도는 중립 지향이 아니라, 본인의 소양 편협, 강박적 거부감을 드러내는 겁니다. 하물며 라틴어는 고대에 사멸한 후 수도원이란 인큐베이터에서 가까스로 생존해 온 셈인데 말입니다.

여튼 이 대목은 세속의 일과 천상의 일을 어떻게 분별해야 할지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입으로 친히 비교적 명확한 답을 내려 준 대목입니다. 저자께서는 이 대목을 놓고, 정교 분리의 의의를 거론하십니다. 반면 그 바로 앞 대목에서 사도 바울의 "국가의 권위는 신이 세워주었으므로..."의 말을 인용하는데, 저자는 "오히려 신학히 발전할 수 있는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p98)"고도 평가합니다.

라틴어에서 가장 신기할 만큼 두드러지는 특성은 바로 관사류가 없다는 점입니다. 신학교에서 많은 이들의 골머리를 앓게 하는 고전 헬라어의 경우 매우 복잡하게 정관사, 부정관사가 발달해 있죠. 이 책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산스크리트도 라틴어처럼 관사류가 아예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명쾌하게 해명된 바가 없는데, 저자는 "... 이후 유럽어에서는 관사가 다양하게 발달하여 명사의 성과 수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엄격한 어순을 통해 격도 드러낼 수 있었다"고 하십니다. 격변화를 이루는 관사가 있으면 어순이 꼭 엄격할 필요는 없으나, 여튼 독일어는 어순도 엄격하긴 합니다. 라틴어는 반면 명사의 격변화가 워낙 뚜렷해서인지, 세상에서 가장 어순이 자유로운 언어죠. 이는, 조사와 어미의 도움을 받은 한국어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언어는 그를 말하는 사회의 범절, 관습도 투영하는 그릇입니다. 저자는 이 책 여러 대목에 걸쳐, "한국어가 참 거칠다", "나이와 지혜가 정비례라도 하는 양 권위를 내세우다가, 취업 경쟁 앞에서는 한 살이라도 줄이려고 애쓴다" 처럼, 언어가 거울처럼 반영하는 한국 사회의 비리와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저자는 이어, 이탈리아어나 독일어에서처럼 처음에는 일단 예의를 차리다가, 어느 정도 친분이 쌓이면 duzen처럼 편안한 투로 바꾸는 관행이 합리적이지 않냐고 독자들에게 제언도 합니다. 이를 두고 저자는 수평적 언어화라 명명하는데, 이 역시 라틴어의 영향이 짙게 배어난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라틴어에 완곡어법, 접속법, 정중 화법 등이 발달한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로마 제국의 정복을 받은 점령지에서조차 이런 영향이 언어 속에 파고들었다는 뜻입니다. 검토가 좀 필요하죠.

p183에 보면 이탈리아어 "티라미수"에 대한 재미있는 분석이 나옵니다. su는 이탈리아어 전치사이며, up 같은 뜻을 담았다고 하시는데, 프랑스어의 sus도 같습니다. 이 책은 전체에 걸쳐, 왜 공부가 인간 정신을 속박해야 하는가, 자신만의 숨겨진 자질을 마음껏 계발하는 게 생의 본질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자유로운 상상이 곧 인간의 해방이요, 문화의 발전을 촉진하지 않는가 같은 주장을 폅니다. 그래서 책의 첫 장도 "Prima schola alba est"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왜 "희다"라는 뜻이 "휴강"이 되냐 하면, alba=희다=비어 있다=blank로 연관시키면 될 것 같네요.

p237에 보면 malus는 그리스어의 μῆλον 어원을 가지는 것도 있고(멜론이 원래는 사과를 뜻했다는 게 재미있죠. 지금은 엉뚱하게 변했지만), μέλας라고 검다, 사악하다의 어원을 가지는 것도 있죠(멜라닌 색소라고 할 때 그것). 그 다음에 상당히 재미있는 주장이 나오는데, 십계명의 여섯번째와 영어의 six가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독자는 신중히 이 대목들을 읽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책에는 한일월드컵 당시 8강전의 결과 때문에,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저자께서 시험을 못 볼 뻔한 사연도 나와 있습니다. 읽으면서 머리가 아찔했는데요. 원 문명국가에서 이런 일이 다 벌어질 수 있나. 이런 한심한 사람들이 학사관리를 하는 학교의 업무 결과를 사회가 어떻게 신뢰를 할 수 있나 하는, 근본적인 신뢰의 붕괴에 가까웠다고나 할까요.

저는 라틴어 하면 대뜸 떠오르는 분이, 역시 같은 서강대에 재직하셨고 최초로 비 외교관 출신으로 바티칸 대사에 임명되신 성 염 교수님이 떠오릅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임명하신 분이었는데요. 그분의 저서도 인간의 자유, 보편적 가치, 해방에 대한 염원이 책 가득 흐르는 모습이었습니다. 딱딱하고 엄격한 라틴어 때문에 자살에 이른 소년의 아픈 사연이 담긴(이 책에도 여러 스트레스가 많으셨는지, 건강 때문에 일정 기간 사목을 못하셨든가, 자살에 대한 상념도 여러 번 피력되는 등 좀 심각한 술회가 많이 보입니다) <수레바퀴 아래서>와는 달리, 한동일 교수님처럼 학생들을 푸근히 품어 주시는 스승만 있다면 세상이 보다 따스한 온기로 작동할 것 같기도 합니다(물론, 공부 같은 건 스스로 알아서 해야겠지만). 이 책의 완독을 마친 지금, 유독 노무현 대통령이 떠오르는 건 무슨 까닭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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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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