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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철
- 작성일
- 2017.10.20
중체서용의 경세가 증국번
- 글쓴이
- 총 샤오롱 저/양억관 역
이끌리오
중체서용을 내세운 "양무운동"은 근본적인 각성에서 우러나왔다고 보기 힘든 움직임이었습니다. 시늉만 내는 개혁이었다고나 할지... 지금까지 믿어왔던 가치관이나 신조를 송두리째 뒤엎고 새 사람으로 거듭날 마음은 없고, 외국의 무기나 형식적인 법제만 들여와 마치 몸에 안 맞는 양복처럼 어설픈 시늉이나 하려던 몸부림 아니었을까, 제 생각은 이런 쪽에 가깝습니다. 마치 남의 글을 베껴 사람 흉내를 내고 싶은 벽촌의 무지렁이가 빈사지경에서 애처로이 떨어대는 단말마의 비명과 경련과도 같다고나 할까요.
증국번을 가리켜 민족 반역자라 일컫는 입장도 있는가 봅니다. 하긴 그가 전근대적 계급 구도를 옹호한 인물인 건 맞습니다. 반봉건은 종종 반외세와도 노선 연합하는 경향이 있긴 하며, 이 두 흐름이 자주 결연한다면 그 반대편에 선 진영도 아마 잦은 친화성향을 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역사에서 일종의 미러링 효과죠. 그러나 증국번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상의 지략을 짜내고, 윤리적 처세를 아슬아슬 이어가며 무정부 상태를 막아내려 분투한 위인이라는 점엔 다수가 동의합니다.
증국번 등의 급부상 과정을 지켜보면, 역으로 한때 그토록 검소하며 강건한 기풍을 자랑했던 만주족의 청 체제가, 대체 무슨 곡절로 이처럼 무기력하고 타락한 시스템으로 추락했는지 자못 비감이 솟습니다. 태평천국 운동에서 들불처럼 일어섰던 기층농민세력, 이들을 이끌었던 유사 종교 집단 수뇌부가, 과연 봉건 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세사을 열어젖힐 역량이 있었을까요? 주원장의 경우 내내 사이비 종교 결사, 비적떼 무리 수괴의 정체성만 고집했다면 결코 창업자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이때로부터 900여년 전 황소의 난, 300여년 전 이자성의 봉기 등은 왜 실패했을까요?
농민 봉기라고 해서 반드시 태생적 정당성과 필연성, 혹은 혁명 완성의 자동 자격을 갖추는 건 아닙니다. 만주족이 예전처럼 질박한 마인드셋을 유지했더라면, 과도한 수취로 농민의 삶을 궁핍에 몰아넣지 않았을 테며, 실제로 강건성세 초기에 한 해 분 과세를 파격적으로 면해 주는 등 성공적인 행정과 정치가 위와 아래 모두를 만족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계속 청렴한 통치 기조를 유지했던들, 위와 아래가 하나가 된 거대한 대륙을 어느 제국주의 세력이 넘볼 수 있었겠습니까.
만주족 지배층이 민생 보호와 (해상)국경 방어라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하니, 이제 다시 한인 출신 경세가가 병권을 일부 장악하여 전면에 나서는 게 당연합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대로, 이때 증국번이 아예 보위에 올라, 출신 성분도 그럴싸하겠다 학식과 지혜도 남달리 구비했겠다 치세 방략도 넘치도록 구상해 뒀겠다 한번 포부를 천하에 떨쳤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시대는 이미 공화주의 민주주의로 치달리는데 무슨 시대착오적인 황정 재개창이냐? 글쎄요. 뭐 지금도 공산주의를 빙자한 시진핑 시스템이 영구 집권을 꿈꾸는 판인데.
이상하게도 호남성에선 "천자의 그릇"이 자주 배출됩니다. 증국번이나 동료 좌종당이나 다 그곳 분들입니다.(마오나 펑떠화이 이야기는 할 필요도 없겠죠) 물론 태평천국 운동이 하필 그곳에서 큰 세를 얻었기에, 이에 대한 반동으로 이곳의 인재들이 의기를 떨치고 일어선 것이겠으며, 이는 마치 <삼국연의>에 나오는 창의군의 집결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양반이나 그 동료 좌종당이나 좀 일찍 타계한 덕에, 험한 꼴로 일본에게 국치를 당하는 몹쓸 체험은 구경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자 이홍장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청일전쟁의 패배를 겪었으며, 강화 협상을 위해 도일했다가 테러까지 당하는 봉변을 치렀죠. 모든 게 국운(國運)의 형세가 그러했기에, 개인의 힘으로 어쩔 수 없던 과제였습니다. 그래도 이처럼 뭐 하나 빠지는 점 없이 버젓하고 건전한 위인이 현대 중국의 국부로 군림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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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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